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승리한 정부·여당:
개혁을 추진할 것이라고 믿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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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를 읽기 전에 “2004년 총선 대승리와 이후 :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은 어떻게 배신했는가”를 읽으시오.
4월 22일 열린 제5차 비상경제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국책 사업을 통한 50만 개 일자리 창출 등 이른바 ‘코로나 뉴딜’을 발표했다.
이 회의에서 발표한 경제 위기 대책의 비용만 85조 원이다. 4차까지 열린 비상경제회의에서 발표한 대책의 비용 규모도 150조 원에 이른다. 국가가 주도해 투자를 하고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것은 위기 상황을 반영한 것이자 대중의 불만을 의식한 대응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부 창출 일자리는 현재의 단기 공공일자리 같은 것인 듯하고,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임금 보전과 해고 금지 등은 빠져 있다.
경제 상황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4월 들어 수요 감소와 유가 하락의 영향으로 석유화학제품, 자동차 부품 등은 수출액이 절반으로 줄었다. 통계청도 지난해 같은 달 대비 20~59세 일자리가 50만 개 가까이 줄었고, 임시 휴직자가 160만 명 늘었다고 발표했다. 신규 채용 계획의 3분의 2가 취소됐다. 앞으로 실업 문제가 더 심각해질 것이라는 것에는 아무도 이견이 없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의 노동자·서민 지원은 이들이 겪는 고통의 정도에 비해 충분치 않다. 문재인은 이날 2차 추경안을 국회에서 신속히 통과시켜 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안의 핵심은 국민 70퍼센트에게 가구별로 소득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 안은 1차 추경에서 지원 받은 서민 일부를 배제한다. 정부는 총선 다음 날 이 안을 정세균 국무총리가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확정했다. 이 추경안이 전 국민에게 지원하겠다고 한 민주당의 공약과 배치되는 데도 말이다.
그 때문에 민주당 지도부와 홍남기 경제부총리 간에 지급 대상(전 국민 지급이냐, 70퍼센트 지급이냐)을 놓고 갈등이 벌어졌다. 이 갈등에서 홍남기는 기업주와 관료들, 친기업 언론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진보 진영의 홍남기 경질 요구가 정당한 이유이다.
결국 문재인이 모호한 지시로 책임을 회피한 상황에서 정세균의 중재로 당정이 절충안에 접근했다. 전 가구에게 지급하되, 상위(30퍼센트) 소득자에게는 수령하지 않도록 유도해 재정 부담을 줄인다는 것이다. 정세균은 이 안으로 여야가 먼저 합의해 오라 하고, 통합당은 당정이 구체 안부터 내놓으라며 여전히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어쨌든 이 안이 시행되면 조직 노동계급에게도 수령 반납(자발적 기부?)의 압력이 가해질 것이 분명하다.
재정 건전성
사실 민주당의 전 국민 지급 안도 지원 액수가 적기 때문에 정부안과의 차이는 3조 원을 국채 발행으로 마련할 것인지에 불과하다. 대통령이 비상경제회의를 할 때마다 수십조 원씩 돈을 풀겠다고 발표하는 것에 견주면 매우 미약한 차이이다.
정부의 본심은 홍남기가 4월 20일 기획재정부 확대간부회의에서 한 말에 있는 듯하다. “더 어려운 상황에 대비해 추가적인 재정 역할과 이에 따른 국채 발행 여력 등도 조금이라도 더 축적해 놓는 것이 필요하다.” 즉, 위기가 더 깊어졌을 때 기업을 충분히 지원하려면 복지 지출을 최소한으로 억제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부는 1997년 IMF 위기 때 기업 구제에만 160조 원을 썼다. 기업 살리기의 목적은 일자리 살리기가 아니었다. 당시 일자리를 잃은 사람만 100만 명이 넘는다. 구제금융을 받은 기업들이 오히려 그것을 갚아 회생하려고 인력 감축에 더 적극적이었다.
