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파는 젠더 이슈에 집착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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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7월 12일에 같은 제목으로 열린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제문이다.
최근 오세훈, 홍준표, 김진태 등 우파 정치인들이 기독교 우파 세력에 동조해 성소수자 혐오를 부추기고 퀴어퍼레이드 개최를 방해했습니다.
이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대구와 서울 모두에서 퀴어퍼레이드가 성황리에 치러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축되지 않고 성소수자 혐오 세력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2010년대 후반 이후 극우가 부상하고 공식 정치가 우경화한 나라들에서는 성소수자, 성교육, 임신중단권 등에 대한 공격이 부쩍 늘어나고 있습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공격은 극우가 집권하거나 성장한 나라에서 두드러집니다. 대표적인 나라가 헝가리입니다. 헝가리는 동성 결합이 인정되고 동성 커플의 자녀 입양도 가능했던 나라입니다. 그러나 극우 오르반 빅토르 총리 재임 중인 2020년 동성 커플의 자녀 입양이 금지되고 성별 정정과 청소년 젠더 교육이 금지됐습니다.
미국에서도 우파의 성소수자 공격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공화당이 주 정부와 의회를 장악한 곳이 많아지고, 트럼프 정부 이래 연방대법원에서 보수 대법관들이 큰 다수파가 되면서 성소수자 공격이 더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올해 상반기에만 41개 주에서 성소수자를 공격하는 525개 법안이 발의됐고 그중 70개 이상이 통과됐습니다. 115개의 성소수자 억압 법안이 도입된 2015년 이후 최다입니다.
성소수자 공격 법안 중 220개 이상은 트랜스젠더를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미성년자나 성인의 성별 전환 수술 금지, 젠더 정체성에 따른 화장실 사용 금지, 트랜스젠더의 스포츠 경기 출전 금지 등이 주요 내용입니다. 학교에서 성소수자 관련 쟁점을 토론하지 못하도록 한 주들도 있습니다.
지난해 미국 연방대법원은 헌법상 임신중단 권리를 박탈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뒤,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는 주에서 임신중단이 거의 모두 금지되거나 크게 제한됐습니다. 올해 6월 30일에는 연방대법원은 동성 커플에게 서비스 제공을 거부하는 기업의 손을 들어 주는 판결도 내놨습니다.
성소수자 혐오 범죄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최근 미 연방수사국 FBI는 2021년 미국의 성소수자 혐오 범죄가 전년도에 비해 54퍼센트나 증가했다고 밝혔습니다. 유럽에서도 지난 10년간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이 증가했다는 보고서가 발표됐습니다.
왜 세계 도처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저는 우파가 젠더 이슈를 이용하는 방식과 그 이유를 살펴보고, 어떻게 싸울 것인지도 다뤄 보겠습니다.
우파와 ‘젠더 이데올로기’
오늘날 세계적으로 우파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실패를 가리고 보수적 의제로 평범한 사람들을 결집시키고자 젠더 문제를 이용합니다.
극우파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한 엘리트층을 공격해 대중의 불만을 파고들어 성장해 왔습니다. 그때 그들이 대중을 이간시키고 퇴행적 운동에 대중을 동원할 때 흔히 쓰는 무기가 이민 반대와 소위 ‘젠더 이데올로기’ 반대입니다.
극우는 성소수자 평등, 동성결혼, 트랜스젠더의 권리, 성교육, 임신중단권, 젠더 폭력 단속 입법 등을 죄다 뭉뚱그려 ‘젠더 이데올로기’라고 비난합니다. ‘젠더 이데올로기’가 아이들의 조기성애화, 성범죄 증가, 가족의 붕괴를 낳아 사회와 인류를 파멸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 선동으로, 사람들에게 불안과 도덕적 공포를 부추기기 위한 것입니다.
‘젠더’라는 말은 서구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일어난 여성해방운동을 통해 대중화된 용어입니다. 젠더는 생물학적 성을 뜻하는 ‘섹스’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회적으로 정의되는 성을 뜻합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일어난 여성해방운동과 동성애자해방운동은 성역할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대중의 생각을 크게 바꿨고, 여러 개혁 입법과 제도 개선을 얻어 냈습니다.
