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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정치와 앨라이 선언 —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다음은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의 기자 토마시 텡글리-에반스가 5월 13일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주최한 LGBT+ 하루 학교에서 한 발제를 녹취·번역한 것이다.
성소수자 운동 내의 주된 경향인 정체성 정치와, 차별 반대 운동을 지지하는 방식으로서 ‘앨라이 선언하기’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다룬다.

지난 5년 동안 수십만 명, 어쩌면 수백만 명이 다양한 형태의 차별에 맞서서 모여 왔다는 말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최근에도 올해 1월, 리시 수낙 영국 총리가 성별인정법(GRA) 개정안*을 스코틀랜드에서 막자, 스코틀랜드의 섬들과 산악 지대들부터 런던에 이르기까지 항의들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달인 2월에는 브리아나 자이 살해 사건* 이후 대중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이런 시위는 특별히 트랜스젠더와 논바이너리* 차별이나 LGBT+ 차별 일반보다도 더 광범하게 차별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경찰의 사라 에버라드 살해 이후에는 성차별에 맞선 항의가 벌어졌습니다. 또한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도 거리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제 생각에 이 모든 투쟁의 공통점 하나는 해당 차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은 수십만 명이 그런 투쟁들의 일부가 되길 원했고 그래서 거리로 나왔다는 점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성소수자 차별에 초점을 맞출 테지만, 오늘 말씀드리는 것 중 많은 부분은 다른 차별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다양한 운동에서 제기되는 두 가지 물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체성에 기반한 정치가 얼마나 효과적인가? 즉, ‘공통의 정체성으로 동원하는 것이 해방을 쟁취하는 데서 얼마나 효과적이고, 정체성 정치의 강점과 약점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그리고 둘째 물음은 앨라이*를 둘러싼 쟁점입니다. ‘특정 차별을 직접 받지 않는 사람들을 해당 차별에 맞선 투쟁에 동참시키는 데 앨라이가 충분한 방법인가?’ 하는 것인데요. 저는 성소수자 [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됐던 사건,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 스톤월 항쟁과 동성애자해방전선(GLF)을 살펴봄으로써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사건이 현대 동성애자 해방 운동의 태동이기 때문이도 하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정체성 정치와 앨라이를 둘러싼 수많은 논쟁이 다른 맥락에서 벌어졌고, 그 언어는 달랐을지 몰라도 논쟁의 내용은 [지금과] 실제로 꽤나 비슷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그 투쟁들에서 배워야 합니다.

정체성 정치에 대해서 제가 말하고 싶은 첫째는, 우파가 이것을 주된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우파가 ‘정체성 정치’를 내세울 때는, ‘성소수자, 트랜스젠더, 흑인은 입 닥치고 다시 너네 벽장 안으로 들어가’라고 지껄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정체성 정치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연대를 밝히는 데서 출발해야 하고, 공통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동원하는 것의 상당하고 실제적인 힘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심지어 몇몇 좌파조차 정체성 정치나 정체성 쟁점을 소위 ‘계급투쟁’을 방해하는 요소로 보는 잘못된 입장을 취하곤 합니다.

그들은 트랜스젠더 권리가 파업과 같은 계급투쟁을 분열시킨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트랜스젠더 혐오가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들은 인종차별 반대가 운동을 분열시키고, 그저 임금 문제만 말하면 된다고 보지만 실제로는 바로 인종차별이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논의의 시작점이 돼야 합니다.

그리고 우파와 좌파의 정체성 정치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파들은 백인 이성애자 남성 “정체성”을 방어하자며 사람들을 동원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는 차별받는 사람들이 차별에 대한 대응으로 공통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모이는 것과는 크게 다릅니다. 우익들이 시도하고 또 실제로 진행하고 있는 것의 실체는 노동계급 사람들을 우파적 의제 아래로 밀어넣으려는 것입니다. ‘당신은 백인으로서 그리고 이성애자로서 공격당하고 있고, 트랜스젠더와 논바이너리 권리, LGBT+ 등에 맞서서 그런 정체성[백인 이성애자]에 기반해서 뭉칠 필요가 있다’고 선동하려는 것이죠.

정체성 정치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정체성 정치란 무엇일까요?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는 공통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조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960~1970년대 운동들(동성애자해방전선, 블랙 파워, 여성 해방 운동 등)은 중요한 사례이죠.

