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20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패배 ─ 의미와 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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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8월 26일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 ‘9·11 20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패배 ─ 의미와 파장(영상 보기)’에서 발표한 내용에 최신 상황을 반영하고, 한국군의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관한 청중 토론 내용을 덧붙인 것이다.
8월 15일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철수했다. 탈레반은 지난 20년 동안 미국 점령의 핵심 기지였던 카불에 무혈 입성해 승리를 선언했다.
미국 제국주의의 패배가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군사적으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더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세계 최강 군대 약 80만 병력이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래 싸운 끝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농민들에게 패배한 것이다.
미국은 군사적으로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패배했다.
우선 점령이 완전히 실패했다. 미국이 해방시키겠다던 그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미국과 그 동맹들에 등을 돌렸고, 결국 탈레반이 부상했다.
세계 전략 측면에서도 미국은 큰 타격을 입었다.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미국의 패권을 천명하던 것이 완전히 어그러졌다. 그것도 미국이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려는 지금 시점에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20년 전 9·11 공격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9·11 공격과 ‘테러와의 전쟁’
2001년 9월 11일 아침, 알카에다 전사들이 민항기를 납치해 세계무역센터와 미 국방부 청사에 추락시켰다. 국방부 공격은 빗나갔지만, 세계무역센터는 무너졌다. 약 3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는 대부분 노동자였다.
이 비극은 무엇보다 제국주의의 중동 지배가 낳은 결과였다. 알카에다는 부패한 아랍 정권들을 후원하고 중동을 유린해 온 미국을 조준해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당시 미국의 부시 정부는 냉혹하게도 이 비극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른바 ‘미국의 새로운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를 실제로 추진할 절호의 기회로 본 것이었다.
‘미국의 새로운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는 공화당 우파가 설립한 단체로, 이들은 미국의 경제적 위상이 날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여전히 압도적으로 강한 군사력을 이용해 자국 패권을 재천명하고자 했다.
부시 정부는 이라크를 장악해 중동의 석유를 지배하고자 했다. 미국 자신은 중동산 석유를 별로 쓰지 않았지만, 이를 틀어쥐면 거기에 의존하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쟁자들을 억누를 수 있을 터였다.
미국은 9·11 직후 이라크를 침공하고 싶었지만, 이라크는 9·11과 관련이 없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을 먼저 공격해, ‘테러와의 전쟁’의 명분을 쌓고자 했다.
왜 아프가니스탄이었나? 9·11 공격을 조직한 혐의가 있던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에 있다는 핑계를 댔지만 이것은 표면적 이유였을 뿐이다.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첫째, 아프가니스탄이 매우 가난해서 미국이 깨부수기 쉽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미국의 위세를 과시하기 좋은 대상이었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에서 7번째로 가난한 나라였다. 1973년부터 외국군 점령과 내전이 끊이지 않아, 온 나라가 피폐해졌다. 특히 1979년부터 7년간 이어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으로 수십만 명이 죽고 100만 명 넘게 난민이 됐다.
미국은 온갖 군벌과 이슬람 세력을 후원해 소련에 맞서게 했는데, 이때 미국은 탈레반과 빈 라덴도 후원했다.
둘째, 아프가니스탄의 지리적 위치가 중요했다. 아프가니스탄 동쪽에는 중국이, 서쪽에는 이란이, 북쪽에는 러시아가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점령하면 이란을 포위할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아프가니스탄에 미군 기지들을 세워 두면 주변 강국들에 압박이 될 것이었다.
재앙이 된 아프가니스탄 점령
처음에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국내에서도 지지받지 못하는 세력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나토 동맹들을 이끌고 9·11 이후 한 달 만에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탈레반 정부는 도망쳤다.
물론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국제적으로 큰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유엔의 지지도 얻지 못했다. 핵심 지지 세력은 영국이었다.
그런데도 한국의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는 파병까지 해 그 전쟁을 지원했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의 피를 대가로, ‘테러와의 전쟁’으로 열릴 ‘미국의 새로운 세기’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위상을 높이려는 이유에서였다.(하단을 보시오)
점령 초에 적잖은 아프가니스탄인들은 혹시나 하며 안정과 평화를 기대했다. 수십 년의 전쟁과 학정에 시달렸으니 이해할 만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산산조각 났고, 점령에 맞선 저항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국과 동맹들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은 재앙이었다. 점령군은 탈레반 소탕을 명분으로 수많은 아프가니스탄인들을 폭격·살해·강간·고문했다.