우파는 1960~70년대 운동이 얻어 낸 성과를 되돌리고 싶어 합니다. 그 일환으로 성과 젠더에 대한 급진적 사상도 공격합니다. 유명한 젠더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가 종종 핵심 표적이 됐습니다.
버틀러의 강연은 유럽과 남미 등지에서 우파의 반대 시위에 부딪혔습니다. 2021년 말 한국에서도 EBS가 버틀러 강연을 방영한다고 예고했을 때 기독교 우파는 버틀러를 소아성애 지지자라고 비방하며 방영 취소 압력을 넣었습니다. 다행히 EBS의 버틀러 강연은 그대로 방영됐습니다.
서구에서는 2010년대 들어 동성결혼이 합법화되고 성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입법이 이뤄졌습니다. 이런 나라들에서 우파는 흔히 트랜스젠더를 핵심 표적으로 삼습니다.
트랜스젠더를 혐오하는 우파는 성별 전환과 이를 지지하는 견해들에 격렬히 반대합니다. 그들은 젠더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견해에 반대해 생물학적 성은 바뀔 수 없고, 여성과 남성의 역할은 생물학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것은 틀린 주장입니다. 성별 역할과 개인의 성별 정체성이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주장은 생물학을 인간의 숙명으로 여기는 관점입니다. 이런 생물학적 결정론은 우파가 트랜스젠더를 공격할 때뿐 아니라 여성 차별을 정당화할 때도 이용돼 왔습니다.
성(sex)과 젠더(gender)
대다수 사람들의 성별 정체성은 타고난 생물학적 성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트랜스젠더처럼 출생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논바이너리’로 규정하며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범주에 포함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사실 생물학적 성이 무엇인가부터 논쟁이 있습니다. 생식 기관만 보더라도 생물학적 성은 이분법적이지 않습니다. 소수이지만 간성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간성은 신체적 특징이나 호르몬 발달이 전형적인 이분법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처럼, 생물학적 성은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고, 성별 정체성이 생물학적 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을 젠더 이분법 안으로 욱여넣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젠더 정체성은 고정불변이 아니고 실재합니다. 이것을 부정하면 트랜스젠더는 큰 고통과 차별에 내몰립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을 예리하게 나누는데, 이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 활동과 사회적 요소는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합니다.
물론 젠더는 여성의 지위가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한 게 아니고 사회가 만든다는 점을 강조하는 용어로 등장했고, 이 점은 여전히 유용합니다. 그러나 섹스와 젠더의 차이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은 차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젠더가 생물학적 성과 무관하게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고만 생각하면 젠더 정체성을 허구적인 것이나 단순한 느낌으로 치부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많은 자유주의자와 페미니스트, 일부 좌파는 트랜스젠더의 젠더 정체성을 성별 규범을 내면화한 것으로 보거나 느낌 정도로 치부하며 트랜스젠더의 권리 보장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해외의 일부 페미니스트는 트랜스젠더 권리 보장에 반대해 심지어 우파와 동맹하는 어리석은 태도를 취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트랜스젠더의 권리와 여성의 권리가 대립한다고 보고, 트랜스젠더의 권리가 인정되면 여성운동의 성과가 훼손되고 여성 공간이 침해받는다고 여깁니다.
한국의 분리주의적 페미니스트들도 이런 주장을 폅니다. 2020년에는 일부 분리주의적 페미니스트가 주도한 반대 운동 때문에 트랜스젠더 여성이 숙명여대 입학을 포기한 일도 있었습니다.
젠더와 차별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별 차이가 사회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때 생물학적 차이가 왜 중요해지는지 알아야 합니다.