스톤월 항쟁

현대 동성애자 해방 운동이 시작된 1969년 스톤월 항쟁(사진)을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벌어졌던 일은 경찰이 스톤월이라는 술집을 공격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전에도 분명 자주 있었습니다. 그러나 1969년 6월 27일 밤에는 사람들이 경찰에 당하고만 있지 않고 맞서 싸웠고, 그 운동에서 동성애자해방전선(GLF)이 태어났습니다. 처음에는 뉴욕에서였지만 비슷한 조직들이 캐나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에서 빠르게 설립됐습니다.

스톤월 항쟁 이전까지 성소수자들의 정치는 동화주의라고 부를 만한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즉, 사회의 품위에 호소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교회, 가족, 국가의 기존 질서를 화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호모필 운동’* 또는 일종의 레즈비언 조직이던 미국의 ‘빌리타스의 딸들’ 등이 그런 종류였죠. 그리고 스톤월이 이 모든 것을 바꿔 버렸습니다. 스톤월 항쟁은 전 세계의 모든 성소수자의 삶을 바꿨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은 대학생들의 반란과 반전 운동이라는 더 넓은 투쟁을 배경으로 벌어졌지만 동시에 많은 흑인과 라틴계 사람들이 이 운동에 참가했습니다.

역사가 존 디밀리오는 스톤월 항쟁에 대해서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게이 파워를 요구하는 그래피티가 크리스토퍼 가(街)에 나타났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거리에 모였고 화가 났고 지칠 줄 몰랐다. 어떤 사람은 젖은 쓰레기 더미를 순찰차 창문에 던졌고, 인근 [건물] 웨벌리플레이스에서는 콘크리트 블록이 경찰차 후드에 떨어졌고 이내 수십 명이 그 차를 둘러싸 문을 두들기고 경찰차 후드 위에서 춤을 췄다. 쓰레기통이 불탔고, 병과 돌이 날아다녔다. 게이 파워를 외치는 소리가 거리에 울려퍼졌다. 경찰 400명 정도가 대량 2000명이 되는 군중과 전투를 벌였다.” 바로 이것이 동성애자 해방 운동이 탄생한 방식이었습니다. 바로 경찰에 맞선 반란 속에서였죠.

마사 셸리는 뉴욕 동성애자해방전선의 주요 회원 중 하나였습니다. 그녀는 1970년 《게이는 좋은 것이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이성애자들아. 여기 미국의 멍한 면상에 찬물을 끼얹어 버리는 동성애자해방전선이 나가신다. 우리는 우아하게 안정된 운동을 아주 깊은 곳부터 분노에 몸서리치게 만든다. 여기 동성애자가 나가신다. 2미터 현수막을 들고 워싱턴으로 행진하면서 리버럴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우리는 자기 혐오의 사슬을 떨쳐내고 당신들의 억압의 성채로 행진한다.”

이처럼 공통의 정체성으로 조직하는 것은 분명 강점이 있습니다. 관련해서 첫째로, 저는 그녀가 “자기 혐오의 사슬을 떨쳐냈다”고 말한 것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차별의 작동 방식을 생각해 보면, 차별은 사람들이 자신을 부적절한 존재로 느끼게끔 만들고, 자신의 의사는 별로 존중받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느끼도록 만듭니다. 이는 사람들의 자신감을 점차 약화시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함께할 때 그들 각자의 개인적 경험이 하나로 집단화될 수 있고, 차별에 맞서 싸울 힘이 생겨나고, 자신감을 줄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동성애자해방전선이 부분적으로 그런 역할을 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단체는 각종 차별 경험들을 포괄했고 사람들이 함께 모임으로써 맞서 싸울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제 생각에 둘째 강점은 “억압의 성채로 행진한다”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물론 억압의 성채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리된 관점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제가 이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도 다룰 것인데요. 그럼에도 동성애자해방전선이 혁명적 운동을 표방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체제”를 전복하고 싶어 했습니다. 물론 그 “체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은 역시 남아 있었지만, 적어도 그저 기성 사회의 한계를 받아들이면서 이성애자와 동일한 권리를 쟁취하는 것에 초점 맞추지는 않았던 것이죠.