폭격 피해자의 70퍼센트가 여성과 아이들로 추산된다. 인구가 2000만 명인 나라에서 적어도 25만 명이 죽었고, 100만 명이 회복 불가능한 신체 손상을 당했으며, 570만 명이 난민이 됐다.
미국은 아편 마약상과 군벌들을 모아 정부를 세웠다. 이들은 잔혹무도했고, 부족 학살을 일삼았다. 파병 한국군은 바로 이런 자들을 훈련시켰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극도로 부패한 자들이었다. 미국이 이들을 길들인답시고 막대한 뇌물을 뿌려서, 부패 규모가 전보다 훨씬 커졌다.
서방의 아프가니스탄 “재건”도 허상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 필요한 학교·병원이 건설되기는커녕 오히려 폭격으로 파괴됐다.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점령 3년 만에 저항이 분출했고, 탈레반이 부활했다. 자기 동네를 지키려는 농민들이 탈레반을 자처하며 저항에 나섰다.
탈레반
탈레반의 기원은 1980년대 소련 점령과 내전을 피해 파키스탄으로 도망친 파슈툰족 난민들과, 아프가니스탄 농촌의 중하급 이슬람 사제들에 있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들을 훈련시켰고, 탈레반의 1996년 집권을 도왔다.
하지만 탈레반은 단순히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탈레반의 목표는 외세를 몰아내고 자본주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탈레반은 파슈툰족 우월주의, 신비주의적 이슬람 종파인 와하비즘, 보수적·억압적인 정치를 가진 세력이다. 탈레반 정권 하에서 여성과 소수 부족은 천대받았다. 그러므로 탈레반은 평범한 아프가니스탄인들을 위한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서방에서 탈레반은 실체에 비해 엄청나게 악마화돼 있다. 미국과 그 동맹들이 전쟁과 점령을 정당화하려 이슬람 혐오를 부추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억 명이 믿는 이슬람은 다른 주요 종교와 마찬가지로 결코 획일적 종교가 아니며, 교리가 특별히 더 후진적인 것도 아니다.
현재 탈레반은 미국의 점령을 거치며 여러 경향이 섞인 광범한 집단으로 변모했다. 개중에는 파키스탄, 이란, 심지어 아이시스와 연결된 세력도 있지만, 가난한 농민도 많다. 1990년대 탈레반 정권에 천대받던 타지크족·우즈베크족 사람들도 지금은 탈레반에 가담해 있다.
이는 점령군이 탈레반에 비할 바 없이 잔혹했기 때문이고, 오직 탈레반만이 점령에 반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아프가니스탄의 페미니스트들은 대부분 점령을 지지했다. 점령 하에서 민주주의와 여성 인권이 신장되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해방 운운하며 점령을 정당화했다. 서구의 일부 페미니스트들도 이에 동조했다.
물론 여성에게 억압적인 도덕을 강요하고 여성의 사회 참여를 체계적으로 막는 탈레반의 여성차별은 문제다. 그러나 여성을 살해하고 집과 일터를 폭격해 일가족을 몰살하고 생계를 끊는 점령군은 어떤가? 이것이 과연 여성 해방에 도움이 될까?
무엇보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중동의 여성 인권에 관심이 없다. 미국은 탈레반의 여성 차별을 알고도 탈레반을 육성했고, 이후에는 별 다를 바 없이 여성 차별적인 군벌들을 지원했다. 미국이 여성 차별로 악명 높은 사우디아라비아와 거리낌없이 손잡아 온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점령군의 총구에서 여성 해방이 나오기를 기대할 수 없다. 해방은 제국주의와 차별에 모두 맞설 때만 가능하다.
힘의 한계를 드러낸 미국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1년 5개월 뒤인 2003년에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하고 점령했다.
하지만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모두에서 깊은 수렁에 빠졌다. 중동 전체는커녕 점령지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전 세계에서 분출한 대규모 반전운동은 미국의 전쟁 수행 능력과 정치적 정당성에 타격을 줬다.
미국은 힘을 과시하기는커녕 힘의 한계를 드러냈다. 미국은 이라크 저항을 단속하려 이란의 손을 빌려야 했고, 이 때문에 중동에서 이란의 위세가 더 커졌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수렁에 빠져 있을 동안,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에 인접한 조지아를 침공했고, 중국은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8년에는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가 터졌다.
