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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의 본질과 모순

황우석 연구의 무비판적 옹호자들 가운데는 그 딱한 처지에 우리가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불치병·난치병 환자들도 있었지만, 우익 정치인과 언론인 등도 있었다.

뜻밖에도 〈자주민보〉라는 한 주체주의 언론매체도 이들과 같은 편에 섰다. 그러나 문제는 황우석 논란에서 〈자주민보〉가 우익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는 게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민족주의에 있다. 민족주의와 진정한 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

민족주의의 가장 중요한 근본 특성은 민족이 그 성원들 간의 계급 분단을 초월해 공동의 이익과 정체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사실만 살펴봐도 이 주장이 참이 아님은 분명하다. 생활수준, 라이프스타일, 태도 등의 면에서 남한 노동자와 미국·일본 노동자는 각각의 기업주보다 서로 공통점이 훨씬 더 많다. 민족 내의 불평등이 하도 막대해서 민족 문화의 차이는 무색해진다.

이해관계라는 면에서 문제를 살펴보면 그러한 분단은 훨씬 더 뚜렷하다. 한국 기업인들은 한국 노동자들보다 단지 재산이 훨씬 더 많은 정도가 아니다. 그들은 한국 노동자들의 착취자들이다. 그래서 한국 노동자들에게 한국 기업인들은 적이다. 반면, 미국 노동자들은 한국 노동자들의 동맹 또는 적어도 잠재적 동맹이다.

각국 지배계급은 민족주의를 받든다. 조지 부시가 9·11 직후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제정했다는 법률 명칭은 ‘애국자법’이다. 고이즈미는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하고, 중국 지배 관료는 중화주의를 조장하고, 노무현은 황우석이 “한국이 세계 일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고 치하했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강한 러시아”를 부르짖고 있고, 토니 블레어는 1995년 전당대회에서 노동당을 “애국자 정당”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민족주의가 자기네 나라 안의 분할을 은폐하고 자기네 노동계급을 복종시키는 데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세계에서 민족주의는 노동계급에게 그들의 신세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억압자·지배자와 일체감을 느끼라고 설득하는 주요 이데올로기 구실을 하고 있다.

민족주의의 또 다른 핵심은 다른 나라들의 이익에 맞서 ‘민족의 공동 이익’, 즉 ‘국익’을 증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황우석 연구에 대해 윤리적·과학적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국익’에 어긋나고, 어쩌면 “미 제국주의의 음모”(〈자주민보〉)에 놀아나는 꼴밖에 안 된다.

이것은 각국 자본가 계급이 서로 경쟁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것은 만국의 노동자들에게 너무도 필요한 국제 연대와 단결에 어긋난다.

이 지점에서 억압자 강대국의 민족주의(특별히 이 경우 국가주의라고도 번역되곤 한다)와 피억압 약소국의 민족주의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후자는 억압에 대한 반발에 불가피하게 수반하는 현상이고, 진보적인 내용이 있다. 물론 근소한 진보성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억압국의 민족주의는 전적으로 반동적이다. 조지 부시, 고이즈미, 후진타오, 푸틴 같은 지배자들, 보수 정당들, 나치 등의 무기다.

남한은 과거엔 피억압 국가였다가 이제는 (미국 덕분에 ‘많이 커서’) 소억압국 ― ‘짱’ 밑의 다른 ‘일진’ ― 의 지위로 올라섰다. 그래서 이제 태극기는 3·1운동과 6·10만세운동 참가자, 그리고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할머니 세대의 손에서 휘날리는 것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이라크 등지의 미군 점령을 돕고 있는 한국군 부대의 점호 때 휘날리는 깃발이 됐다. 이제 태극기는 국민 대중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국기다.

물론 노무현과 열우당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사회운동 출신 정치인들은 1천5백만 임금노동자의 다수와 그 가족들이 애국자이고 그들은 내년 월드컵 경기 때 ‘붉은악마’와 함께 태극기를 흔들 것이라고 자신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아주 오래 전에 마르크스가 인정한 사실, 즉 유력한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일 뿐이다. 기업 CEO, 정치인, 언론인 등은 민족주의 사상을 나날이 갖가지 방법으로 강화한다. 그래서 민족의 일원 됨, 민족 문화, 민족 전통, 민족 정체성, 민족 ‘공동체’ 등의 사상은 ‘상식’으로들 통한다.

상식적으로, 우리는 ‘한국인’이고 다른 사람들은 ‘외국인’이다. 국제 스포츠 경기는 물론이거니와 황우석 연구 같은 과학 프로젝트, 그리고 외국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눈에 띄는 삼성·현대·포스코·엘지 등의 기업 홍보간판을 보고 뿌듯한 마음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피는 사상보다도 진하다(‘태극기 휘날리며’의 핵심 사상). …… 등등.

좀더 엄숙한 설교는 자신의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희생이라는 것이다. 독립군을 기억하라. 이런 식으로 한 나라의 노동자들이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을 죽이라고 전쟁터로 보내진다.

〈자주민보〉 같은 좌파 민족주의 매체들은 이러한 유력한 사상을 강화하는 구실을 한다. 좌파가 노무현이나 정동영, 자이툰, 강제규 등으로부터 민족주의의 깃발을 뺏어와 진보적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성차별 사상이나 인종차별 사상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못지 않은 착각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노동계급을 지배계급의 우선순위에 묶어놓는 심리 책략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다.(민족주의를 추상적으로 비판하는 초좌파들 사이에서는 민족주의를 그 지도자들의 무슨 음모쯤으로 여기는 암묵적 경향이 있다.)

민족주의는 인간 사회의 편제 방식을 반영한다. 우리는 민족들로 나뉜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를 지배하는 계급들은 민족에 따라 조직돼 있다. 산업체들은 다국적기업일지라도 특정한 나라에 근거지를 두고 있고, 자기네 이윤의 보호를 ‘본국’의 국가에 의존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림의 한 쪽일 뿐이다. 우리는 나날이 ‘좁아지는’ 세계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전례 없는 규모로 세계를 가로질러 이동하고 있다. 그에 따라 ‘단일민족’ 신화는 사라지고 날이 갈수록 서로 다른 민족 출신자들이 섞여 살게 되고 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 덕분에 우리는 세계의 다른 곳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우리는 모든 곳의 노동자들이 비슷한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본다. 똑같은 로고나 상표명의 옷을 입고 똑같은 음악을 듣는 우리는 서로 비슷비슷해 보인다. 지배계급들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고급승용차를 타고 아르마니 양복 같은 똑같은 고급 양복을 입고, 똑같이 기생충 같은 라이프스타일을 살고 있는 그들은 서로 비슷비슷해 보인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머리 속에서는 두 가지 서로 전혀 다른 인력(引力)이 작용한다. 하나는 민족주의 사상에 순응하라는 압력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 다른 모든 곳의 노동자들과 일체감을 느끼는 경향이다. 보통 때 이 두 사상은 동시에 공존한다(그람시가 말한 ‘모순된 의식’). 이것은 정지 상태가 아니다. 노동자들은 어느 한 쪽으로 끌릴 수 있다.

제국주의의 압제를 겪은 나라가 아니더라도, 경제가 붕괴하다시피 해 대중의 삶이 망가지고 일부 정치인들이 의식적으로 민족주의 데마고기를 하면 노동자들이 민족주의 쪽으로 끌릴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적 국제주의자들이 실질적 규모로 존재해 이에 맞설 수 있다면 민족주의로 끌리는 힘을 상당히 또는 대부분 상쇄시킬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좌파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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