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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사건’ 진상 규명 다큐멘터리 〈첫 변론〉 상영 논란에 대하여

다큐멘터리 영화 〈첫 변론〉이 5월 16일 제작발표회를 열었다.

7월 개봉 예정인 이 영화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비위 의혹 사건의 진실을 밝혀 보겠다는 취지로 제작되고 있다.

[확대]

이날 제작 발표회에서 김대현 감독과 이 영화의 원작인 《비극의 탄생》 저자 손병관 〈오마이뉴스〉 기자는 ‘진실’과 ‘팩트’를 강조했다. 이 작품이 받는 비난 때문이다.

국민의힘은 이 다큐 제작 자체를 “극악무도한 2차가해”라고 비난했고, 덩달아 윤석열 정부의 여성가족부도 상영 자제를 촉구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도 제작발표회 당일 이 다큐 자체를 “성폭력을 부정하고 … 2차가해를 방치하고 부추기는 끔찍한 폭력”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제작과 상영을 “당장 멈추라”고 요구했다.

류호정 의원(정의당)과 진보당(인권위원회)도 상영에 반대했다.

반사이익

현 여권과 보수 언론들이 적극 나서는 것은 인권이나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해서가 아니고 정치적 이해타산 때문이다.

특히, 다음 총선이 1년도 안 남은 상황에서 우파는 박원순 사건을 재차 매도할 기회를 통해 민주당 공격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환멸을 준 이래로 지금까지 현 여권은 민주당과 진보 인사들의 위선과 내로남불에 대한 대중적 환멸에서 반사이익을 얻어 왔다. 조국 사태가 대표적이지만, 최근의 민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 의혹과 김남국 의원 코인 특혜 의혹이 딱 그런 사례들이다.

우파는 박원순 사건도 안희정(전 충남지사)·오거돈(전 부산시장) 성비위 건과 묶어서 민주당의 위선 사례로 이용해 왔다.

하지만 권력형 부패와 성범죄의 원조 격인 국민의힘이 청렴한 척, 여성들을 위하는 척 구는 것은 역겨울 따름이다.

특히, ‘안티 페미니즘’을 내세웠던 윤석열 정부가 급진 페미니즘의 일부 개념을 편리하게 빌려와, 그것도 폐지하겠다던 여가부를 이용해 비난에 나선 것은 꼴사나운 일이다.


좌우를 넘어?

윤석열 정부를 여성차별적이라고 옳게 비판해 온 급진 페미니즘 수용 단체들이 같은 목소리를 낸 기이한 광경은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개념과 그 적용의 난점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사례이다.

경찰 수사 결과 발표 직후 본지가 밝혔듯이, 박원순 사건의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못했다. 물론 피해자 김잔디 씨(피해자 보호 차원의 공식 가명)의 진술이 있지만, 박 전 시장의 사망으로 교차 검증이 불가능했고, 결국 수사권을 가진 검찰·경찰도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를 종결했다.

경찰 수사 종결 후 국가인권위원회가 직권 조사에 나섰지만, 제기된 여러 의혹 중 비교적 경미한 직장 내 성희롱 범주의 두 사례(“늦은 밤 시간 피해자에게 부적절한 메시지와 사진, 이모티콘을 보내고, 집무실에서 네일아트한 손톱과 손을 만졌다”는 피해자의 주장)만 사실로 인정했다.

그런데 이조차 다른 증언들에 의해 반론에 부딪혀 있다. 〈첫 변론〉 제작팀은 인권위 판단에 대한 반증도 다룰 듯하다.

16일 제작발표회에서 공개된 예고편에선 ‘네일아트한 손을 박 시장이 만졌다’는 것에 대한 반대 증언이 나온다. 이미 손병관 기자의 책에서 익명으로 다뤄졌던 사례인데, 예고편에선 현장을 목격한 증인으로 김봉수 〈아시아 경제〉 기자가 실명으로 직접 출연했다.

이런 점들은 아직 사건의 진상을 함부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준다. 손병관 기자는 관련 서울시 공무원 50여 명을 취재해 여러 반증을 제시했고, 그밖에도 박 전 시장과 김잔디 씨가 주고받은 텔레그램 대화 등 새로 알려진 것들도 있다. 덮어놓고 상영을 반대하는 주장이 부적절한 이유다(특히, 박원순 전 시장 가족의 명예는 무시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의견의 자유

수년 전부터 성폭력 반대 운동에 매진하다시피 해 온 여성단체들은 〈첫 변론〉 제작팀에 대해 논리나 실증으로 반론하지 않고, 그냥 영화 상영 자체를 ‘2차가해’로 낙인 찍으며 반대하는 것으로 대응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선의로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가해’ 개념을 지지해 왔다. 이날 제작발표회에서 김대현 감독은 자신도 일반적으로 그런 개념을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 감독은 1차가해가 충분히 증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반증 제시 자체를 ‘2차가해’라고 규정하고, 사람들이 관람하지도 않은 작품(제작 중)을 상영조차 하지 말라는 “피해자 절대주의”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고 항변했다. 국가보안법 비유도 나왔다.

앞서 언급된 김봉수 기자는 자신의 증언과 관련해 사내에서 징계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2021년 박원순 사건 관련해 과도한 2차가해론의 부당함을 비판한 곽병찬 〈서울신문〉 논설 고문의 칼럼이 온라인에서 삭제된 일도 있었다.

사실상 피해자와 그 대리인의 진술만이 성역화되고 나머지 다수에게는 침묵만이 강요된 것이다.

‘2차가해’의 기준도 자의적이고 이중적이라서,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가령 김잔디 씨가 피해자인 다른 성폭력 사건이 〈UPI뉴스〉에 2021년 7월 보도됐다. 가해자가 서울시 공무원이었는데, 서울시가 부실하게 사건을 처리했고, 이에 대한 불만이 피해자의 폭로 동기였을 거라는 기사였다. 이 기사는 2차가해의 빌미가 될 수 있다며 곧바로 삭제됐다.

그러나 두 달 후 피해자 대리인 김재련 변호사가 이 사건을 〈한겨레〉 인터뷰에서 공론화했을 때는 같은 잣대가 이 신문에 적용되지는 않았다.


선택적 ‘피해자 중심주의’

진중한 진실 규명과 회복적 정의 대신 이런 억압적 방식이 관행화되면, 진상 파악 없이 곧장 피해 호소와 혐의만으로 유죄를 단정하는 심각한 낙인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 반작용으로 불신이 만연해져서 성적 피해 호소 문제를 정치적 유불리(가령 진영 대결)로 보는 ‘선택적’ 피해자 중심주의가 발동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본질적으로 여성차별적인 우파가 ‘피해자 중심주의’를 위선적으로 써먹게 되는 배경이다. 우파는 진실과 피해 회복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면서 정적 제거와 견제를 위한 마녀사냥을 벌이고, 역겹게도 이를 피해자를 위한 정의로 포장한다.

여성운동 지도자 출신 민주당 정치인들이 박 전 시장 사건에서 취한 태도도 선택적 태도에서 예외는 아니다.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가해’라는 한 쌍의 규정이 이처럼 부정적 악순환으로 귀결되는 건 그 개념 자체의 주관성과 자의성 때문이다. 진실 따윈 중요치 않다는 태도와 강요된 침묵이 진정한 피해자 존중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피해자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건 진실성에 대한 믿음 때문인데 말이다.

〈첫 변론〉이 박원순 사건에 대한 온전한 진실을 담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박원순 전 시장이 사망했기 때문이거니와,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을 판단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야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또는 가진 척하며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작태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