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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와 퀴어 이론

다음은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의 기자 이사벨 링로즈가 5월 13일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주최한 LGBT+ 하루 학교에서 한 발제를 녹취·번역한 것이다.
성소수자 운동 내의 주요 이론 중 하나인 퀴어 이론과 마르크스주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본다.

ⓒ양효영

자, 권투 경기장의 홍코너에는 계급과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으로 무장한 마르크스가 있습니다. 청코너에는 동성애 욕망과 젠더를 체제가 부과한 제약이라고 분석하는 퀴어 이론이 있습니다. 이 둘을 링 한가운데에서 맞붙게 하는 게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면 마르크스주의와 퀴어 이론 모두 경직된 정체성 정치에서 벗어나서, 왜 세상이 이 모양이고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는지 살펴보기 때문입니다.

퀴어 이론의 기본 개념 하나는 섹슈얼리티가 생물학적 결과가 아니라는 것인데요, 왜냐면 수만 년 동안의 인류 역사 내내 사람들은 동성애자, 이성애자, 양성애자 같은 범주로 분류되지 않았고 생물학적 성과 젠더와 관련된 개념들은 오히려 사회마다 다양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퀴어 이론은 그것들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여 주죠.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이에 대한 우리의 첫 반응은 지지여야 합니다. 실제로 퀴어 이론의 몇몇 사상은 우리가 앞서 토론한 것들[성소수자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분석]과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와 퀴어 이론가 모두 체제가 낳는 성차별과 동성애 혐오, 트랜스젠더 혐오를 역겨워합니다. 따라서 이런 사상들에 관해 토론하는 게 중요합니다.

우선, 퀴어 이론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많은 주장이 있습니다. 널리 통용되는 규정이 없고, 퀴어 이론의 창시자로 가장 인정받는 사람들은 그 이론이 부상했을 때 고인이었거나 자신들이 새로운 퀴어 운동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얘기하도록 하죠.

퀴어 이론은 퀴어와 관련된 온갖 연구를 포괄합니다. 그래서 뚜렷하게 규정하기 어렵죠. 그리고 이것은 학술 용어이기도 합니다. 퀴어 이론과 퀴어 정치는 미국의 대학에서 탄생했습니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는 우리가 사는 체제를 분석하고, 노동계급이야말로 착취가 없고 그 결과 차별도 없는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 변화의 수단이라고 보죠. 마르크스에 대한 왜곡된 설명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주의노동자당(SWP)에서 말하는 마르크스주의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입니다. 우리는 트로츠키와 레닌 같은 혁명가들의 저작을 활용하고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죠.

퀴어 이론의 부상

그러면, 이제 퀴어 이론이 제기된 배경을 보겠습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세계적으로 거대한 정치적 반란이 일어납니다. 1968년 프랑스에서는 학생들의 저항이 역사상 가장 큰 총파업의 하나로 이어졌습니다. 미국에서는 수많은 흑인이 투쟁을 벌이고 혁명적인 흑표범당에 가입했으며, 전 세계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참가했습니다. 당시 반란에서 우세했던 정치는, 마르크스주의의 일종이긴 했지만, 마오주의와 스탈린주의를 따르는 것이었지 SWP에서 실천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현대의 동성애자 해방 운동이 분출했습니다. 1969년 6월 미국 뉴욕에서 경찰이 스톤월이라는 술집을 습격했는데, 스톤월의 고객들은 라틴계, 흑인, 드랙퀸, 동성애자 등이었습니다. 그들은 며칠 동안 밤새도록 경찰에 맞서서 스톤월을 사수했고, 그 반란에서 동성애자 해방 운동과 동성애자해방전선(GLF)이 탄생했습니다. 1970년에 영국에서도 동성애자해방전선이 결성됐죠.

동성애자해방전선은 모순된 사상도 가지고 있었지만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단체였습니다. 여기 영국의 동성애자해방전선은 노동자 투쟁에도 참가했습니다.(당시 미국에서는 아직 노동자 투쟁에 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1974년 보수당 정부를 무너뜨린 광부 파업에 연대했죠.

‘동성애자 해방’은 사회에서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를 가르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에 맞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음을 던진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들은 “해방”이라는 말을 썼죠. 그들은 혁명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체제 내에서 변화를 이루길 원했던 덜 급진적인 세력도 동시에 부상했습니다.