이제 미국은 주요 경쟁국으로 떠오른 중국에 대응하는 데에 역량을 집중해야 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 10년 만인 2011년에 빈 라덴을 암살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미국은 패배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드론을 띄워 아프가니스탄 전역과 파키스탄 일부까지 폭격했다. 이 때문에 점령에 대한 증오가 더 커졌고, 탈레반은 몇 년에 걸쳐 기반을 넓힐 수 있었다.
마침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 미국은, 2020년에 탈레반과 평화 협정을 맺고 철군했다. 중동에 대한 지배력을 장악하려고 20년간 끔찍한 전쟁을 벌인 미국 제국주의의 프로젝트가 처참한 실패로 끝난 것이다.
미국 패배의 파장
미국 패배의 파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바이든이 추구하던 미국의 “리더십”에 흠집이 나면서, 벌써부터 선진국 내 불협화음이 나오고 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24일 G7 긴급 정상회담은 “패전국 회담”이라는 조롱을 들었는데, 여기서 미국과 동맹들은 아프가니스탄 철군 시한조차 합의하지 못했다. 이런 식의 엇박이 당분간 계속될 수 있다.
또, 미국 지배자들은 군사적 개입에 반대하는 국내 여론 때문에 당분간 군사적 모험을 감행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처 입은 야수가 더 위험하다’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상처 입어 신경이 곤두선 야수가 더 큰 위협을 초래할 수도 있다.
특히,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군은 중국을 견제하는 데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또 미국은 굴욕을 만회하려 애쓸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오늘의 세계는 결코 안전하지 않다.
미국과 동맹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도 위험한 정책을 여전히 추진하려 한다.
G7 회의에서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경제제재도 논의됐다. 실제로 제재가 이뤄지면, 점령으로 경제가 파탄 난 아프가니스탄에 치명적일 것이다.
이른바 ‘국제사회’가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심상정 의원 등 정의당 여성 의원들도 민주당 의원들과 함께 국제사회의 개입을 촉구했는데, 새 탈레반 정부 하에서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처지가 악화되리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현실에서 국제 사회가 개입할 힘은 강대국, 특히 미국에서 나온다. 그리고 바로 그 미국이 “인도적 개입”이라는 이름으로 아프가니스탄을 20년 동안 유린했었다.
이들에게 “인도주의”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아프가니스탄 난민 문제에서 잘 드러난다. 각국은 점령 정책을 직접적으로 도운 아프가니스탄인 일부만 구제한 채 수많은 난민은 나몰라라 하며 떠넘기고 있다. 하지만 폐허를 떠나 새출발하길 원하는 모든 난민을 무조건 환영해야 한다.
불안정
아프가니스탄 내부 상황은 매우 불안정하다. 미군이 철군하는 와중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폭탄·로켓포 공격과 보복 공습이 오가며 사상자가 발생했다.
점령군이 철수하지 않았더라면 이 같은 불안정과 피해가 없었으리라는 주장은 상황을 뒤집어 보는 것이다. 이 공격은, 수십 년간 아프가니스탄을 유린한 점령군에 대한 분노의 (왜곡된) 표현이다. 즉, 애초의 원인 제공자는 바로 점령군이다.
탈레반은 미국과 ‘이슬람국가 호라손지부’(IS-K) 모두를 비난했다. 탈레반은 바이든과 미군이 이 테러에 보복한답시고 아프가니스탄 곳곳에 공습을 벌이는 것도 매우 못마땅하지만, 동시에 불안정성을 키우는 IS-K도 불만인 것이다. 이런 일들이 자신들의 목표인 사태 안정에 방해가 될까 봐서다.
일각에서는 내전 가능성도 언급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탈레반에 군사적으로 맞수가 될 만한 세력은 없다.
그럼에도 탈레반은 커다란 압력을 받고 있다.
평범한 아프가니스탄인들은 평화를 염원하고, 경제 재건과 불평등 해소를 바란다. 탈레반이 이에 부응하지 않고 강압 통치를 한다면 대중의 외면과 반발에 부딪힐 것이다.
