성, 젠더, 여성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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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사라 베이츠가 여성 차별의 뿌리를 살펴본다. 사라 베이츠는 영국 사회주의노동당(SWP) 당원이고 섹슈얼리티, 여성, 환경 등에 관해 많은 글을 썼다.
여성 차별의 현실은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다. 저항과 투쟁으로 많은 진보가 성취됐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임금 불평등, 성적 괴롭힘, 재생산권 공격, 성적 대상화 등 깊게 뿌리박힌 성차별로 갈가리 찢겨 있다.
때로는 ‘여성이냐 남성이냐’가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분단선처럼 보인다.
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남자다움’이나 ‘여자다움’이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한다고 본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러한 규정들은 생명 활동과 사회적 요소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진다.
과학자이자 저술가인 코델리아 파인은 신생아가 “부모, 또래, 교사, 옷, 언어, 미디어, 롤 모델, 단체, 학교, 교육 기관, 사회적 불평등 … 그리고 당연하게도 장난감”을 통해 “성별 구성물”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이런 사회화 과정은 사람들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여성은 남성보다 과학이나 수학 같은 과목을 못 한다는 흔한 고정관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여성과 남성의 뇌가 본질적으로 달라서일까?
성별
심리학자 클로드 스틸은 대학생들을 두 집단으로 나눠 수학 시험을 보게 했다.
시험 전에 스틸은 한 그룹에게 시험 결과가 “성별에 따라 달랐다”고 말하고, 다른 그룹에게는 성별에 따른 차이는 대개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성별에 따라 결과가 달랐다고 들었던 여성들의 성적이 시험을 본 사람들 중 가장 낮았다.
다시 말해, 여성의 뇌 크기나 구성방식 때문이 아니라 성별 고정관념이 강력하게 내면화됐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생긴 것이다.
왜 이 실험이 중요한가? 이 실험이 성별에 따라 기대되는 바가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성스러움’과 ‘여성스러움’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면 이런 개념이 상이한 사회나 역사적 시기에 따라 달라졌음을 간과하게 된다.
가장 단순하게 말해 생물학적 성은 대체로 개인의 생식 기관으로 구분된다.
소수 사람들은 간성으로 태어나는데 이는 그들의 신체적 혹은 호르몬 발달이 전형적이지 않음을 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별 정체성이 태어날 때 부여받은 성과 일치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성별 표현이 시간이 흐르면서 바뀐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논바이너리”로 규정하며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고정불변한 정체성을 거부한다.
이분법적 성별 규정은 인간이 ‘동전의 앞면 아니면 뒷면’ 같은 식으로 규정되게끔 사회화한다.
그래서 여자아이에게는 협조적이고 배려하고 공감하는, 이른바 ‘여성스러운’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 장려된다. 반면, 남자아이에게 어울린다고 여겨지는 거칠고 자기주장 강하고 독립적인 행동거지는 억누르는 것이 장려된다.
이런 고정관념들이 사회 전반에서 강화된다: 집, 학교, TV에 매일같이 도배되는 장면들 등.
그러나 이러한 ‘여성스러움’과 ‘남성스러움’은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경직된 성별 관념에 순응해야 한다는 광범한 압력의 결과다.
인류학자 게일 루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호 배타적인 성별 정체성 개념은 자연스러운 차이를 표현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자연스러운 유사성을 억누르는 것이다.
“여기에는 억압이 수반된다. 남성이 ‘여성성’을 보이든 여성이 ‘남성성’을 보이든 공동체가 이를 억압하는 것이다. 그 공동체가 ‘남성성’·‘여성성’을 뭐라고 규정하든 간에 말이다.”
젠더는 생물학적 성, 자기 몸에 대한 타인의 인식, 성별 가치관과 성별에 따른 잣대 같은 사회적 요소들, 성적 존재로서의 발달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차별과 저항의 경험도 모두 젠더를 변화시키고 재구성할 수 있다.
여성이 무엇이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는 단지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며 아래로부터 도전받기도 한다.
여성들의 반격은 종종 성별의 경계를 재정립해 왔다. 마찬가지로 재반격에 성공한 우파는 여성을 다시 성별 고정관념 안에 가두려 한다.
낙태권 쟁취는 여성을 더 자유롭게 한다. 이러한 성취가 무위로 돌아가면 여성은 다시 제약받는다.
이 명백한 여성 차별의 현실이 생물학적 요인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유물론적 설명을 내놓는다. 즉, 인간 사회의 변화·발전을 보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과 생각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본다.