그래서 평등한 권리를 추구할 것이냐 해방을 추구할 것이냐, 그것이 자본주의라는 틀 안에서 성취 가능한 것이냐를 두고 끊임없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어떤 동성애자들은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를 일절 거부한 반면, 어떤 동성애자들은 동성 결혼 합법화를 원했죠. 결혼해서 가사를 분담하고 안온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어했던 이들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레즈비언과 게이였습니다. 이들은 트랜스젠더 같은 사람들을 배제할 때가 많았는데 체제 내에서 변화를 성취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율성” 전략을 추구했습니다. 동성애자는 동성애자 해방을, 여성은 여성 해방을, 흑인은 흑인 해방을 추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에 대처와 레이건이 집권하자 이전의 운동들을 분쇄해 노동자들의 권리를 후퇴시키고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성과를 되돌려는 시도가 벌어졌습니다. 광원 파업이 패배했고, 학교에서 동성애를 “부추기는” 것을 금지하는 지방정부법 제28조가 입법되는 등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이때 에이즈 위기가 맞물렸죠. 에이즈는 ‘게이 돌림병’이라는 딱지가 붙었죠. 물론 이는 순전한 거짓말이었습니다.

첫 에이즈 판정 사례는 1981년에 나옵니다. 치료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HIV 감염은 많은 경우 에이즈로 발전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미국에서는 1985년 7월까지 6000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영국에서는 〈뉴스 오브 더 월드〉의 설문 조사 응답자의 51퍼센트가 동성애를 다시 전면 범죄화하는 것을 지지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자율성 전략을 강화했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정치적 활동을 일절 거부하는 특정한 급진 페미니즘 조류가 부상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남성은 사회의 가부장적 구조 속에서 득을 보는 자들이었습니다. 급진적 레즈비언 페미니즘도 부상했습니다. 여성이 남성과의 섹스와 관계, 남성에 대한 감정을 일절 거부해야 한다는 사상이죠. 양성애는 물론, 남성과의 관계에 해당하는 것은 일절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에이즈 위기 때문에 자율성 정치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미국과 영국 정부가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게이와 레즈비언, 이성애자가 에이즈 위기를 넘기기 위해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치료법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행동해야 했던 것이죠.

그러나 1960년대와 1970년대의 혁명적 운동이 붕괴한 결과 사람들은 더 개혁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인 노선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마르크스의 지적 대안으로 (뒤에서 더 살펴볼) 미셸 푸코의 사상이나 더 자율주의적인 정치에 기대를 걸기도 했습니다. 특히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했을 때 마르크스주의가 철저히 배격됐습니다. 물론 우리가 보기에 동독이나 소련은 마르크스주의와 전혀 관계없지만 말입니다.

에이즈 위기에 맞서 1987년 액트업(ACT-UP) 등의 단체들이 발족했고, 이들은 스톤월 항쟁 이래로 처음으로 전투적인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이런 단체들이 1990년대부터 “퀴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에이즈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들에서 중간계급 전문직으로 이뤄진 성소수자 관리자 간부층이 형성돼 이들이 저항을 이끌었습니다. 이들은 대기업 세계에도 꽤 깊숙이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기성 질서의 인정을 추구하는 노선이 다시 자리를 잡았습니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계급 사회가 가족 제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성소수자가 차별을 겪고 있다고 봅니다. 반면, 이 명망 있는 성소수자들은 성소수자가 가족 제도에 통합되는 것을 통해 차별받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기에는 명백히 틀린 주장이죠.

한편 어떤 성소수자 활동가들은 또 다른 제도권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바로 대학이죠. “LGBT 연구”나 “퀴어 연구” 분야는 오만 가지 연구 거리를 제공했습니다. 찰스 디킨스와 퀴어 이론, 정원 가꾸기와 퀴어 이론 등 온갖 것이 ‘퀴어 이론’으로 포괄됐죠.

여기에 더해 단결에 대한 열망과 1980년대 초 방식의 정체성 정치에 대한 거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체성 정치를 대체할 정치적 대안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더 포용적인 형태의 정체성 정치가 등장했고 퀴어 이론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퀴어 정치는 1990년대 즈음의 이런 배경 속에서 시작됐고, 푸코 같은 사상가들의 저작을 재해석했습니다.

퀴어네이션 등의 단체들은 직접행동 같은 전투적 활동 방식을 채택했고, 더 급진적 형태의 정체성 정치를 추구하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그들은 사회 상층부에서 계급적 특권을 이용해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숨기는 자들을 아웃팅[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을 당사자의 의사에 반해 공개]하는 전술을 폈습니다. 이는 분명 계급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음을 나타내지만, 성소수자라면 지배계급이든 노동계급이든 단일한 공동체의 일부로서 함께 싸워야 한다는 사고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죠.