‘남성다움’이나 ‘여성다움’이라는 규정은 생물학적 특성에서 비롯하지 않습니다. 제가 앞서 말했듯이, 생명 활동과 사회적 요소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과학자이자 저술가인 코델리아 파인은 신생아가 “부모, 또래, 교사, 옷, 언어, 미디어, 롤 모델, 단체, 학교, 교육 기관, 사회적 불평등 … 그리고 당연하게도 장난감”을 통해 “성별 구성물”을 선택한다고 말합니다. 성별에 대한 인식은 아주 어릴 때부터 사회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보통, 성기로 규정되는 생물학적 성차는 실재합니다. 하지만 그 차이가 중요해지는 것은 사회 체제의 성격과 관계있습니다. 생물학적 차이가 인류 사회에서 언제나 사회적 지위나 권력의 차이를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인류 역사의 95퍼센트를 차지하는 사회는 무계급 사회였습니다. 그때는 남성과 여성의 성별 분업은 존재했어도 여성이 차별받지는 않았습니다. 남성은 주로 수렵을 맡았고 여성은 주로 채집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여성의 낮은 지위를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여성은 채집 활동으로 공동체 식량의 절반 이상을 공급했기에 영향력이 컸습니다. 여성은 중요한 의사 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지 않았고, 양육도 전혀 여성만의 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 존재한 사회들에서는 남성이나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이 자신의 출생 성별과 반대되는 성별로 자라고 살아가는 것이 허용됐습니다.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 존재한 ‘두 영혼의 사람’이 한 예입니다. 일부 부족은 젠더가 셋이나 넷 이상 존재한다고 여겼습니다.
이분법적 성별 규범은 19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핵가족 제도가 확립되면서 굳어졌습니다. 동성애와 임신중단을 처벌하고 규제하는 법들이 생겨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자본주의와 가족
우파의 성소수자 공격은 전통적 핵가족 제도와 성별 규범을 강화하려는 게 목적입니다. 임신중단권 공격도 같은 목적으로 벌이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과 결혼에 대한 대중의 태도가 크게 바뀌면서 가족 제도는 약화됐지만, 여전히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 경제적·이데올로기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아이를 기르고 환자와 노인을 돌보는 일을 무보수로 개별 가정에 떠넘기는 것은 지배계급에게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줍니다. 특히, 자본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국가가 긴축 정책으로 일자리와 복지를 축소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개별 가족에 생계와 돌봄 부담을 떠넘길 수 있습니다.
가족 제도는 이데올로기적 구실도 하는데, 가난과 실업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고 보수적 가족 가치관을 이용해 노동계급 대중을 이간시키고 분열시킵니다. ‘전통적 가족 수호’가 역사적으로 세계의 모든 우파가 애용해 온 구호인 이유입니다.
성소수자와 임신중단권 문제를 놓고 각국 지배자들의 태도가 같지는 않습니다. 1950년대 이후 가족제도와 대중의 의식이 크게 바뀌었고,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수준도 매우 높아졌습니다. 미국에서 민주당과 많은 기업이 임신중단 불법화에 반대하는 이유죠.
그럼에도 체제의 위기가 더 심각해지면 우파는 대중의 불만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고 노동계급에게 부담을 더욱 전가하고자 전통적 가족 규범을 더욱 강화하려 할 것입니다. 위기가 더 심각해지면 지배계급의 자유주의적 파벌들도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해 우파에 타협하는 일이 흔히 일어납니다.
그래서, 임신중단권과 성소수자 권리를 지지하는 일부 정치인들도 노동계급을 공격하는 긴축 정책을 지지하는 일이 흔합니다. 지난 사반세기 미국 민주당이나 유럽과 남미 등지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집권 중에 이런 신자유주의적 공격을 가했습니다. 이에 대한 대중의 환멸이 우파와 극우가 성장하는 배경이 됐습니다.
