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이후:
점령군은 떠났지만 파장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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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0일(현지 시각)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이 카불 공항을 떠나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국의 패배로 최종 끝났다. 2001년 9월 11일 알카에다 전사들이 미국 세계무역센터와 국방부 청사를 공격한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된 지 20년 만이다.
9·11은 미국 제국주의의 중동 유린이 초래한 역풍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이 비극을 자국의 세계 패권을 재천명할 기회로 삼으면서, 중동과 서아시아·중앙아시아는 참화에 휩싸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은 네 미국 대통령(부시·오바마·트럼프·바이든)의 임기를 거치며 파키스탄·이라크·리비아·시리아·예멘·소말리아·필리핀 등지로 이어졌다. 2018~2020년에도 미국은 85개국에서 지상전·폭격 등 군사 작전을 벌였다.
정확한 민간인 사망자 수는 아무도 모르지만, 수십만 명은 훨씬 넘으리라는 추산이 많다.
그렇게까지 하고도 미국은 전략 목표, 즉 경제적 위상이 줄어든 상황에서 여전히 압도적으로 강한 군사력을 이용해 패권을 재천명한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미국의 전략·정보 웹사이트 〈스트랫포〉는 9·11 공격 직후 이 공격의 전략적 목표가 “미국이 자기 능력 밖의 군사 작전을 벌이게 함으로써 국내외에서 미국을 전략적·군사적으로 지치게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했다.(관련 기사 본지 383호(온라인판) “9·11 20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패배 ─ 의미와 파장“)
미국은 힘을 과시하기는커녕 힘의 한계를 드러냈다. 미국은 이라크 저항을 단속하기 위해 이란의 손을 빌려야 했고, 이 때문에 중동에서 이란의 위세가 더 커졌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을 동안, 러시아는 조지아를 침공했고, 중국은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이는 아프가니스탄 철군 아수라장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관련 기사 본지 383호(온라인판) ‘아프가니스탄: 상처 입은 위험한 야수 ─ 제국주의의 실패’)
미국 대통령이 대국민 연설에서 미국의 힘을 자랑하거나 적대 세력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왜 상황 통제에 “실패”했는지 거듭 해명해야 했던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다.
20년의 전쟁과 점령이 실패한 것이다.
미국은 철수하는 와중에도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8월 26일 카불 공항 폭탄 공격으로 미국인 13명이 사망하자 (2020년 2월 미국-탈레반 평화협정 이후 최초의 미국인 사망자였다) 그 보복으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최소 170명을 폭격으로 살해했다. 부상자는 수백 명에 이르렀다.
중국과의 경쟁
하지만 미국의 철군 강행은 전략적인 고려의 결과이기도 하다.
미국은 2000년대 중반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을 빼려고 했다. 9·11과 아프가니스탄 점령 후 10년이 지난 2011년에 미국이 9·11 공격의 지휘자 오사마 빈 라덴을 암살한 것도 철군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철군의 진정한 목표는 경쟁국, 특히 중국의 부상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오바마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도모한 바로 그 시점에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 전략을 선포했다. 당시 부통령이자 현 대통령인 바이든은 그 전략의 설계자 중 하나였다. 미국 지배계급 주류가 아니었던 트럼프도 같은 목표를 공유했기 때문에 탈레반과 평화협정을 맺었던 것이다.
지금 바이든도 바로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 애쓴다. 바이든이 “미국이 돌아왔다”고 하는 것은 중국의 부상을 저지해 세계적 주도력을 굳히겠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철군 완료 직후인 8월 31일부터 한국 동해에서 미국·영국·한국·네덜란드가 해상 합동 훈련을 벌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이 과정은 질서정연하지 않을 것이며 뒤죽박죽이고 불안정으로 점철돼 있을 것이다.
서유럽 지배자들 사이에서 미국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는 한탄이 나오는 것도 이와 연관 있다(관련해 이번 호 알렉스 캘리니코스 논평을 보시오).
〈파이낸셜 타임스〉 논평가 기디언 래크먼은 이렇게 썼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실패 때문에 바이든은 ‘미국이 돌아왔다’고 내세우기 어렵게 됐다. … 그 메시지는 두 가지다. 첫째, 미국의 힘이 약화되고 있다. 둘째, 미국의 안보 보장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군으로 세계 역관계가 뒤죽박죽이 됐다”고 불평했다. 미국의 패권 재천명이라는 핵심 목표에 차질을 빚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탈레반
불안정은 아프가니스탄 안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최대 군사·정치 세력인 탈레반은 현재 연립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모든 세력이 잇속 계산을 하고 있다.