<동성애자 선언>을 집필한 칼 위트먼

이 사진은 동성애자해방전선의 또다른 주요 인물이었던 칼 위트먼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제가 앨라이 문제를 다룰 때도 언급할 텐데요. 칼 위트먼은 《동성애자 선언》이라는 책을 1970년에 썼습니다. 위트먼은 민주학생연합(SDS)이 벌인 반전 운동 등 다양한 투쟁들에서 활동했습니다. 1960년 초에 발행된 《가난한 자들의 다인종 운동을 위하여》라는 팸플릿의 공동 저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동성애자 선언》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동성애자들의 해방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고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 스스로 규정하는 것, 우리의 관계를 이성애자 간의 관계나 이성애자의 가치를 잣대로 측정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다원주의적이고 역할 규정이 없는 사회 구조를 스스로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회는 사람들이 혼자 살든, 둘이 커플을 이루고 살든, 또는 그 이상이 모여 살든, 그리고 잠시 동안만 함께 살든, 긴 시간을 함께 살든 이를 선택할 자유와 물리적 공간을 모두 보장해야 한다. 그리고 저마다 필요할 때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쉽게 바꿀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다시 한 번 그들이 기성 체제 내에서 법적 개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가장 근간이 되는 구조적인 부분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우리는 여기서 그런 강점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동성애자해방전선은 급진적이었고 체제를 정말로 뒤흔들었고 다른 투쟁과 연관을 맺으려 했습니다. 동성애자해방전선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 보세요. 베트남과 알제리의 민족해방전선에 대한 지지였습니다. 동성애자해방전선은 흑표범당과 함께 활동했고 그들이 동성애자 권리를 지지하도록 이끌어 냈습니다. 그리고 그 밖에도 당시의 각종 운동과 함께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운동들이 체제를 구성하는 국가를 뒤흔들 수는 있었지만, 각종 차별을 지속시키는 국가와 자본, 시스템을 실제로 분쇄할 수는 없었습니다.

정체성 정치의 약점

저는 당시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정체성 정치가 가졌던 몇 가지 약점에 대해서 말하고, 그 다음에는 그 내용이 오늘날에도 적용되는지 다뤄 보겠습니다.

두 가지 쟁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해방을 쟁취할 전략인데, 정체성 정치는 이 물음에 답을 하지 않습니다. 공통의 정체성으로 조직하자는 것 그 자체가 모종의 전략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정체성 정치는 노동계급의 사회적 힘을 끌어들이는 것을 의미하는가? 분리주의적 조직 건설을 의미하는가? 서로 다른 투쟁 속에서의 자율성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운동을 훨씬 더 큰 하나의 투쟁으로 단결시키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미인가?

그리고 둘째 약점은 누가 포함되고 누가 포함되지 않는지에 대한 쟁점, 파편화 위험입니다.

동성애자해방전선의 잡지 <컴투게더> 표지 사진들

첫째 약점에 대해서는 그 시대에 벌어진 토론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영국 동성애자해방전선이 1970년대 초반에 낸 《컴투게더》라는 잡지인데요. 여기 두 개 호의 표지 사진이 있습니다. 당시 그들이 노사관계법안에 반대해 동원을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죠.[왼쪽 표지의 ‘G.L.F against the I.R.B.’라는 표제어]

그 법은 보수당이 노동조합 권리를 공격하려고 밀어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동성애자해방전선 내 일부 사람들은 그런 시위에 조직적으로 동원해서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그 시위에 가서, 노조 권리를 방어하려고 파업하고 시위 중인 노동계급 사람들의 생각에 도전하고, 함께 투쟁하면서 그들을 동성애자 권리 지지 쪽으로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이 잡지에는 당시 사람들이 그런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생각이 바뀌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인터뷰가 꽤 있습니다. 소개할 시간이 없어서 아쉽습니다.

같은 호 잡지 독자편지 지면에는 또 다른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성애자들 자체가 문제라고 꽤 센 어조로 말하고 있는 글이 있습니다. 그 글에선 이성애자를 설득하는 것은 무망하고, 그러므로 이 운동에는 이성애자가 있을 자리가 없고, 실제로 운동에서 함께할 가능성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매우 모순적인 정치 경향들이 같은 조직 내에 있었습니다.

정체성을 중심으로 조직한다고 말할 때, 그 사람들의 경험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또 그 사람들이 억압에 맞서서 싸우기 위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알려고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정체성 정치와 연관 개념들, 또는 앨라이 선언하기는 사람들을 어느 정도 본질주의적으로* 대하도록 만듭니다. “성소수자들의 경험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무척 다양한 성소수자가 있는데 그들은 저마다 조직화 방법에 대한 생각과 경험이 다르고, 또 운동을 전진시킬 정치 노선도 저마다 다릅니다.