한국에서는 국민의힘은 물론 민주당도 성소수자 권리 보장 요구를 오래도록 외면해 왔습니다. 민주당은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차별금지법과 임신중단권 입법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민주당의 이런 기회주의는 보수 유권자층을 의식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정당으로서 그들도 가족 제도 유지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보수적 가족 가치관은 대중을 분열시킵니다. 그래서 그들이 정부나 사용자에 도전하는 힘을 약화시킵니다. 우리가 성소수자와 여성 차별을 부추기는 주장과 조처들에 비타협적으로 반대하고, 차별에 맞선 저항에 무조건 지지를 제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차별에 맞서는 저항
많은 나라에서 성소수자 공격이 증가하고 임신중단권 공격이 늘고 있다고 앞에서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저항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 영국에서는 우파의 트랜스젠더 공격에 맞서 ‘트랜스젠더+ 자긍심 행진’에 2만 5천 명이나 참가했습니다. 이 집회에는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들도 대거 참가했습니다.
차별 반대 투쟁과 계급투쟁을 별개로 여기는 생각이 흔하지만 차별 반대 투쟁은 계급투쟁의 고양과 긴밀한 관련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성소수자와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은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이 고양될 때 가장 멀리 나아갔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 성소수자 운동은 1918~23년 독일 혁명기에 노동자 반란 속에서 가장 크게 성장했습니다. 성과학연구소가 설립됐고, 모든 도시에 성소수자 교제 단체가 설립됐고, 성소수자를 위한 최초의 대중 조직이 생겨났습니다. 1920년대 베를린은 유럽에서 ‘동성애의 수도’로 통했습니다.
특히, 1917년 10월 혁명으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은 러시아에서는 동성애 차별법이 철폐되고 동성결혼이 허용됐습니다. 임신중단도 세계 최초로 합법화됐습니다. 이혼의 자유와 혼외 출생 차별 폐지 등의 조처도 도입됐고, 양육과 가사의 사회화도 추진됐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말경 혁명이 패배했습니다. 끔찍한 반동이 이어졌습니다. 1920년대 말 이후 스탈린의 반혁명으로 혁명의 성과는 모조리 제거됐습니다. 독일에서는 1933년 히틀러의 나치가 집권한 뒤 성소수자 수십만 명이 수감되고 학살당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차별받는 사람들의 해방은 노동계급의 해방과 떼어놓을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깊어지면서 각국 공식정치가 우경화하고 있는데, 앞으로 경기 침체가 본격화되면 우파의 성소수자 공격은 더 강화될 것입니다. 성소수자 해방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에 맞서 광범한 연대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런 연대는 저절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트랜스젠더 권리를 지지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혁명적 좌파는 여성 차별, 성소수자 혐오에 비타협적으로 맞서며 운동의 단결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시청자 발언 1 “트랜스젠더를 스포츠에서 배제하는 시도에 반대해야”
저는 트랜스젠더와 스포츠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화장실 문제에 이어 특히 서구에서 우파가 트랜스젠더를 공격하는 최신 버전이라 할 수 있죠.
2021년 도쿄 올림픽에 트랜스 여성 로렐 허버드가 출전했을 때, 논란이 컸습니다. 당시 트럼프는 ‘남자가 여자 스포츠에 참가해 올림픽을 망치고 있다’고 말했죠.
얼마 전 국내에서는 나화린 사이클 선수가 커밍아웃을 하고 강원도민체전에 출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처음인데요, 한국에서도 더 많은 트랜스젠더 존재가 드러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일이라 저는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강원도지사 김진태는 이를 두고 ‘여자 선수들한테 불평등한 일’이라며, 나화린 선수가 나가겠다고 하지도 않은 “전국체전에는 못 나가도록 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에서는 공화당이 장악한 약 25개 주에서 태어날 때의 성별 외 다른 성별의 경기 참여를 금지하는 법이 통과됐거나 추진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국제적·국가적 수준에서 경쟁하는 엘리트 스포츠뿐 아니라, 학교 스포츠와 심지어 레크리에이션 스포츠까지도 대상으로 합니다. 사실상 트랜스 여성, 여성 청소년의 스포츠 참가 권리 자체를 박탈하는 것이죠.
우파는 트랜스 여성이 명백한 신체적 이점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여성부 경기에 참가하는 것은 불공정하고, 여성의 기회를 빼앗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트랜스젠더의 경기 참가 금지가 “여성과 여성 청소년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하죠.
