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제 민주주의는 왜 언제나 대중을 저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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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가장 남용되는 단어 중 하나다.
국회의원들은 시위에 나선 학생들에게 의회를 존중해야 한다고 뻔뻔하게 훈계를 늘어놓는다. 자기네는 선거에서 이기려 거짓말하기 일쑤면서 말이다. 동시에 전쟁광 지도자들은 자기네가 다스리고 싶은 나라들에 점령군을 파병하겠다고 대중의 의사를 거스른다.
우리는 의회 민주주의가 대중의 의사를 가장 잘 대변하는 체제라고 배운다. 하지만 의회 민주주의의 근저에는 모든 유권자가 평등하다는 거짓말이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대기업 사장들도 나머지 사람들과 똑같이 한 표만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장들은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해고하고, 말 한 마디로 임금을 깎을 수 있다.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말이다.
은행가·금융가들이 돈으로 더 많은 표를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은 부를 해외로 옮기겠다고 위협해 정부가 긴축 정책을 펴도록 압박한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런 정책의 영향을 받는다.
이런 선출되지 않은 남성들과 때때로 여성들이 사회를 운영하고 군대·경찰·언론·첩보 조직들을 통제하는 자들도 그 일원이다.
그런 사람들도 한 표씩만 행사할 수 있지만, 권력은 “보통 시민들”에 비할 바 없이 막강하다. 심지어 선출된 정부보다도 훨씬 막강한 경우도 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의회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전체주의 독재를 지지해서도, 대중을 우매하다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노동계급이 이제껏 투쟁으로 쟁취한 그나마의 권리들을 가벼이 여겨서도 아니다.
자본주의 하에서 민주주의는 결코 충분히 민주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혁명가 칼 마르크스가 1871년 파리 코뮌을 보며 지적한 핵심 논지다.
당시 노동자들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들고 일어났고, 자신들의 의사를 반영할 새로운 기구를 만들어냈다.
파리 코뮌의 교훈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이 새롭고 더 급진적인 민주주의의 기초가 될 수 있다며 세 가지를 핵심 특징으로 꼽았다.
첫째, 파리 코뮌에서는 모든 노동하는 남성들에게 대표자를 선출할 권리가 있었다.
다른 나라들보다 수십 년 앞서 재산이 없거나 적은 사람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한 것이다.
둘째, 선출된 대표자들은 그들을 선출한 사람들과 같은 임금을 받았다.
셋째, 코뮌은 입법부와 행정부를 겸했다.
간단히 말하면, 코뮌이 법을 제정하고 집행도 직접 했다는 것이다.
그 덕에 이 신생 권력은 자신의 공약을 실현하고, 공장주·금융업자들의 기득권에 도전할 수 있었다.
지배계급은 그런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다. 코뮌이 수립된 지 석 달 만에 지배자들은 군대와 폭력배를 이끌고 이 급진적 민주주의를 분쇄하려 쳐들어왔다.
안타깝게도 혁명 세력은 지배자들의 도전을 물리치기에 충분한 힘을 조직하는 데에 실패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핵심적 교훈은, 자본가 계급은 자신들을 방해하지 않는 한에서만 민주주의를 허용하리라는 것이었다.
이 자본가 계급의 한 줌도 안 되는 자들이 부를 모두 통제할 권리를 갖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의 권리를 제멋대로 정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민주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면 바로 이 자본가 계급의 권력과 권위에 도전해야 한다.
파리 코뮌 이후 한 세기 동안 거듭거듭, 의회 민주주의에 맞서 파리 코뮌과 비슷한 대안이 부상했다.
러시아에서 1905년과 1917년에, 독일과 헝가리에서 1919년에, 스페인에서 1936년에, 헝가리에서 1956년에, 포르투갈에서 1974년에, 이란에서 1979년에 그랬다.
그런 대안이 혁명기에 부상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혁명은 한 줌의 혁명가들이 용기를 낸다고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노동계급이 일상 조건을 지키기 위해 벌이는 투쟁이 자본가들의 권위를 위협하고 자본가들이 이를 다잡고자 작정하고 충돌하는 상황에서 혁명은 벌어진다.
매번 벌어지는 시위·파업·소요 하나하나에 훗날 혁명을 꽃피울 씨앗이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투쟁에 함께하며 진정한 민주주의가 어떤 모습일지 제기함으로써 그런 혁명의 씨앗이 싹을 틔울 토양을 일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