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일자리 보장제 제안,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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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민 일자리 보장제’라는 새롭고 획기적인 제도를 제안합니다. (국가가) 일자리를 원하는 국민 누구에게나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마련해 주자는 것입니다.”
여영국 정의당 대표가 고용 위기의 대안으로 ‘국가 일자리 보장제’(이하 일자리 보장제)를 제안했다. (아직은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정의당의 대선 제1공약으로 삼고자 한다고도 밝혔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일자리를 잃거나 사실상의 실업 상태에 처한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주로 임시·일용직이 타격을 입었고, 청년과 여성들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컸다. 정부 통계만 봐도 공식 실업자가 115만 명, 얼어붙은 고용 시장에서 구직 활동을 쉬거나 단념한 사람이 200만 명, 청년들이 체감하는 확장실업률이 25.1퍼센트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가 경제 위기로 고통 받는 국민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일자리를 책임지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다. 일자리 보장제도 그런 취지를 내세운다. “(민간) 기업을 통한 고용”은 한계가 크므로, 정부가 “최후의 고용주로서 실업의 완전 해소를 책임져야 한다.” 간접적 취업 지원에 그친 기존의 일자리 정책과 달리, 정부가 완전고용을 목표로 직접고용 공공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 (김병권 정의정책연구소 소장, 《보다 정의》 창간준비호)
원하는 사람 모두에게 정부가 일자리를 제공한다니, 대상 범위 면에서 상당히 급진적인 제안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정책이 제시하는 일자리의 질은 어떠한가? 그것은 진정 실업난을 해소하고 노동자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만한가?
일자리 보장제의 이론적 근거
정의당은 아직 큰 틀의 방향 이상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정의당 산하 정의정책연구소가 현대화폐론자들의 ‘일자리 보장’ 정책을 긍정적으로 소개하고 있으므로 이를 살펴보는 게 논의의 출발에 도움이 될 듯하다.
일자리 보장제 도입 요구는 국내에선 아직 생소할지 모른다. 그러나 국제적으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미국 민주사회당 지도자들인 버니 샌더스(‘모두를 위한 일자리’ 공약)와 오카시오-코르테스 등이 제안해 관심을 끌었다. 그에 앞서, 2000년대 이후 현대화폐론자들이 이 정책의 기초를 놓았다.
현대화폐론은 ‘주권 국가의 화폐 발행 능력이 무한하다’고 보면서 정부가 지출을 무제한 늘려 경기를 회복시키고 완전고용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결함에 대해서는 〈노동자 연대〉 278호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현대화폐론 비판: 돈만 찍어 내면 만사형통일까?’를 보시오.) 현대화폐론자들은 이런 이론적 전제를 근거로 일자리 보장제를 주요 정책으로 제시해 왔다.
일자리 보장제에서 정부는 일할 의사가 있는 실업자들 모두를 “정해진 생활임금”으로 고용한다. 정부는 돌봄, 생태, 보건 등 공공부문에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
정부가 자본 시장(혹은 민간 기업들)을 통제하거나 대체하자는 것은 아니다. 일자리 보장제 하에서 정부는 어디까지나 민간 부문에서 밀려난 노동자들을 맡아 주는 “최후의 고용주” 구실을 한다. 주요 현대화폐론자인 랜들 레이는 경제적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 재고(在庫) 정책을 펴자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주요 현대화폐론자인 빌 미첼은 “일자리 보장 정책은 시장과 경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같은 전제가 뜻하는 바는 일자리 보장제가 실업자들을 대거 공공 일자리로 흡수하되, 민간 자본 영역을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지탱하고 보조하는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빌 미첼은 이렇게 말한다. “민간 부문의 임금 구조에 충격을 주지 않고 안정적인 물가상승률을 유지하려면, 일자리 보장 정책의 임금은 최저임금 수준인 것이 최적이다.”
이것은 민간 부문의 임금 구조나 (고용 조건·여부를 결정하는) 자본의 힘을 위협하는 게 아니라 보조하자는 것이다. 즉, 영국의 마르크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가 꼬집었듯이, “정부가 자본주의에게 제공하는 안전장치”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국가가 모두의 일자리를 책임지게 하자’는 매력적인 제안에도 불구하고 일자리 보장제는 그 취지에 걸맞은 내용을 채우지 못한다.
첫째, 일자리 보장제는 민간 부문에서 생겨나는 실직의 위기에서 노동자들을 보호하거나 민간 부문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정부 정책의 필요성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정부의 역할은 보조적인 공공 일자리로 실업자들을 흡수하는 데 있다.
또, 민간 부문의 임금·고용 구조에 부담을 주지 않고 거기와 경쟁하지 않기 위해, 일자리 보장제로 새롭게 생겨날 공공 일자리의 질을 낮은 수준으로 제약한다.
어떤 일자리인가?