먼저 저는 우파의 위선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가 웃을 일이죠. 이들은 여성의 임신중단권에 반대하고, 학교에서의 성교육을 제한하길 원합니다.
여성 스포츠는 관심과 지원을 못 받아 훨씬 더 열악하고, 여성 선수들은 종종 성차별적인 대우를 받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파가 벌이는 일은 더 평등한 스포츠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스포츠에서 트랜스젠더 차별을 강화하려는 것입니다.
발제자도 말했지만, 우파의 진정한 목적은 대중을 분열시키고 우파적 이데올로기로 결집시키려는 데 있습니다. 그럴 만한 소재로 스포츠가 의식적으로 선택된 것이죠. 특히 자본주의하에서 [엘리트] 스포츠는 남녀가 예리하게 구분돼 있고, 치열한 경쟁을 바탕으로 하며, 승자독식이기 때문에 더 좋은 소재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포츠에서 트랜스 여성의 참가를 전면 금지하는 것에 합리적 근거가 없음을 주장하며 마치겠습니다.
첫째, 트랜스 여성이 언제나 모든 종목에서 신체적 이점을 갖는 게 아니라는 연구 결과들이 있습니다. 호르몬 요법이 부상 위험도를 높인다는 연구도 있고요. 둘째, 스포츠 능력과 관련된 생물학적 차이는 생물학적 남녀로만 구분되지 않습니다. 남성들, 여성들 사이에도 개인이 가진 능력의 차이가 있죠. 셋째, 사회 정치적 요인들이 스포츠에서 “공정성”과 훨씬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트랜스젠더를 스포츠에서 배제하려는 시도에 반대해야 합니다.
시청자 발언 2: “성경 구절은 성소수자 차별의 근거가 못 된다”
최근 성소수자 공격에서 우파 기독교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저는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성경을 어릴 때부터 많이 읽었고, 자연스럽게 보수 기독교계에서 성경의 몇몇 자구를 인용해 성소수자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을 많이 들어 왔습니다. 또, 저는 이를 반박하는 주장과 논리를 여러 진보적 신학자와 활동가들에게서 많이 배웠습니다. 이를 공유하고 싶어 발언을 신청했습니다.
성경 전반부에는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의 목록이 열거돼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규정은 600개가 넘는데, 현대의 우리가 보기엔 지나치게 빡빡합니다. 이는 아마 성서가 쓰인 당시 유대교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을 둘러싼 사회가 그들에게 꽤 적대적이기 때문이었을 거라 추측됩니다.
섬유 여러 개로 옷을 만들거나 입으면 안 되고, 구레나룻은 자르면 안 되고, 삼겹살도 새우도 낙지도 먹으면 안 됩니다. 그런 수백 개의 규정 중 남성 간의 성적 행위가 안 된다는 규정 하나에만 집착하며 지상 목표처럼 구는 것은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것일 뿐입니다.
기독교의 교리를 완성한 바울이든 예수든 금기적 계율의 폐지를 통한 인간 구원의 완성을 말했지, 그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성서와 19세기까지의 교회 전통은 동성애를 증오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결국 성서의 여러 텍스트 중에서 지금 사회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보고, 주장하며, 행동할지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회를 바꾸고 싶은 사람이 성서에서 찾을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교훈은 여러 예언자와 성서 속 예수의 행적이라 생각합니다.
예언자들의 전통 중엔 이 세계에 계급이 생긴 것을 비판하고 그 결과인 불평등을 폭로하며, 잘못된 국가 권력을 꾸짖고, 저항에 나서는 사람들을 다독이는 전통이 있습니다. 실제로 구약의 예언서는 부패한 권력을 꾸짖는 판결문의 형식으로 쓰여 있고, 예수 전승은 로마 제국에 맞선 반란이 컸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로마의 역사와 신화를 여러 방면으로 조롱하며 탄생했습니다.