[퀴어네이션은 1990년대 중반에 자취를 감췄지만] 퀴어라는 단어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취지는 뭔가 새롭고 더 이목을 끌며 근사해 보이고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뭔가를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포괄적이고 해방을 가져오는 것으로서 “퀴어”라는 표현을 쓰는 것에 대해 우리는 다소 비판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해방이란 스스로에게 어떤 명칭을 부여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정체성과 당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는 중요한 문제지만, 해방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부르고 규정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해방은 그 정체성을 가지고 어떻게 싸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몇몇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을 모욕하는 말로 쓰였던] “퀴어”라는 말을 여전히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퀴어로 규정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퀴어가 상당히 포괄적인 말임에도 [이곳 영국의] 노동조합 조직들이 “LGBT+”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퀴어”라는 표현이 실제로는 몇몇 사람들을 배척하는 효과를 내기 때문입니다.

푸코

이제 몇몇 중요한 퀴어 이론가들을 살펴봅시다. 앞서 미셸 푸코를 언급했죠. 그는 프랑스 역사가이고, 1979년에 3부작 《성의 역사》의 제1권 《지식의 의지》 를 발표했습니다.(아, 영어로 번역돼 영미권에 소개된 게 그해였네요.) 그 책은 퀴어 이론의 초석으로 여겨지지만 푸코는 1984년에 사망했고 퀴어 이론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990년이었습니다. 푸코는 자신이 퀴어 이론에 기여할 것임을 전혀 몰랐던 거죠.

오늘날 퀴어 이론가들에게 푸코의 사상은 1960년대와 1970년대, 1980년대에 터져 나온, 섹스와 젠더 정체성에 관한 급진적인 문제 제기를 뒷받침하는 사상입니다.

그러나 사실 푸코의 연구는 미국에서 재해석됐습니다. 왜냐면 푸코의 사상은 원래 급진적 정치에서 후퇴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퀴어 이론가들은 푸코를 좀 더 급진적 버전으로 재해석하려 합니다. 물론 여전히 마르크스주의는 거부하면서 말입니다.

푸코는 성이 생물학적 표현이라는 관점을 거부합니다. 푸코는 섹스에 대한 관념이 역사적으로 변해 왔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의 대부분 동안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로 구분되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오히려 특정한 사람들이 소도미[항문 성교 등 당시 ‘부적절하다’고 여겨진 다양한 성적 행위를 포괄한 용어]로 처벌받았는데, 소도미는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죄로 여겨졌고, 그것을 범한다고 해서 특정한 유형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이런 상황은 19세기에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다른 방식들이 도입됐기 때문이죠. 하지만 푸코는 이런 변화와 통제를 억압적인 것으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푸코는 그런 변화의 결과로 성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기는커녕, ‘섹스를 지나치게 하는 히스테리적인 여성’, ‘자위하는 아동’, 동성애자 등의 인간 유형을 통해 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지적했습니다.

푸코가 다루는 또 다른 주제는 권력입니다. 그는 권력을 차별받는 사람들에게는 없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있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푸코는 권력을 그 자체로 억압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고, 오히려 권력은 창조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동성애자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것이 우리에게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합니다. 또, 푸코는 권력을 국가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도 주장합니다.[그의 권력 개념은 가족 내 관계부터 개인과 국가의 관계까지 상이한 관계들을 뒤섞는다.]

푸코의 권력 개념에 따르면 성과 섹슈얼리티는 억압받아 온 게 아닙니다. 따라서 해방을 요구해서는 안 되는 거죠. 왜냐면 우리는 억압받는 게 아니고, 권력이 우리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푸코의 주장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섹슈얼리티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에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왜냐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성소수자를 가리키는 개념들이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도입됐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체성들이 사용되기 시작한 시점을 특정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옛 아프리카에 이르는 사회들을 보면, 사람들이 동성애를 했지만 동성애자에 해당하는 표현은 없었습니다.

한편, 푸코는 본질주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본질주의란 당신이 [여성이나 남성으로서] 어떤 본질을 갖고 태어나고 그것은 절대 바뀔 수 없으며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섹슈얼리티나 젠더 정체성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이분법적이거나 분절된 정체성들이 아니라 스펙트럼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칸막이 같은 범주들로 나뉘어 있지 않죠.