동성애자해방전선 내에서는 온건 대 급진 사이에 장기간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트랜스젠더·논바이너리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운동 속에 포함시켜야 할지, 아니면 그들이 참가하면 운동이 점잖게 보이지 않아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얻는 것을 더 어렵게만 만드는 것인지, 또 우리는 그저 동등한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인지 아닌지, 정치적 행동보다는 라이프스타일 정치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 그리고 거리나 작업장에서의 행동보다는 코뮨(공동체) 생활을 통해 사회를 바꿀 수 있는지 등등. 온갖 종류의 논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더 넓은 투쟁들이 돌파구를 열지 못했던 것의 결과로, 동성애자해방전선이 분열하게 됐습니다. 그때의 진정한 쟁점은 누가 운동에 포함되고 누구는 안 되는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정치가 강성 자율성 추구와 분리주의에 기름을 부었는데 사실상 ‘왜 억압자들과 함께 하느냐’고 말하는 것이었죠. 그리고 첫 세션[‘대영제국은 어떻게 성소수자 혐오를 세계로 퍼뜨렸는가’]에서 말했듯이 차별은 체제에 뿌리박혀 있고, 체제가 사람들의 행동과 태도 그리고 생각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즉 그런 차별의 근본 원인이 이성애자 사람들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거기에는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는데 바로 그들의 경험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꽤 강성의 자율성 추구와 분리주의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는 운동을 다양한 정체성으로 분열시켰고 그렇게 동성애자해방전선도 쪼개졌습니다.

“여자로 정체화하는 여자” 선언문

이 사진은 “여자로 정체화하는 여자”라는 레즈비언 그룹의 것인데 이들은 동성애자해방전선에서 분열해 나왔습니다. 또한 이런 사건은 운동이 진정한 쟁점을 다룰 때 보였던 문제적 방식을 보여 줍니다.

1960년대 운동 속에는 분명 성차별적이거나, 인종차별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도전했던 한 가지 방식은 그런 사람들과 계속 협력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잘못된 생각에 날카롭게 문제 제기하는 것입니다. 흑표범당이 동성애자해방전선을 지지하게 된 것은 결코 자동적이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강한 주장이 오가는 논쟁이 있었고 그렇게 해서 동성애자해방전선은 지지를 얻어냈습니다.

이와 다른 방법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몇몇 사람들이 문제가 있는 사상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는 그들과 분리해서 우리 자신의 작은 그룹으로 가겠어. 그리고 우리는 그들과 절대 함께하지 않을 거야.’ 그 방법을 택한 이들은 그 시기 내내 온갖 세세한 정체성으로 파편화되게 됩니다. 그래서 게이들 사이에서는 드랙퀸과 마초로 불린 사람들이 분열했고, 정치적 레즈비언과 비정치적 레즈비언 사이에도 분열이 있었습니다. 왜냐면 여전히 게이바 문화의 일부인 레즈비언들은 비정치적이라고 여겨졌고 따라서 그들이 남성의 여성 억압에 공모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자율성을 강조했던 것은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집단보다는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1970년대 말이 되면 서로를 탓하고 비난하는 분위기가 가득했습니다. 진정한 원인은 합심해서 썩은 파이를 없애 버리기보다는 내 파이를 한 조각이라도 더 가지려 한 것이었죠.

여러분이 오늘날 성소수자 운동 내 정치를 살펴보면, 당시에 벌어졌던 분열과 논쟁만큼 극단적이진 않지만, 정체성 정치를 중심에 두는 운동에는 여전히 그런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오늘날에는 좀 더 포용적인 버전의 정체성 정치인데요. 사람들이 자신이 ‘서로 연결돼 있지만 동시에 별개인 투쟁들’의 일부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오늘날에도 비슷한 위험이 여전히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무엇이 진정한 원인인지, 정체성 정치의 한계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그 뒤에 앨라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영국 런던경찰청장이었던 크레시다 딕

이 사진은 크레시다 딕입니다. 그녀는 런던경찰청장이었는데 런던경찰청은 심하게 동성애 혐오적이고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조직이죠. 그녀는 영국에서 최상층 권력자 자리에 있는 레즈비언 여성 중 하나죠. 여기서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차별이라는 것이 계급을 가로지른다는 점입니다. 지배계급에 속하더라도 동성애 혐오와 트랜스젠더 혐오를 경험할 수 있고, 사회주의자라면 모든 차별에 맞서야 하고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이든지 막론하고 그래야 합니다.