어떤 사람들은 민간 기업의 고용을 정부가 어떻게 강제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일자리 문제에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은 자기가 관할하는 공공서비스 영역에서 일자리를 늘리거나, 사회보험 같은 사후 보완책을 펴는 것이라는 주장이 오늘날 상식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정부는 민간 부문의 고용 위기에 대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게 아니다. 지금도 각국 정부는 경제 침체 속에서 기업주들을 구하려고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온갖 특혜를 제공하는 정책을 편다. 이런 자원을 일자리를 지키고 늘리는 데 사용하라고 노동운동은 요구하며 투쟁할 수 있다.
가령 부도·파산 위기에 처한 기업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그 기업을 국유화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또, 노동조건 악화 없이 법정 노동시간을 대폭 줄여 일자리를 확충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이런 요구를 회피한다는 점에서, 일자리 보장제가 제기하는 국가 책임은 시장을 우회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조차 양질의 일자리가 되지도 못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자리 보장제가 제시하는 “생활임금”은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만큼의 임금이 아니라 최저임금으로 고정된다. 시장을 통제하거나 대체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 하에, “시장 임금과 물가 안정”을 위해 노동자들을 “밑바닥에서 고용”(빌 미첼)해야 한다.
그러면, 마트업이나 중소 하청업체 같은 기업들은 일자리 보장제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 노동자들에게 낮은 임금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들과 “경쟁하지 않는” 일자리 보장제 하에서는 더 낮은 임금(최저임금)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마이클 로버츠는 일자리 보장제가 2000년대 초 독일에서 도입된 ‘하르츠 개혁’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하르츠 개혁’은 그럭저럭 실업률을 떨어뜨렸지만, 실업자들에게 매우 낮은 임금의 일자리를 제공했다. 그 결과 오늘날 독일의 저임금 노동자 비중은 전체 노동자의 4분의 1 수준으로 급격히 늘었다. (자세한 내용은 〈노동자 연대〉 웹사이트에서 ‘독일 노동운동가가 말하는 ‘하르츠 개혁’의 진실’을 보시오.)
일자리 보장제가 제공하는 일자리는 그 정의상 정규직 일자리도 아니다. 일자리 보장제는 기본적으로 “민간 유휴 노동력의 저수지 역할”을 한다(박가분, 〈뉴스톱〉 2020.8.7). 즉, 공공부문에서 상시·영구적인 정규직 일자리를 늘리는 게 아니라, 정부가 실업자들을 잠시 맡아 저임금의 노동력 풀을 유지하는 것이다.
물론 최저임금조차 못 받는 노동자들이 많으므로(지난해 기준 미달률은 15.6퍼센트) 일자리 보장제가 의미 있다는 주장도 있다. 여영국 정의당 대표가 이 정책을 통해 “민간 노동시장에 최저임금과 사회보험을 보장하도록 압박”할 수 있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의 주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자리 보장제로 만들어질 공공 일자리가 민간 노동시장의 임금 수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고작 최저임금 수준이어야 할까? 국가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대폭 늘려 안정적인 생활수준을 보장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김병권 정의정책연구소장에 따르면, 현대화폐론자인 처네바가 추정한 일자리 보장제의 소요 예산은 GDP의 1~1.5퍼센트이고, 이는 한국에서 최저임금 노동자를 100만 명 내외로 고용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엄청난 정부 지출은 아닌 셈이다. 문재인 정부가 노인을 대상으로 한 저임금-단시간 공공 일자리 중심의 일자리 150만 개를 만들겠다고 했던 것보다는 낫지만, 그렇다고 “획기적”으로 나은 수준은 못 되는 것이다.
한편, 변혁당은 버니 샌더스 등의 일자리 보장제의 아이디어를 차용하되, 그 정책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좌파적 버전의 ‘국가 책임 일자리’를 제안한다. 여기에는 노동시간 단축, 생태적 산업재편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또한 최근 들어 부쩍 이 단체가 분명히 하고 있는 좌파적 사회민주주의 노선, 즉 기간산업, 에너지·통신 산업 등 주요 경제 부문의 국유화를 ‘사회주의’라고 칭하는 것이 본질이다.
그러나 현 시기에 필요한 진정한 사회주의적 전술들은 개혁주의 정당들과 개혁주의적 노조 지도자들의 주도권을 일반 노동자 대중이 넘어설 수 있도록 후자의 투쟁성과 급진성을 조직으로 표현하는 것에 목표를 둬야 한다. 이에 견주면 대선이라는 선거 참여는 선전에 불과한 부차적인 활동이다.
양질의 일자리를 위한 진정한 대안
앞서 살펴봤듯이, 원래의 일자리 보장제는 경제 불황에서 일자리와 안정적인 생활수준을 바라는 노동자들의 절실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어려워 보인다. 이 제안이 내세운 포부와 달리 정의당 정치인들이 소심한 수준으로 미끄러진 것은 자본주의의 논리에 도전하지 않고 그것을 우회하거나 보조하는 길을 택한 데 있다.
그러나 경제가 어렵다고 해서 거의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자들인 노동자들이 요구를 자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온건한 개혁주의 정당·노조 지도자들이 경제 상황을 이유로 타협해 불필요하게 후퇴해 온 것이 진정한 문제였다.