그러나 푸코는 이런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구성되고 시대에 따른 섹슈얼리티의 변화가 어떻게 사회 전반의 조건과 연결돼 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섹슈얼리티 변화와 체제 변화를 연결짓지 않죠.

또, 푸코는 역사의 상이한 시기들[로 이어지는 변화들]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시기들의 차이는 [어떤 진화적 과정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우리에게 생경하기 때문이라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역사 유물론을 견지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반대로 주장하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이해하려면 앞서 일어난 일을 봐야 한다고요.

푸코는 또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권력에 대해 위대한 거역이 이뤄지는 단일한 중심지는 없다. 반항의 정신, 모든 반란의 중심, 혁명가의 순수한 권위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복수의 특수한 저항들이다. … 이 저항들은 그 정의상 전략적 권력 관계의 영역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즉, 우리는 모두 개별자로서 행동할 뿐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시스템에 맞서 우리들을 뭉치게 하는 뭔가 거대한 것 따위는 없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와 혁명에 반대하고, 각각의 차별받는 집단이 시스템 전반이 아니라 시스템의 특정 부분에 맞서 각각 투쟁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죠.

푸코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성의 역사를 연결 짓기를 거부했습니다. 푸코는 섹슈얼리티가 변화한 시기와 자본주의가 발전한 시기가 대체로 일치한다고 인정하면서도 이런 변화를 새로운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지가 가져온 것으로 설명하지는 않겠다고 했죠.

푸코는 그런 변화들이 더 나쁜 것이 아니었고, 그냥 그런 변화가 벌어졌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우리는 억압받고 있는 게 아니라고 했죠.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변화들이 계급 사회에서 비롯됐고, 특정한 이유로 지금은 자본주의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푸코와 달리 사상이 사회를 바꾼다고 보지 않습니다. 유물론자로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사상을 변화시킨다고 봅니다.

또, 억압이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당연히 억압은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오스카 와일드[《행복한 왕자》 등을 쓴 유명 작가][동성애 행위로] 재판을 받았겠습니까? 억압이 문제가 아니라면 빅토리아 여왕 시대 같은 때에 왜 아이가 있는 여성은 집에 갇혀 지내고,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폐물 취급을 받았겠습니까? 억압이 없다는 견해는 사람들이 사는 실제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또, 푸코의 권력 개념은 상이한 유형의 관계들을 뭉뚱그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푸코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 엄마와 아빠의 관계가 개인과 국가의 관계와 똑같다고 말합니다. 아시다시피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국가는 강제력과 무력을 행사하는 기구입니다. 푸코가 섹슈얼리티에 관한 책을 쓰기 전에 국가 기구인 감옥에 관한 책을 쓴 적 있기에, 푸코의 권력 개념은 이해하기 어려운데요. 제 생각에 푸코는 이 문제에서 혼란을 보이는 듯합니다.

이상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푸코에 동의하는 부분과, 확실히 동의하지 않는 부분에 관해 요약해 봤습니다.

버틀러

그러면 그 다음 주요한 퀴어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를 살펴보겠습니다.

주디스 버틀러의 저작을 읽어보신 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있다면 연대를 표하고 싶습니다. 왜냐면 버틀러는 열 마디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오십 마디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근본적으로 버틀러는 생물학적 성, 젠더, 섹슈얼리티를 강요된 문화적 수행성의 형태들로 이해합니다.

버틀러는 포스트구조주의자로서, 푸코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합니다. 세계를 하나의 전체로 보지 않고 다원적인 것으로 봅니다. 푸코가 말했듯이 사회 전체를 바꿀 단일한 주체나 단일한 존재는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조각난 세계에서 각개약진하는 개인들인 것이죠.

버틀러는 1990년에 《젠더 트러블》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 책은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데서 여성 정체성이 필요한지 의문을 던지고, 특히 급진 페미니즘과 급진 레즈비언주의의 부상과 관련해서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시도합니다. 젠더 정체성은 사회를 움직이는 “이성애적 모태”로부터 안정성을 획득한다고 버틀러는 주장합니다.

사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이 성소수자 분야를 다루려 한 책이 아니라고 말했죠. 버틀러는 그 책이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원래 의도였다는 것이죠. 페미니스트들을 겨냥했던 것입니다.