저는, 지배계급에 속하는 트랜스젠더가 노동계급 사람으로부터 혐오를 당한다면 그에 맞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차별적 생각에 도전할 것입니다. 이는 엄청나게 중요한 점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사회주의자로서 저는 차별이 생겨나는 데에서 계급의 중요성을 우리가 알아야 하고 또한 차별과 착취의 관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겪는 차별이 계급에 따라 크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노동계급 트랜스젠더 여성과 [올림픽 메달리스트 출신의 부자 트랜스젠더] 케이틀린 제너로 사는 것 사이에는 의료서비스 이용이나 안전 문제 등 모든 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고, 그런 차이로 인해 사람마다 경험하는 차별의 종류와 방식이 크게 달라집니다.

그러나 또한 더 근본에서는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공통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성소수자들이 뭉치자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친구’ 크레시다 딕처럼 런던경찰청 수장이었던 사람도 성차별과 동성애 혐오를 겪었을까요? 물론입니다. 경찰 같은 조직에 있으면서 그런 차별을 겪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녀가 일정 부분 그런 차별들을 극도로 싫어했을까요?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오 이런, 이건 별로 유쾌하지 않은데? 뭔가 대책팀을 꾸려야겠어’ 하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계급적 위치 때문에, 그녀는 그런 차별을 지속시키는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 계급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단지 추상적 문제가 아닙니다. [경찰의] 사라 에버라드 살해 이후 수십만 명의 여성과 남성이 모여서 성차별에 맞서서 항의한 시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을 가혹하게 탄압한 경찰은 흑인 여성인 내무부 장관의 지시에 따라 레즈비언 여성이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생각해 보면, 그들이 지배계급이고 이 체제를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법적 개혁을 원할 수 있고 좀 더 나은 태도들이 사회적으로 많아지길 원할 수도 있죠. 그리고 성차별적 생각에 대해서 뭔가 조치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차별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체성 정치 같은 정치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시위 뒤에 크레시다 딕에 대한 사임 요구가 있었을 때, 운동 내에서는 그녀가 사임하면 성소수자 여성의 지위가 후퇴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사회의 주요 자리에서 성소수자를 대표하는 이가 한 명 줄어들 것이라는 논리였죠. 공통의 정체성만을 기준으로 조직하는 전략과 사회 비전이 실제로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정치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해방 전략이 더 낫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마르크스주의 전략은 무엇보다도 계급이 중심성을 갖고 또 계급 문제가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 차별이란 전혀 자연스럽지도 않고 언제나 존재했던 것도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차별은 자본주의와 계급 사회하에서 태어났고 또 거기에 뿌리박혀 있습니다.

둘째로 만약에 차별이 계급과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생겨난 것이라면 실제로 그 체제를 뿌리 뽑을 힘을 가진 사회 세력이 누구인지 물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노동계급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온갖 종류의 멍청한 생각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누구든 먹고살기 위해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면 그 사람은 노동계급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물건을 만들어 내기 위한 물건[생산수단]을 통제하거나 소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만약 여러분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통제한다면, 여러분은 지배계급입니다.

이 체제에서 노동계급이 이윤의 원천이고 그래서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원천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파업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팬데믹 기간 누가 사회를 굴러가게 했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만약에 노동계급이 집단적으로 조직해서 그들의 노동을 그만둔다면, 그럼으로써 우리가 겪는 차별의 근본 원인인 이 체제를 없앨 잠재력, 즉 잠재적인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 이 과정에서 어떤 것도 자동적으로 벌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노동계급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더 나은 사상 또는 진보적 사상 혹은 사회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이 해방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그런 사상을 갖도록 하려면 만만찮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잠재력이 이 사회에는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지점이 제가 정체성만으로 조직하는 것이 불충분하다고 주장하는 큰 이유입니다. 우리는 계급 기반 전략을 지향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노동계급 사람들 중 특정 차별에 직접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그 운동에서 무슨 역할을 해야 할지에 대한 제 생각을 말해 보려 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 지점에서 앨라이 선언 문제를 다뤄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성소수자나 흑인 등이 아닌 사람 수백만 명이 차별에 맞선 투쟁에 한 부분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에서 우리가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씀드립니다.

이는 대단히 좋은 일이죠. 우리는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서 더욱 더 큰 운동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에 맞서 지배계급 편에 결집할 세력의 크기를 감안해도 정말 큰 운동이 필요합니다. 만약에 그런 운동을 건설할 무언가가 있다면 좋은 일입니다.