지금 같은 경기 침체기에 정부와 사용자들, 그 정치인들은 어떻게든 노동자들을 희생시켜 위기의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임금을 삭감하고 일자리를 위협하고 기껏해야 저질 일자리를 만들어 생색이나 내면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윤과 자본간 경쟁 논리에 도전하지 않고서는 노동자들의 삶을 지키기 어렵다.
노동운동의 역사를 볼 때, 실업 위기에서 일자리를 지키고 늘리기 위한 대안은 없지 않고 있다. 공공부문에서 양질의 정규직 일자리 확대, 임금 등 노동조건 후퇴 없는 노동시간 단축, 부도·파산 기업의 국유화 등이 그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그 필요가 더 선명히 드러났듯이, 보건·돌봄·요양 등 공공·필수 서비스 분야에서 훨씬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이 노동자들에게 양질의 임금·조건을 제공하는 것은 안정적 생활 수준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대중의 안전과 서비스의 질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공공부문에서 양질의 정규직 일자리가 대폭 확충돼야 하는 이유이다.
임금 삭감 등 노동조건 악화 없는 노동시간 단축은 일자리를 늘리고 끔찍한 장시간 노동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제출돼 온 요구이다. 비록 꽤 오래전부터 노조 지도자들이 노동시간 단축 시에 임금·조건 후퇴를 받아들여 인력 충원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 점에서, 노동시간은 일시에(법정 노동시간 규제로) 대폭 줄여야 할 뿐 아니라, 임금·조건 후퇴가 없어야 한다는 점이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들이 줄어든 임금 때문에 연장근무나 투잡, 쓰리잡에 내몰리거나, 노동강도 강화나 외주화 확대 등으로 이어져 일자리 창출 효과가 사라질 것이다.
부도·파산 기업의 국유화는 일자리가 사라지지 않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요구이다. 고용주가 더는 회사를 운영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부도 기업에서, 국가만이 일자리 보호에 필요한 자원을 동원할 능력과 책무가 있기 때문에 제기된다. (정부는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대변해야 한다는 정치적 압력을 받는 존재다.) 이 점을 이용해 정부에게 일자리 보장의 책임을 지우며 정치적 투쟁을 건설할 수 있다.
사실 이런 투쟁이 아니더라도 각국 정부들은 부도 기업에 공적자금을 투입해 국유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만간 그 기업을 매각하기 위해, 그전까지만 임시적으로 시행되는 조처다(가령 법정관리 하의 쌍용차, 대우조선 등). 그런 경우 그 기업이 잘 팔릴 수 있도록 “경쟁력”을 제고하는 게 경영의 목표가 된다. 그 속에서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임금을 깎고 조건을 악화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므로 매각을 위한 임시관리체제가 아니라, 정부가 일자리 보호를 위해 영구적으로 기업을 소유·운영하는 영구적 국유화가 필요하다.
동력이자 수단
이 같은 대책들은 고용 위기에서 노동자들의 삶을 지키기 위한 대안이다. 국가에게 일자리 책임을 지운다고 해서, 자본주의 국가를 중립적 기구로 보고 노동계급에 이로운 기구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정부는 대중적 저항에 떠밀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임금 삭감 등 노동조건 악화 없이 노동시간을 대폭 줄이거나 부도·파산 기업을 국유화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열망을 배신한 것이나, 그 와중에도 보건의료·필수서비스 분야에서 인력을 필요한 만큼 늘리지 않는 것을 보면, 공공부문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는 것도 노동자들의 만만찮은 저항이 뒷받침돼야 실현될 수 있다.
물론 이런 요구들은 그 자체로 사회주의적이거나 반자본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고용 안정이라는 노동자들의 즉각적 필요를 위한 당면 요구로, 자본주의 하에서도 투쟁을 통해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내재적 논리라는 면에서 자본의 이해관계를 거스르는 것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이 이런 요구를 걸고 투쟁하면, 정부와 기업주들과 그 언론들은 벌떼같이 몰려들어 비난을 퍼부을 것이다. 나라 경제를 파탄내려 하느냐면서 말이다.
따라서 그런 투쟁은 기존 정치·경제 권력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그럴 때 충돌을 회피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이윤과 자본간 경쟁의 논리에 도전해 국가를 압박하면서 광범하고 단호하게 투쟁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
경제가 불황일 때도 노동자들은 해고에 맞서서, 더 나은 일자리와 임금을 요구하면서 싸울 수 있고 성과를 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많은 노동자들은 그렇게 투쟁해서 조건을 지킬 수 있었다.
가령 1930년대 대불황 속에서도 미국 플린트의 GM 노동자들은 전국적 공장 점거파업 물결을 이뤄, 사측의 대량해고 계획을 좌절시키고 승리했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 노동자들도 대규모 파업과 공장 점거로 임금 인상, 유급 휴가, 임금 삭감 없는 주 40시간 노동 등을 따냈다.
이런 대중 투쟁으로만 지배계급에 양보를 강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실업을 낳는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노동계급 운동의 전진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