몇몇 모순이 있긴 하지만 예수나 예언자들은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때 가장 약하고 폭력을 당하는 사람들 편에 섰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히브리 신의 정의관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현재 기독교계에서 영향력 있는 우파들은 성소수자와 이주민을 타깃 삼아 공격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공격받는 부위를 보호하고, 이들과 함께 차별적이고 불합리한 이 체제를 변혁해 나가는 행동을 건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선택이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시청자 발언 3: “여성 차별과 트랜스젠더 차별의 뿌리는 같기 때문에 함께 싸워야”
저는 한 시청자가 왜 젠더 비판적 페미니스트들이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지 물어 본 것에 대해 제 생각을 말해 보려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젠더 비판적 페미니스트를 넘어 좀 더 넓은 진영의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이 세계를 남 대 여가 적대, 대립하는 구도로 봐 온 것이 여기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게 보면 특히 트랜스 여성이 남성일 뿐이고, 그들을 적대해야 하며, 여성한테 위협적이라는 인식을 받아들이기가 쉬워집니다.
그래서 발제자도 말씀하셨듯이 그런 생각을 부추기는 여러 해외 뉴스가 인용되고 범죄 같은 것도 크게 부각되면서 트랜스젠더가 위험한 존재라고 얘기하는데요. 설령 개개인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을 트랜스젠더 전체의 문제로 비약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트랜스 여성들은 폭력의 피해자인 경우가 더 많죠.
한마디만 더 덧붙이자면, 저는 생물학적 여성과 트랜스젠더 둘 다 성별 규범에 고통받는다는 말이 정말 맞다고 생각하는데요. 사실 여성 운동, 특히 낙태권 운동에서 “My body, my choice” 같은 슬로건을 많이 내세우지 않았습니까? 저는 이것이 트렌스젠더에게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여성 운동은, 협소한 생물학적 여성 [규정이나] 여성을 ‘걸어 다니는 자궁’ 취급하는 주장에 맞서서 오랫동안 싸워 왔는데, 사실 트랜스젠더를 공격하면 오히려 이런 종류의 생물학적 본질주의가 더 강화되고 여성이 자기 몸을 결정할 권리에 부메랑이 돼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죠.
역사적으로도 계급 사회가 들어서면서 여성이 차별받고 그때부터 다양한 젠더와 젠더 표현이 이상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기 때문에 여성 차별과 트랜스젠더 차별의 뿌리는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같은 뿌리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청자 발언 4: “생물학적 결정론은 차별에 맞서는 데 도움 안 된다”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 드리려고 발언을 신청했습니다.
남성은 타고나길 공격적이고 성취 지향적이고 대범하고 가사에 서툰 반면, 여성은 타고나길 돌봄에 능하고 관계 지향적이고 가사에 익숙하다 등 남녀가 서로 다르게 타고났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요즘 사람은 드물겠지만, 발제자님도 지적한 것처럼 우파들은 여전히 이런 생각을 다시금 꺼내 들어 고리타분하고 협소한 가족 개념을 강화하고자 합니다.
왜 그런 걸까요? 지난 수십 년간 자본주의 변화 속에서 여성의 사회적 진출도 늘고, 핵가족 제도도 많이 약화됐습니다. 그러나 가족 제도는 여전히 지배계급에게 아주 유용합니다.
자본주의 핵가족 제도, 그 안에서 여성이 하는 무급 노동은 지배자들에게 경제적으로 엄청나게 이득이 됩니다. 청소·요리부터 노인·아동에 대한 돌봄까지요. [지배자들은] 여성이 이런 일을 하기에 적합하게 타고났다면서 엄청난 돈을 아끼는 것입니다. 전통적 가족에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 있는 여성들도 가족 안에서의 여성 역할에 대한 사회적 태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가족 제도는 지배계급에 경제적으로 유용할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이득이 됩니다. 아이들이 이분법적인 성역할을 배우고 익히는 장소이기도 하죠.
따라서 꽉 막힌 이분법과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생물학적 결정론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에서는 차별 반대 운동 안에서 젠더 개념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생물학적 결정론을 받아들이는데요. 트랜스젠더 여성이 시스젠더 여성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남성이 본질적으로 위험하고, 여성의 적이라는 생각과 연결돼 있습니다.