앨라이 선언과 특권이론

제 생각에는 그런 생각이 주되게 앨라이임을 선언하자는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각종 앨라이 가이드라인 같은 것에서 제시하는 많은 것이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상식적인 것들이죠. ‘사람들의 경험을 들을 필요가 있다,’ ‘당신의 행동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당신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편견에 도전하라’ 등등. 이런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앨라이임을 선언하자는 생각은 우리가 특권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의 다양한 버전에 부분적으로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그런 주장을 개진할 때에는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특권이론은 차별이 개인들이 자동으로 얻은 일련의 특권이라는 층위에서 작동한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사람마다 차별을 경험하는 방식, 그리고 인생의 기회, 의료서비스 이용, 경찰에 대한 경험 등에서 굉장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차별이 사회경제적 지위에 미치는 영향도 사람마다 크게 다르죠. 이런 내용은 모두 사실이고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개인 간의 관계의 더 깊은 층위에 있는 것, 개인 간의 관계가 어디에 뿌리박고 있는지 아는 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런 관계들의 뿌리를 파고들고 또 숙고해 보면, 그런 관계 자체는 차별이 자본주의와 계급 사회에 뿌리내린 방식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이성애자 백인 남성 노동계급이 사회에 존재하는 각종 불이익으로 득을 보는 게 아닙니다. 왜냐면 이런 이익들은 체제 때문에 생겨난 것이고 궁극적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체제 최상층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소수자와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에 대한 차별이 있는 사회라고 해서 모든 이성애자나 시스젠더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거나, 그들이 차별에서 이익을 얻는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진정한 수혜자는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기 위해 차별을 이용하는 사회 최상층부 사람들입니다.

이 지점에서 다른 쟁점을 제기하고 싶은데, 종종 앨라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도덕적 호소를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당신은 차별에 반대해야 한다. 왜냐면 그건 나쁜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차별이 나쁜 것이기 때문에 반대하기도 합니다. 당연하죠.

그러나 차별에는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기 위한 지배계급의 수단이라는 구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당신이 노동계급이고 이성애자고 시스젠더이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차별과 착취를 유발하는 이 체제를 없애버리는 데 물질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단순히 앨라이 선언에 만족하는 것 이상의 정치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몇 가지 사례를 검토하고 싶습니다.

그중 하나는 연합의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종류의 것이고 이러한 주장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칼 위트먼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앞서 제가 말했듯이 동성애자해방전선의 주요 멤버 중 한 명입니다. 그는 《동성애자 선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의 대부분은 우리[동성애자]끼리 조직하는 것이고 우리는 기본적으로 동성애자-이성애자[로 분리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이성애자가 우리의 적은 아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다중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여성, 흑인, 다른 소수자 등 다른 해방 운동과 관계를 맺고 있다.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미국을 혼자만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

칼 위트만이 여기서 하고자 했던 말은 우리가 여성 해방 운동 참가자, 흑인 해방 운동 참가자, 라틴계 사람들, 백인 급진주의자 등 다양한 세력의 연합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력들이 체제 전복이라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는 분명 강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대의 정치

하지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단지 각종 차별을 받는 사람들만이 연합 대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노동계급 중에 이성애자고 백인이며 남성인 사람들도 해방을 위한 투쟁에 복무하도록 설득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그건 자동적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하지만, 분명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휘트먼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런 가능성을 보지 못했다고 책잡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만으로는 그런 가능성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광원을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의 파업 지지 콘서트 포스터

하지만 여러분은 또 다른 사례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은 1980년대 ‘광원들을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LGSM)’의 것입니다. 당시 광원들은 보수당 정부에 대항하여 그야말로 거대한 투쟁을 벌였었죠. 그리고 LGSM은 ‘광원들과 변태들’이라는 파업 지지 콘서트를 열었는데, 광원 지도자 중 한 명인 데이 도노반은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그간 ‘실업수당이 아니라 석탄을’이라는 우리의 배지를 달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괴롭힘에 시달린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우리 못지 않게 알고 있죠. 이제는 우리가 당신들의 배지를 달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지지하겠습니다. 물론 하룻밤 사이에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단순한 과정이 아닐 것이라는 지적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강연자]. 그러나 이제 14만 명의 광원들은 우리가 아닌 이들이 겪는 문제와 그들 투쟁의 대의명분을 알게 됐습니다. 우리는 흑인 차별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성애자 차별과 핵 감축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는 예전 같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듯 투쟁과 연대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체제 타도라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자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투쟁을 시작하게 될 때, 이것이 중요한데요, 사람들의 생각은 백지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함께 투쟁하는 가운데 그들의 생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처음부터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갖고서 투쟁을 시작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투쟁의 선두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연대의 정치야말로 실제 상황을 변화시킬 더 가능성 있는 전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투쟁의 규모가 훨씬 더 큰 혁명에서는 사람들의 생각이 어디까지 바뀔 수 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저는 정체성 정치가 강력한 동원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급 정치로 한 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앨라이 선언하기로 운동의 폭을 넓힐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앨라이 이상의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대의 정치, 즉 노동계급 중 차별받지 않는 사람들도 이 투쟁으로 끌어들이고, 이 투쟁에는 그들의 이해관계(곧, 체제 전복)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정리 발언

모두 훌륭한 토론 감사합니다.

