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딜 정책이 미국을 대불황에서 구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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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딜 정책이 미국을 대불황에서 구했다는 오해 또는 환상이 널리 퍼져 있다. 이런 믿음에 기초해 대부분의 정부들은 경제가 불황에 빠지면 으레 ‘뉴딜’이라는 이름이 붙은 경기부양책을 내놓는다.
하지만 1933년에 집권한 루스벨트가 대불황의 대책으로 제시한 ‘뉴딜’은 경제를 살리지 못했다. 미국 경제를 대불황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제2차세계대전 참전과 그에 따른 전시 경제체제로의 전환이었다.
1932년 말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의회는 첫 100일간 특별회기를 소집해 대불황 관련 대책을 내놓았다. 이것을 제1차 뉴딜이라고 부른다. 루스벨트가 추진했던 뉴딜 중 첫 번째는 긴급은행구호법으로, 곤경에 처한 은행을 지원하되 재무 상황을 고려해 일부는 파산하도록 하는 법이었다. 당시 미국의 은행 중 약 25퍼센트가 파산했다. 대신 루스벨트는 파산한 은행의 예금주를 지원하기 위해 연방예금보험공사를 설립했다.
이외에도 농민을 지원했던 농업조정법, 독점자본을 지원하는 동시에 노동자들의 노동3권을 보장하고 최저임금을 제공했던 전국산업부흥법, 식목·홍수제방 축조·도로 건설 등에 미혼의 실업자들을 끌어들여 실업을 완화시켰던 자원보존단, 일자리 창출과 에너지 생산을 위한 테네시 계곡 개발사업 등도 제1차 뉴딜 정책들로 추진했다.
이에 대한 반대는 좌우파 모두에서 나왔다. 우파들의 반대로 농업조정법과 전국산업부흥법이 위헌 판결을 받았다. 루스벨트의 왼쪽에서는 부유층에 누진과세를 하고 빈민들에게 지원금을 배분하자는 자산분배운동을 민주당 출신의 루이지애나 주지사 휴이 롱이 이끌고 있었다.
1935년 루스벨트는 제2차 뉴딜 정책을 제시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전국산업부흥법에서 노동관계 조항만 분리해 만든 전국노동관계법(일명 와그너법)이었다. 이 법이 시행되면서 미국 역사상 최초로 모든 노동자들의 단체교섭권이 인정됐고, 노동조합의 활동이 합법화됐다. 이를 계기로 미국 민주당은 인종차별주의 정당에서 변모해 노동운동 지도자와 연계를 맺고 개혁주의 색채를 띨 수 있었다.
이 법은 노동자들이 임금을 인상시킬 수 있게 해 소비를 진작시키려는 것이었다. 또한 루스벨트는 공공사업국을 설치해 대규모 토목사업과 공공시설물 건축을 추진했고, 저소득층에 주택담보대출(모기지)을 제공하는 연방주택저당공사를 설립했다.
루스벨트가 뉴딜 정책을 시행한 초반에 경제는 약간의 회복세를 보였지만 1929년 대불황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1차 뉴딜로 일자리가 170만 개가 생겼지만, 여전히 1200만 명이 실업자였다. 심지어 1937년 미국 경제는 대불황 초기보다 더 심각한 위기로 빠져들었다.
당시 케인스는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지지했다. 그러나 다시 찾아든 심각한 불황에 뾰족한 해결책은 없었다.
케인스는 자신의 저서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1936)에서, 이윤은 ‘자본의 한계효율 저하’ 때문에 하락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투자의 사회화 같은 급진적 조치만이 유일하게 효과적인 불황 타개책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해법을 적용하려는 진지한 시도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케인스 전기 작가 로버트 스키델스키가 잘 지적했듯이, 케인스는 자본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정부의 경제 개입을 지지했다. 케인스는 〈타임스〉 칼럼에서 1937년 영국의 실업률이 12퍼센트나 됐음에도 영국 경제가 호황에 근접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완전고용에 근접하는 경제 회복을 이루려면 루스벨트의 뉴딜보다 더 과감한 정부 지출이 필요했지만, 케인스는 이를 지지하지 않았다.
1930년대 위기의 깊이로 볼 때, 어정쩡하고 온건한 수준의 국가 개입은 효과를 낼 수 없었다. 1936년 연방정부의 지출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조차 그 지출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퍼센트를 겨우 넘는 수준이었다.
1930년대의 세계사를 살펴보면, 정부 지출을 대폭 늘려 경제를 빨리 회복시킨 공로는 케인스가 아니라 오히려 히틀러에게 돌아가야 할 듯하다. 히틀러는 국내총생산에서 군비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을 늘리면서 1938년까지 일자리 150만 개를 창출했다. 국가가 강제한 군비 증강과 중공업 확대가 투자처를 제공하면서 전체 경제를 성장시켰다.
당시 독일과 비슷한 경로로 간 또 다른 나라는 일본이었다. 국가가 경제를 완전히 통제하고 군사력을 확장하는 국가자본주의적 방식을 추구한 두 나라는 영국이나 미국보다 경기침체의 규모도 작았을 뿐 아니라 더 빨리 회복했다. 1930년대에 이런 국가자본주의의 길을 가장 극단적 방식으로 간 또 다른 나라는 스탈린이 이끈 소련이었다.결국 미국도 제2차세계대전에 본격 뛰어들어 군비 생산과 국가의 경제 지도를 전면화한 1942년에서야 1929년 이전 수준의 고용을 회복했다.
역사적 사실로 볼 때, 1929년 대불황에 직면해 루스벨트가 내놓았던 뉴딜 정책은 미국 경제를 살리지 못했다. 또한, 자본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해야 한다는 케인스주의적 처방도 함께 파탄났다. 불황에서 탈출케 한 것은 세계 전쟁이었다.
오늘날 상황은 몇 가지 점에서 1929년 대불황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그때보다 오늘날 정부 지출의 규모는 엄청 커졌고, 중앙은행은 경제 위기에 대응해 돈을 풀 태세가 돼 있다. 트럼프는 불황 초입임에도 국내총생산의 14퍼센트 규모에 해당하는 자금을 이미 시중에 내놓았다.
그러나 동시에 기업과 금융기관의 규모도 매우 커졌고, 따라서 이들을 살리기 위해 정부가 치러야 할 비용도 크게 늘어났다. 루스벨트 집권 초기에 파산한 은행들은 주로 한 주에서만 영업하는 중소 규모였다.
오늘날 기업과 은행들은 규모가 너무 커서 한두 개만 무너져도 국가 경제가 휘청거린다. 그래서 정부는 이들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파산하지 않도록 어떻게든 애를 쓴다. 그러나 위기를 모면했다 해도 국가 경제 전반에서 활력 있는 회복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부실한 자본이 충분히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가 처한 모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