한편, 총선 때 전 국민 소득지원을 공약하고는 선거 후 바로 이를 뒤집으려 한 것은 2012년 대선 후 박근혜가 보인 행태와 꼭 닮았다. 후보 시절 박근혜는 ‘전 국민 기초연금 지급’을 공약하고는 당선 직후, 취임도 하기 전에 이를 뒤집었다.
당시 경쟁 후보였던 문재인은 선거 기간에 박근혜의 공약을 반대했다. 예산을 아껴야 한다는 이유였다(재정 건전성 논리). 대중과의 약속은 쉽게 뒤집어도 한국 지배자들 내 (대체적) 합의를 지키는 데에는 일관성이 있는 셈이다.
문재인 정부 전반기에도 여권 인사들과 경제 관료들 사이에 엇박자가 났었다. 그때도 경제부총리 경질 요구가 있었지만 문재인은 김동연 편을 들었다. 최근에도 문재인은 홍남기에게 힘을 실어 왔다.
노동자들‘끼리’ 고통 분담
2차 추경안에는 공무원 인건비 삭감도 포함됐다. 소득 지원 예산 확보가 명목이다. 중앙행정기관 20곳의 연차휴가 보상비를 전액 삭감한 것이다. 기획재정부는 나머지 중앙행정기관 34곳의 연가보상비도 집행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얄팍한 서민 소득 지원마저 노동자 인건비에서 지출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경제 위기 고통 분담과 서민 지원을 위해 노동자들이 양보를 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
통합당도 총선 후 또 입장을 바꿔, 전 국민 지원에 반대한다. 민주당은 이제 공약 배신의 책임을 통합당의 말바꾸기 탓으로 돌리려 한다. 그러나 통합당은 ‘당정 간 합의나 하고 오라’면서 간단히 무시했다. 민주당의 개혁 배신이 우파의 기를 살린다는 경고가 여기서도 일부 입증되는 듯하다.
정세균은 4월 17일과 18일 한국노총 지도부와 민주노총 지도부를 각각 만났다. 노동계의 긴급 요구안을 들었지만 어느 요구에도 확답은 하지 않았다. 다만 노사정 합의의 모양새로 위기 대응 방안을 마련하자는 것에만 관심을 보였다.
노조와 진보정당 등 노동계 지도자들이 문재인 정부와의 사회적 대화에 기대를 걸지만, 그것이 대중의 필요에 부응할 전망은 매우 어두운 이유다.
문재인 정부는 총선 이후 일자리 창출을 앞세우며 노사를 아우르는 노사정 합의의 모양새를 갖추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기업들이 요구하는 각종 규제 완화, 노동시간 연장, 임금체계 개악을 통한 임금 억제 등을 추진해 왔고 추진하려고 한다.
총선 결과가 노동운동에 뜻하는 바
21대 총선 결과, 자본가 계급의 양당 구도가 강화됐다. 민주당과 통합당이 지난 1년간 진영논리를 구축해 온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두 당의 의석을 더하면 전체 의석의 94퍼센트로 역대 최고다. 두 당의 지역구 득표를 합하면 전체 투표의 90퍼센트를 넘는다.
무소속 당선자는 5명에 불과한데, 이들 모두 두 당(4명이 통합당)의 중진급 정치인들이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경우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제3당 소속으로 지역구에서 당선된 것은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유일하다. 덕분에 정의당은 21대 총선에서 형식상으로 지역구와 비례 모두에서 의석을 얻은 유일한 정당이 됐다. 선거제의 허점과 주류 양당의 꼼수를 비판할 자격이 있다.
심상정 대표는 선거 다음 날 정의당 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이번 총선은 수구 보수 세력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 이뤄졌지만, 양당정치 강화, 지역구도 부활, 선거개혁 와해 등 정치개혁의 후퇴라는 역사적 오점을 함께 남겼습니다.”