가장 먼저, ‘[개인] 경험이냐 집단적 행동이냐’를 둘러싼 쟁점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이것이 둘 중 하나를 양자택일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 경험에서 시작한다는 것과 그것을 집단적 행동으로 모아 내야 한다는 것 사이에서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 둘은 연결된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종종 변증법이라는 것에 대해 말하는 걸 들었을 텐데요.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사물을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변증법으로 개인의 경험과 집단적 행동을 바라봐야 합니다. 왜냐면 종종 개인의 경험이 집단적 행동을 자극할 수 있듯이, 강력한 운동이 벌어져 집단적 행동을 고무하면 개인이 차별에 대응하는 방식이 더 적극적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1980년대에 좋은 사례가 있습니다. 그 시기 ‘광원을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의 활동은 이미 제가 언급했고, 그런 연대로 광원노조와 노조 운동, 결국에는 노동당도 동성애자 권리를 지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벌어진 또 다른 파업이 있는데요. 바로 [여객선 회사] P&O페리 노동자들의 투쟁이었습니다. 여기서도 성소수자들과 P&O페리 노동자 사이에 연대가 있었는데 특징적이었던 것은 P&O페리 노동자 중 일부가 투쟁하고 연대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 커밍아웃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개인 경험과 집단적 행동은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널리 얘기되는 또 다른 중요한 쟁점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데요. 우리가 노동계급에 대해서 말할 때, 그 노동계급은 차별받는 집단과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노동계급은 선진국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인구의 대다수입니다. 마르크스가 글을 쓰던 시점에는 노동계급이 800만 명에서 1000만 명 정도쯤 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노동계급이 국제적으로 다수입니다. 이성애자와 성소수자, 시스젠더와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흑인, 백인의 다수는 모두 노동계급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계급으로 뭉쳐서 반격할 때, 차별받는 사람들이 종종 용기를 얻어 자신들도 그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고무받을 뿐 아니라, 노동계급 중 정체성 때문에 차별받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도 도전받게 됩니다.

지금 저는 노동계급 운동에는 차별 반대의 정치를, 차별 반대 운동에는 계급 정치를 가지고 가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착취뿐 아니라 성소수자 차별도 그 근원이 이 체제라는 것, 그리고 이 체제를 뒤집어엎을 잠재적 힘이 노동계급에게 있다는 것을 주장해야 합니다. 전략에 대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략상의 차이에 대해 한 가지 더 얘기하고 싶습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개인적 경험은 정말로 중요하고 운동에서 배제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예컨대, 성소수자뿐 아니라 성소수자이자 흑인인 사람들이 편하게 참가할 수 있는지 살피고, 그들이 겪는 차별도 운동이 반영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건 매우 중요하죠. 그런데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 때 문제가 벌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보세요. 제가 성소수자이고요. 이게 바로 제 전략이에요. 이게 동의가 안 되시면 당신은 사실상 차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거죠.”

그게 정말일까요? 제가 학교를 다닐 때, 당시 제 절친 중 두 명이 엄청 억눌려 온 게이이자 보수당 지지자인 걸로 드러났는데요. 당연하지만 사회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꽤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의 말처럼 태도를 취하는 건] 그저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무시하고 침묵시키는 것이죠. 운동은 [차별받는 사람들을] 존중해야 하고, 포용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전진하기 위한 논쟁에 열려 있어야 하죠. 저런 방식으로 논쟁을 닫아버려서는 곤란합니다. 왜냐면 이런 논쟁을 통해 운동이 전진할 힘이 강화되기 때문이죠.

우리가 노동계급 기반의 전략을 제기할 때 취해야 할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양한 운동에 손가락질하는 방식이어선 결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즉, “에휴, 당신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이해해야만 해”하고 훈수만 둬서는 아무 도움도 안 되기 때문에 아무도 여러분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혁명적 사회주의자로서 여러분은 차별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것과 백인,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성인 사람들을 차별적 생각으로부터 떨어뜨리는 것이 실제로 가능함을 입증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 이에 대해서 꽤 괜찮은 말을 한 사람들 중 하나는 20세기 가장 훌륭한 혁명가 중 하나인 레온 트로츠키입니다.