주변 강대국들은 탈레반과 빠르게 협력 관계를 수립하려 애쓰는데, 이는 중앙아시아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늘리려는 속셈이다. 대표적으로 중국과 파키스탄이 재건 지원을 발판 삼아 아프가니스탄에 접근하고 있다.
중국 외교부장 왕이가 “중국이 신생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긍정적 방향으로 이끌어 상황 안정에 일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에는 이런 계산이 깔려 있다.
하지만 중국에게는 “국경 안전” 문제도 있다. 중국은 아프가니스탄과의 접경지에 군대를 증강 배치하기도 했는데, 이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의 패전에 고무된 이슬람주의 전사들이 중국 신장·위구르 지역의 이슬람주의 운동과 위구르족 저항 운동을 고무하기를 원치 않아서다.
즉각 탈레반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지는 않고 있지만, 인도와 이란도 각자의 꿍꿍이가 있다. 이슬람 혐오를 부추겨 온 인도의 강경 우익 나렌드라 모디 정부는 미국의 패배와 파키스탄의 영향력 증대에 조바심을 느끼며 접경지에 군을 증강 배치했다. 이란 정부는 국경을 넘어오는 아프가니스탄 난민들 때문에 정세가 어지러워질 것을 우려해 탈레반에게 국경 지역 경비를 강화하라고 강력히 촉구하기도 했다.
심지어 미국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온전히 손을 뗄 생각이 없다.
점령 종식 후 미국은 서방의 후원을 받는 현지 세력(대개 믿지 못할 자들이다)에 훨씬 더 의지하고 있으며, 이런 세력이 신생 아프가니스탄 정부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기 바란다.
그와 동시에 “신생 정부가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을 자격이 없다면”, 즉 친서방 세력을 연립정부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경제 제재를 강화하겠다고 협박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제재는 평범한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는 더한층 재앙이 될 것이다.
압력
평범한 아프가니스탄인들은 평화를 염원하고, 경제 재건과 불평등 해소를 바란다. 이 염원에 부응하지 않으면 탈레반의 주도력은 금세 힘을 잃을 수 있다.
탈레반은 여기에 커다란 압력을 받고 있다. 억압적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자기 전사들을 거듭 단속하고, 자신들이 적대하던 친점령 세력들까지 모아 연립정부를 수립하겠다고 나서는 배경이다.
그런 압력은 최근 아프가니스탄 각지에서 벌어지는 저항에서도 엿볼 수 있다. 카불과 아프가니스탄 주요 대도시에서 여성들이 벌인 시위는, 당장 자녀를 먹일 식량도 물도 없다는 절박함의 표현이다.
이들 중 적잖은 수는 아프가니스탄 시골에 살던 사람들로, 사상 최대 규모의 가뭄 피해를 피해 도시에 와서 생계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그밖에도 최근 카불에서는 은행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여러 부문의 노동자들이 몇 달째 이어진 임금 체불에 항의해 탈레반의 작업장 복귀 명령을 거부하고 거리 시위를 벌였다.
이런 저항들은 점령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기후 재앙과 가뭄 피해가 걷잡을 수 없어진 데에는 점령군이 폭격으로 관개 시설을 파괴해 버린 탓도 있다. 또, 은행 노동자들의 임금이 될 돈을 빼돌린 것은 바로 점령군과 꼭두각시 정부였다.
게다가 이번 폭탄 공격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IS-K 문제가 있다. IS-K는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파키스탄·러시아·이란·인도 일부 지역에까지 조직을 거느린 극단주의적 이슬람주의 단체의 하나로, 제국주의 점령이 도시 청년들에 낳은 쓰라린 절망감과 미국에 대한 증오를 이용해 성장했다. 이들은 한때 탈레반을 지지했지만 탈레반이 점령 세력과 협상에 나서자 그 지지를 철회했다.(IS-K에 관련해서는 본지 383호(온라인판)에 실린 낸시 린디스판과 조너선 닐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의 종식’을 보시오.)
이런 요인들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의 불안정과 어려움은 계속될 것이다.
점령도, 열강의 간섭도 이를 해결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