1994년 버틀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퀴어 이론가나 동성애자 이론가이기 이전에 페미니스트 이론가이다.” 한 만찬 자리에서 누군가가 버틀러에게 자신이 퀴어 이론을 연구한다고 소개하자 버틀러는 퀴어 이론이 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퀴어 이론가들이 버틀러의 책을 종종 언급하는데도 말이죠. 퀴어 이론이 얼마나 모호한지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버틀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수행과 수행성을 구분해야 합니다. 전자는 주체를 전제하고, 후자는 주체라는 개념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죠.” 말이 어렵죠. 언어 철학의 개념을 많이 사용하는데요. 어쨌든 버틀러는 수행과 수행성을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면 젠더가 이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버틀러는 어떤 말들은 진술문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세계를 묘사하고자 하는 말이라는 것이죠. “자본주의는 나쁘다,” “나는 마르크스가 좋다”처럼 진실이냐 거짓이냐를 따질 수 있고, 세계가 그냥 이러저러하다고 말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말들은 수행문에 해당합니다. 세계를 변화시키려 하는 말이죠. 이런 말은 진실이냐 거짓이냐로 따질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SWP에 가입할 것을 약속한다”와 같은 서술이기 때문이죠. 버틀러는 누군가를 남성이나 여성으로 일컫는 것이 그저 어떤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즉 진실이나 거짓이 아니고 수행적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버틀러가 말한 수행성의 의미를 둘러싸고 일부 혼란이 있습니다. 주되게는 버틀러가 드랙[흔히 연극이나 퍼포먼스를 위해서 이성의 옷을 입고 분장하고 이성처럼 행동하는 것]을 수행성의 궁극적 형태인 것처럼 서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버틀러는 후속 저작에서 ‘그렇지 않다. 나는 드랙이 젠더 전복의 모범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드랙을 한다면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버틀러의 사상이 인기를 끈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버틀러는 젠더란 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여성들이 남성의 옷을 입는다면 젠더는 끝장날 것입니다. 버틀러는 우리가 어떻게 사회로 조직되는지 살펴보면서 우리 중 어느 누구에게도 내재적 여성다움이나 여성성, 젠더라는 것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버틀러는 여성이라는 것은 생물학과 생물학적 성에 기반한다는 생각에 옳게도 의문을 제기합니다. 어떤 여성들은 아이를 가질 수 없고, 어떤 여성들은 아이를 원하지 않죠. 이렇게 버틀러는 무엇이 여성을 만드는지에 관해 근본적 물음을 제기합니다. 저도 이런 물음이 중요하고 우리도 던져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버틀러와 달리 젠더가 전적으로 사회적으로만 구성되고 여러분 자신에게는 전혀 뿌리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SWP 당원이자 트랜스 여성인] 로라 마일즈가 앞선 강연에서 말했듯이, 젠더 정체성에는 물질적 기반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백지 상태로 태어나기는 하지만, 젠더에 대한 감각은 내면에서 나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버틀러는 트랜스젠더 혐오자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젠더가 완전히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은 성별 정체성을 감지하는 경험을 일부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아무도 트랜스젠더가 아니고, 아무도 남성이 아니고 아무도 여성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는 현실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또 다른 문제는, 다시 푸코와 비슷한데요. 버틀러는 효과적으로 투쟁할 단일한 장소는 없고, 우리 모두를 뭉치게 할 하나의 깃발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버틀러는 우리가 작은 그룹들로서 함께 협력하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버틀러는 노동계급을 대안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더 나중에 나온 버틀러 저작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쪽으로 약간 더 기울었지만(사실 버틀러의 모든 저작은 결이 약간씩 다릅니다), 버틀러는 근본적으로 젠더라는 렌즈로 사회를 바라봅니다. 반면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젠더 등의 문제를 자본주의 체제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기에 버틀러는 사태를 거꾸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버틀러는 개혁주의를 반박합니다. 개혁주의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죠. 그러나 개혁을 쟁취하려는 운동이 어떻게 전진하며 진정으로 근본적이고 영속적인 변화를 성취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투쟁이 새로운 기회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가능성을 연다고 말합니다.