물론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남성의 생물학적 본성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여성 차별은 우리가 사는 사회 구조에 의해 유지되고 강화됩니다.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설명하면 이것이 언제나 존재하는 ‘정상적인’ ‘자연스러운’ 본능 때문인 것으로 둔갑하고, 따라서 없앨 수도 없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생물학적 결정론은 여성 차별에 맞서는 데도 도움이 안 되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시청자 발언 5: “청소년 성전환·성교육에 대한 우파의 비난은 역겨운 위선”
발제 잘 들었습니다. 저는 채팅창에서 제기된 미국의 청소년 성전환 치료 금지법과 우파의 성교육 공격에 대해 얘기하고자 합니다.
청소년 성전환 치료 금지법은 미국 공화당 등 우파들이 적극 추진하고 있는데요, 이 법안은 18세 이전에 성전환 수술이나 치료를 받을 수 없도록 금지하는 것이 골자입니다. 심지어 성전환 치료를 도운 의사나 부모도 처벌할 수 있는데요. 트랜스젠더 혐오를 강화하는 대표적인 악법입니다.
우파들은 이 법안이 청소년 보호를 위한 조처라고 주장합니다. 성전환 치료가 부작용이 많고, 아이들이 성별 정체성을 판단할 능력이 안 된다고 말이죠.
그러나 이는 역겨운 위선인데요. 트랜스젠더 혐오 범죄로 청소년 피해자가 늘고 있지만, 우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혐오를 부추기는 데 사활적으로 매달리고 있습니다.
여러 통계에 따르면 많은 트랜스젠더가 아동기 때부터 성별 괴리감을 느낍니다. 특히 원치 않는 2차 성징이 올 때 매우 고통스러워하고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겪을 확률도 높아집니다. 그래서 미국 소아과학회와 내분비학회 등 전문가들도 트랜스젠더 청소년의 건강을 위해 성전환 치료가 필요하다고 한 것입니다.
물론 청소년 시기는 급격히 신체가 변하는 시기이므로 의료적 성전환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수 있죠. 하지만 이는 의학적 문제이지, 법으로 금지하고 처벌할 문제가 아닙니다.
법적 규제는 매우 해악적인데요, 약물을 구하려는 트랜스젠더 청소년이 음성적 방법으로 내몰리거나 자살하는 경우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우리는 트랜스젠더 청소년이 선택한 성별 정체성을 존중하고, 충분한 정보와 의학적 지원이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한편, 우파들이 이렇게 청소년을 이용해 성적 보수주의를 부추기는 경우가 흔합니다. 채팅창에서 퀴어퍼레이드 반대 집회에서 우파가 성교육을 문제 삼는 것이 일반적이냐는 취지의 질문도 있었는데요.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구 우파들도 개방적인 성교육이 아이들을 문란하게 만들고, 동성애를 퍼뜨린다며 게거품을 무는데요. 최근에는 젠더 교육이 아이들을 망친다는 주장을 많이 합니다. 한국 우파도 그렇고요.
하지만 현실은 다르죠. 많은 청소년이 성소수자 포용적 교육이나 피임, 임신중단 등 실질적인 성교육을 원합니다. 보수적인 성 관념이야말로 아이들을 무지하게 만듭니다.
저는 청소년을 독립적인 성적 주체로 인정하고, 성별 고정관념을 벗어나 당당하게 성을 즐길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성교육이 제공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발제자의 정리
활발한 질문과 발언으로 기여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합니다. 나왔던 질문과 견해들에 대해서 제 생각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주디스 버틀러가 소아성애자냐는 질문이 있었는데 그건 완전히 비방입니다. 소아성애는 성인이 아무런 자기 결정도 할 수 없는 아주 어린 아이를 대상으로 성애를 한다는 것으로, 사회주의자들은 당연히 지지하지 않죠. 버틀러가 워낙 성소수자 해방 운동가로서 유명하고 그가 내세운 주장이 굉장히 많은 급진적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를 핵심 표적으로 삼고 비방하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분의 질문하고 연관시켜서 얘기해 보겠습니다. 버틀러의 주장은 굉장히 급진적인 이론으로 여겨지는데요.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1960~70년대 이후에 젠더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생각을 받아들였는데, 버틀러는 더 나아가서 생물학적 성이라고 하는 것조차도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생물학적 성도 바꿀 수 있고, 성 역할도 다 사회가 만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버틀러의 사상은 성을 이분법적으로 구속하려는 것에 저항하는 사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급진적이기 때문에 우파들이 버틀러를 핵심 타깃으로 삼는 것이죠.