트로츠키(왼쪽)와 프리다 칼로(가운데) ⓒ출처 Wikimedia Commons

이 사진은 트로츠키와 프리다 칼로인데요. 트로츠키는 1929년에 미국의 지지자들과 토론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트로츠키는 소련에서의 스탈린주의 반(反)혁명에 맞선 운동을 이끈 인물인데요, 그 반혁명으로 인해 당시 [소련] 성소수자들의 차별 개선은 무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반대파’라고 불린 미국의 한 조직은 미국 공산당에서 쪼개져 나와서 반(反)스탈린주의 마르크스주의를 추구한 사람들로 트로츠키와 의견을 주고받았습니다.

트로츠키는 미국 내에서 심지어 공식 노동조합[AFL]에서도 인종차별이 벌어지는 현실을 꼼꼼하게 살폈습니다. 그리고는 흑인들이 겪고 있는 차별과 그에 대한 좌파들의 후진적 입장을 완전히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 노동조합 관료들은, [소련] 스탈린주의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귀족적 특권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반대파’ 동지들이 이러한 편견에 조금치라도 감염된다면 비극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편견을 비판할 뿐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서 마지막 흔적까지도 불태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노동계급 중 가장 핍박받는 이들과 관계 맺을 방법을 찾아야 하고 그 시작은 흑인들이어야 합니다.… 그 흑인들에게 우리는 혁명적 형제로 인식돼야 합니다.” 그리고 트로츠키는 흑인들이 사회주의자들을 혁명적 형제들로 여길지 여부는 “전적으로 그 활동에 우리가 쏟는 에너지와 헌신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계급 중심 전략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당연히 계급적 단결을 주장하고, 노동계급의 잠재적 힘에 대해서도 주장해야 하지만 동시에 여러분은 차별에 완강하게 반대하는 태도의 고삐를 한 시도 늦춰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트로츠키가 주장한 이런 전략은 SWP의 접근 방식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런던에서 열린 트랜스젠더 프라이드 행진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최근 수년 동안 여기 있는 영국 전교조 회원인 마이클은 자신이 속한 노동조합이 트랜스젠더 권리를 지지하게 하도록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트랜스젠더 프라이드 행진에 노조가 현수막을 들고 참가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죠. 자, 이게 왜 중요할까요? 이건 그저 ‘와 보기 좋다’ 정도에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이건 실제로 [차별에 맞선] 과정 중 하나인 것이죠.

여러분이 직장에 가서 “트랜스젠더 프라이드를 지지해야 하고 트랜스젠더와 논바이너리 권리를 지지해야 하며 또한 그 행진에 우리 노조의 현수막을 들고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직장에서 그리고 노동계급의 조직 안에서 차별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노조 현수막을 트랜스젠더 프라이드에 들고 가고 노조 대열이 참가할 때, 이런 행동은 트랜스젠더 프라이드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동맹이 될 수 있는 사회 세력이 여기 실제로 있습니다’ 하고 입증해 보이는 과정입니다. 이를 보는 사람들이 비록 노동계급의 잠재력에는 동의하지는 않을지라도 저는 이런 과정이 완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혁명가로서 여러분은 차별받는 사람들이 스스로 조직할 권리를 지지해야 하고 그런 조직을 방어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략으로서는 분리주의와 강성 자율성을 내세우는 사상이 지배자들을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히 강력하지 못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배자들은 권력과 돈이 있고 각종 조직을 거느리고 있는 만큼 우리에게는 대항할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SWP에 가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묶어 내려고 노력합니다. 착취와 차별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왜냐면 노동계급 내 사상은 모순적입니다. 트랜스젠더 권리에 대해서 정말 좋은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인종차별적 생각에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죠. 반대로 인종차별에 확고히 반대하는 사람들이 트랜스젠더 권리는 지지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주의자로서 모든 운동에 뿌리를 내리고 함께 조직하면서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하고 또한 운동에 혁명적 주장을 불어넣으려 해야 합니다.

모든 큰 투쟁들 속에는 요구를 체제의 틀 안으로 국한시킬지 아니면 그 이상으로까지 전진해서 진정한 승리를 얻어 낼지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운동을 더 전진시켜서 더 많은 성과를 얻어 내기 위해서는 착취와 차별에 진지하게 맞서는 혁명적 조직이 필요합니다. 이런 조직 속에서 활동하며 각종 운동이 노동계급의 힘이라는 대들보를 지향하고 또 이를 중심으로 결집하도록 할 때 이 체제를 없애 버릴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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