그러나 민주당의 책략으로만 민주당의 압승을 설명할 수는 없다. 여러 실증 자료가 증명하듯, 지역주의가 강화됐다고 볼 근거는 없다. 그리고 양당 정치 강화와 선거제 개혁의 결과적 좌절은 미안하지만 정의당 자신의 책임도 돌아봐야 한다.
문재인과 민주당은 선진국 해외 정부들의 코로나19 대응 실패, 우파 야당의 헛발질과 너무 노골적인 반(反)서민성, 그리고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에 대한 노동계 지도자들의 협조 기조에서 반사이익을 얻었다. 중도파 정당인 민주당이 좌우로 빠져나갈 표를 성공적으로 가로채어 운좋게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를 알기에 민주당은 총선 다음 날부터 “부자 몸조심” 하기를 강조하고 있다. 여야 상생, 협치를 강조한다. 2004년 총선 승리 이후 개혁 약속을 남발하는 바람에 실패한 것처럼 진실을 왜곡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2004년 총선 직후에도 열린우리당(민주당의 당시 이름)에서는 언행 조심과 여야 상생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지배적이었다. 노무현 정부와 원내 다수 여당 열린우리당은 개혁을 남발해서가 아니라 개혁이 턱없이 부족하고 개혁을 배신해서 몰락했다. 심지어 노무현 정부는 과반 여당이 된 지 1년 만에 한나라당에게 연립정부(“대연정”)를 제안했다. 한나라당이 싫어서 찍어 줬는데, 그 당에 권력 분점을 제안하니 지지층이 다 떨어져 나가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과거
민주당은 박근혜 탄핵 이후 치러진 세 차례의 전국 선거에서 모두 이겼다. 통합당이 싫은 청년들이 “미워도 다시 한 번” 민주당으로 돌아온 것을 보면, 촛불 운동의 여파가 아직 공식 정치지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정의당도 표를 늘려 왔지만, 세 차례 선거를 치르면서 존재감은 주류 양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차화돼 왔다. 우파의 득표력 회복, 진보정당의 존재감 약화 현상은 정의당과 민중당이 촛불의 여파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지 못하고 있음도 보여 준다.
여기에는 지난 3년간 민주노총을 비롯해 정의당과 민중당 등 대표적인 세 노동계 조직의 지도자들이 문재인 정부와 협력해 개혁을 얻겠다는 전략을 추구해 온 것이 가장 큰 영향을 줬다.
노동계 지도자들의 이런 전략이 극적으로 전환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히려 민주당이 강화된(노동계 정당들에 맞서서도) 선거 결과 탓에 노동운동 안에서 문재인 정부와의 협력을 통해 개혁을 성취하자는 전략에 추진력이 더해질 것 같다.
경제 위기 때는 계급 간 불평등도 깊어지고 계급 간 갈등이 불거져 정치적 양극화가 진행된다. 특히, 위기에서 누구를 구할 것이냐, 위기의 대가를 누가 치를 것이냐 하는 정치 문제가 첨예해진다. 노동자 운동은 정치적 양극화를 올곧게 표현하고 투쟁으로 발전시킬지, 이를 사회적 대화, 즉 계급 간 타협으로 제어할지 선택해야 한다.
이 선택은 결국 누구에게 책임을 지려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회적 대화를 택하는 것은 국가와 기업주에게도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번번이 시험대에서 미끄러져 왔다.
민주노총 집행부가 총선이 끝나자마자 노사정 대화를 공개 제안하고, 사회적 대화 전략에 반대해 온 혁명적 좌파에 대해서는 가당찮은 이유를 들어 연대 단절을 결정한 것으로 보건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알아서 투쟁 건설 방향으로 바뀌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런 시기에 혁명적 좌파는 사회적 대화 같은 계급 타협(민중주의) 전략의 위험성(과 실패한 역사)을 설득하고 정치(노동계급 연대)의 중요성을 대중에게 강조해야 한다. 그리고 기층에서 개혁 염원 활동가들과의 공동 활동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