버틀러는 모든 저항이 포섭돼 대의를 상실했다고 비관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사실이 아닙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버틀러, 푸코와 마찬가지로 정체성 정치를 넘어서려 합니다. 정체성을 중심으로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견해에 도전하죠. 그러나 차이점도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체성을 자본주의라는 맥락 속에 자리매김하고 계급투쟁을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반면 퀴어 이론가들은 그런 대안을 제시하지 않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고 역사의 산물이라는 데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합니다. 이는 단지 경제적 변화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계급 등 모든 것을 뒤바꾸는 사회적 변화를 뜻합니다. 반면, 퀴어 이론가들은 많은 경우 이성애자들을 적으로 삼습니다. 이는 문제가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에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데, 모든 이성애자 노동자들을 배척하고 동성애자 노동자들만 모여서 투쟁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죠. 실제로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해 주는 것은 계급이고 그래서 이성애자들이 분노의 표적이 돼서는 안 됩니다.

몇몇 퀴어 이론가들은 성소수자들을 비슷한 이유로 공격합니다.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고 시스템[젠더 규범]을 철저히 거부하지 않는다면서 말이죠.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미국의 억만장자 트랜스 여성] 케이틀린 제너나 [미국의 유명 드랙퀸 방송인이자 동성애자] 루폴처럼 사회의 최상층부에 있는 지배계급과 함께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성소수자들이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하나의 공동체라고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옆의 노동자들과 더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봅니다. 그들이 이성애자든 시스젠더[트랜스젠더와 달리 생물학적 성과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든지 말이죠.

또, 퀴어 이론가들은 기성 질서 내에서 인정을 받으려는 접근법을 비판합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여기에는 ‘계급 특권’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퀴어 이론가들은 이를 라이프스타일이나 성적 취향의 문제로 다룹니다.] 퀴어 이론가인 마이클 워너는 “집에서 저녁이나 만드는 비정치적인 남자들”을 비난하고, “[가학-피학 성애를 즐기는] 사도-마조히스트, 성매매 여성, 드랙퀸, 트래니[트랜스젠더를 비하하는 말]”를 옹호합니다.

문제는 급진적인 섹스나 드랙, 사도-마조히즘 등 정상성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퀴어 이론가들이 제시하는 것들이 기존 질서를 파괴하지는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것들은 체제의 심장부를 공격하지 못합니다. 개인적인 저항의 방식일 수는 있어도, 그 의도와 달리 체제를 타격하지 못합니다.

해방 전략

성 해방 문제에서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하이라이트는 노동자들이 기존 체제를 전복하는 투쟁을 벌이는 혁명적 또는 준혁명적 상황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런 투쟁들은 성 해방의 기회를 열어 줬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그랬고,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도 그랬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 분리 시스템(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투쟁을 통해 최초로 헌법에 성소수자 권리가 명시된 것도 그런 사례입니다.

노동계급이 젠더와 섹슈얼리티 해방을 위한 투쟁을 전진시킬 수 없다고 보는 퀴어 이론의 한계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변화의 주체이고 우리는 집단적으로 변화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경제 위기와 기후 위기, 극우의 부상 속에서 동성애 혐오와 트랜스젠더 혐오가 계속되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여러 투쟁의 깃발들이 있지만, 그 문제들은 같은 체제에 뿌리내리고 있고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물론 퀴어 이론가들도 각각의 투쟁들을 연결하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을 계급이나 체제에 맞선 투쟁이라는 기치 아래 연결짓지 않고, 그저 각자가 서로를 돕는 것 정도로 봅니다. 반면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 투쟁들이 본질적으로 서로 연결돼 있고 같은 투쟁의 일부라고 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얻어 낸 모든 것들은 쟁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투쟁이 불가능하다거나 해방을 위한 노력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은 싸워서 얻어 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해방을 위한 투쟁이 경제적 문제에 비해 부차적이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퀴어 이론가들은 ‘퀴어 해방’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단지 더 나은 경제 체제를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더 나은 체제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입니다.

차별이 원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고 역사에 뿌리가 있으며 변화할 수 있다는 버틀러와 푸코의 지적은 옳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계급 사회에서 젠더는 생산과 가족의 재생산 구실을 강화하는 강력한 도구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젠더를 계급 사회, 특히 자본주의와 연결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겪는 차별의 경제적 토대를 제거하면 젠더를 둘러싼 정당화를 제거할 수 있고, 성적 지향이 문제가 아니게 되고, 억압의 필요성 또한 완전히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자본주의하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퀴어 이론가들의 혼란스러운 연구가 제시하는 노선을 따른다면 그런 변화를 성취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레닌은 혁명이 억압받는 자들의 축제라고 썼습니다. 우리는 그런 축제를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체제를 거부하면서도 그 안에서 우리의 자리를 찾으려는 노력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체제 전체를 거부하고 변혁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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