여성 차별은 인간 사회에서 필연적인 현상이 아니며 계급 사회의 등장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약 1만 년 전 인류는 지금과는 매우 다른 사회에서 살았다.
여성과 남성은 함께 옮겨 다니며 사는 작은 무리 속에서 보통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니었으며 각자의 구실은 모든 무리 구성원이 함께 생존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농업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회는 한 곳에 더 영구적으로 정착하게 됐다.
잉여
잉여 생산물이 세대를 거쳐 전수되기 시작했다. 잉여는 모든 사람이 편안한 삶을 누리게 할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잉여는 사회의 한 집단(지배계급)이 나머지 사람들로부터 분리돼 다수를 착취하기에는 충분했다.
여성은 핵심적인 생산적 구실에서 밀려나는 경향이 있었고 잉여는 소수의 남성들이 통제했다. 마르크스주의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이러한 전환을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라고 불렀다.
엥겔스는 이렇게 썼다. “남성이 집안에서 통솔권을 쥐었고 여성은 업신여겨졌으며 노예, 남자 욕정의 노리개, 그저 아이를 낳고 기르는 도구로 전락했다.”
핵심적으로는 집단적 책임 하에 있던 양육이 개별화된 작은 가족 단위에서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것으로 변했다. 엥겔스는 이렇게 말했다. “최초의 가족 형태는 자연적 조건이 아니라 경제적 조건에 기초했다. 즉, 자연적으로 발전한 기존의 공동 소유에 맞선 사유재산의 승리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엥겔스 이래로 인류학자 엘리너 리콕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성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던 사회들을 연구했다.
특히 엘리너 리콕은 계급 등장 이전의 북아메리카 사회를 연구했고, 무역이나 임금 노동의 도입이 어떻게 이 사회들을 변모시켰는지 연구했다.
그녀는 이 사회들의 조직 방식에 나타난 변화의 “핵심”은 “경제적 단위로서의 가족이 강화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가족 형태의 변화를 부차화하면 사회에 대한 해석이 불완전할 뿐 아니라 왜곡된 채로 남게 된다.”
물론 오늘날의 가족이 그 시절 우리 조상들과 똑같지는 않다.
그러나 엥겔스, 리콕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연구는 가족의 변화가 여성 차별이 출현하는 데서 핵심적이었음을 보여 준다.
오늘날 가족은 성역할 관념에 단연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여성의 “자연스러운” 구실이 기르고 보살피는 것이라는 신화는 사회가 조직되는 방식에서 비롯한다.
여성이 양육자 구실을 수행하리라는 기대를 받는 것은 사회가 여성에게 주된 양육자 구실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가족은 자본주의에서 다음 세대 노동자를 기르고 사회화하고 그런 과제를 개인들에게 떠넘기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1만 년 전 사회들을 살펴보는 것은 그 사회들을 모방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눈앞에 보이는 성역할 너머에 있는 것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성역할이 너무나 뿌리깊어 보여서 성역할 없는 세계를 상상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인류 역사 대부분의 시기 동안 남성과 여성은 오늘날과 같이 왜곡된 성역할을 강요받지 않았다.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은 오늘날과 거의 같지만 그들은 여성 차별이 체계적으로 벌어지는 사회에 살지 않았다.
남성과 여성에 대한 관념은 사회가 조직되는 방식에서 나오지 그 반대가 아니다.
사람들이 사회를 다르게 조직하면, 성별에 대한 관념,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남성과 여성의 능력도 다른 맥락에서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억압에 대한 두려움 없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알맞은 방식으로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드러낼 자유가 있을 것이다.
이를 쟁취하는 과정은 단지 성별에 따른 잣대나 고정관념에 맞서 싸우는 것뿐 아니라 대담하게 근본적인 변혁을 꿈꾸는 것이기도 하다.
엘리너 리콕은 다음과 같이, 이를 가장 잘 표현했다.
“마르크스는 한 사회의 여성 차별이 그 사회의 일반적인 억압의 척도라고 지적했다. 여기에 한 마디 덧붙이면, 기존 사회 질서에 반대하는 운동에서 여성이 발휘하는 힘은 그 운동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재는 척도다.”
리콕이 옳았다. 여성 차별에 맞선 투쟁은 이 썩어빠진 체제를 끝장내고 더 나은 사회주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여성과 남성이 함께 건설하는 투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