8월 20일 아프가니스탄 곳곳에서 벌어진 시위는 이를 잘 보여 줬다. 이 시위는 이전에 탈레반에게 억압받았던 소수 부족과 민주적 권리를 요구하는 청년들이 벌인 것이다. 점령에 맞서 싸웠던 이들은 이제 삶이 나아지기를 바란다.
이런 배경에서 탈레반은 연립정부 구성에 매진하고 있다. 국내의 불안을 불식시키고,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재건 자원을 유치하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연립정부에 끌어들일 세력들을 이용해 파키스탄·사우디아라비아뿐 아니라 미국의 패배를 기회로 여기며 사태를 주시하는 중국·러시아 등과도 관계 맺으려 한다.
뒤집어 말하면, 이 모든 국가들이 아프가니스탄에 간섭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미 아프가니스탄은 수십 년에 걸친 제국주의 침략과 점령, 내전으로 고통받았다. 제국주의적 개입과 경쟁은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고통을 연장할 뿐이다.
‘테러와의 전쟁’은 아프가니스탄뿐 아니라 중동 전역에서 서방 제국주의에 대한 커다란 환멸과 분노를 낳았다. 그리고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패배는, 패권을 위해 잔혹한 전쟁도 불사하는 바로 그 제국주의 강대국의 프로젝트도 여러 갈등과 세계적 저항에 부딪혀 얼마든지 좌초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한국도 아프가니스탄 점령의 일부였다
한국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1년에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시작될 때부터 파병했다.
한국은 다산부대·동의부대를 시작으로 재건지원팀과 ‘오쉬노’ 같은 전투 부대도 파병했다. 재건지원팀은 악명 높은 바그람 기지에서 일했다.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 때문에 김선일 씨가 살해됐는데, 아프가니스탄 파병 때문에도 한국인 사망자가 나왔다. 아프가니스탄에 통역병으로 파병된 윤장호 병장이 점령에 항의하는 폭탄 공격으로 사망했고, 샘물교회의 선교팀이 납치·살해되는 일도 있었다.
한국 재건지원팀이 만든 시설이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국군은 철군은커녕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 총을 겨누고 점령군의 폭격·학살에 협조했다.
이런 한국군 파병은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편승해 한국 자본주의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고, 그것을 이용해 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높이려는 국가 전략의 일환이었다.
파병 대가로 한반도 평화?
노무현 정부는 한반도 평화에서 미국의 지지·협조를 얻겠다는 것도 파병의 이유로 들었다.(이른바 “평화 교환론”)
노무현 정부의 “평화 교환론”은 완전히 파산했다. 노무현이 파병으로 “어려울 때 미국을 돕”는 것은 한반도 문제 해결에 역효과를 낳았다.(관련 기사 본지 294호 ‘노무현의 이라크 파병은 한반도 평화에 해로웠다’)
물론 파병이 한국 자본가·지배자들에 전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파병의 명분으로 내걸었던 한반도 평화는 지난 20년 동안 별다른 진전이 없었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평화와 민주주의도 오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는 더 위험해졌다.
반제국주의
한국이 아프가니스탄·이라크에 파병할 당시 청년을 중심으로 대중적 반발이 있었다.
이런 반발은 유의미한 반전운동으로도 불거졌다. 그 운동이 결국 파병을 막지는 못했지만, 정치적 효과는 결코 작지 않았다.
파병을 강행한 노무현 정부의 실체가 폭로되며 그 지지 기반이 침식됐다.
좌파적 개혁주의 정당인 민주노동당은 바로 이 상황에서 당시 전쟁 반대·파병 반대 운동의 일부로서 좋은 기여를 하며 부상했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는데, 현재 정의당의 주축인 심상정 의원도 바로 이를 배경으로 국회의원이 됐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그 자체가 이 운동을 발의·건설·추동한 것은 아니었다. 민주노동당 안팎에서 국제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반제국주의적 분석, 주장, 실천을 했던 당시 ‘다함께’(노동자연대의 전신)와 같은 사회주의자들의 기여가 운동의 중요한 견인차였다.
이는 오늘날 함의가 있다. 첫째, 반제국주의·국제주의 정치와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과거의 그 운동이 지속되지 못하고 당시 운동에 참여했던 세력들이 정치적으로 분화해 상당히 우경화한 상황에서, 반제국주의·국제주의 정치를 주장하고 실천할 과제는 바로 반제국주의적 사회주의자들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