물론 버틀러의 주장에 대해서 제가 100퍼센트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버틀러의 주장에는 합리적인 핵심이 있습니다. 특히 우파가 보수적인 관점에서 버틀러를 비방한다면 우리는 버틀러의 주장에 대해서 기본적으로는 방어하면서 토론을 하는 게 바람직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성소수자 인권 등이 보장된 나라나 주에서 출산율이 저하된 게 사실이냐는 질문이 있었는데요. 서구에서 성소수자 인권 등을 보장하는 법들이 도입된 건 사실 1980년대이고, 동성 결혼 합법화는 대부분 2010년대 이후입니다. 그런데 출산율 저하는 더 오래된 일입니다. 이미 1950년대 이후부터 그런 추세가 이어졌죠. 따라서 이것이 성소수자 인권 등과 관련된 법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넓게 보면 1950년대 이후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 변화, 특히 여성들이 더 많이 노동시장에 진출하고 교육 기회도 확대되면서 대중의 성 의식이 크게 변했거든요. 이를 반영해 사람들이 성소수자 인권을 보장하라거나 여성 차별을 없애라고 요구하고 그런 압력이 어느 정도 수용돼서 그런 입법들이 이루어진 것이지, 입법 자체가 그런 변화를 낳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우파들이, 성소수자 인권이 보장된 나라에서 출산율이 저하했다는 식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그만큼 대중의 의식 변화와 [차별 반대] 운동들을 그들이 반대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성 결합, 동성 결혼 등을 지지하지만 결혼을 할지 말지는 순전히 개인의 선택이 돼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해서 싸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정부가 영아 살해로 여성들을 범죄자로 몰면서 수사하고 있는 것의 배경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있었는데요. 저는 기본적으로 정부가 도덕적인 공포를 부추기면서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인기가 없는 윤석열 정부가 더 인기 없는 정책을 계속 밀어붙이기 위해 사람들의 관심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고 보수적인 가치관을 강요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범죄와의 전쟁’이나 ‘마약과의 전쟁’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고요.
“종교적 신념 때문에 성소수자가 싫다고 말하는 것도 혐오냐? 그것은 표현의 자유다”라는 주장을 어떻게 봐야 될까 하는 질문이 있었는데요. 표현의 자유라는 것을 맥락에서 떼어놓고 무조건 다 좋다고 얘기하면 안 되고 표현의 자유가 왜 중요한가, 어떤 맥락에서 제기되는가를 봐야 됩니다. 표현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차별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권력자들에 맞서서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고 투쟁을 전진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중시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홍준표 같은 권력자들이 차별받는 사람들을 더 천대하고 억압하기 위해서 표현의 자유를 얘기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이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고 오히려 억압이라고 분명히 말을 해야 된다고 보고요. 개인이 그냥 싫어하는 것과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서 억압하는 건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추상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다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이 정도로 하고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지금 자본주의 위기가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국에서 우파나 극우가 부상을 하고 있는데요. 우리는 이들이 차별을 부추기고 [차별받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일이 더 많아지리라는 것에 경각심을 가지고, 단결해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분명히 인식해야 된다고 봅니다. 각각의 차별들에 대해서 “이건 내 문제가 아니라 해당 당사자들만의 문제”라는 식으로 여긴다면 우리 평범한 사람들, 노동계급과 서민층 사람들의 삶은 더 악화되고 [이에 맞서는] 투쟁이 강력해지기 힘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차별에 맞선 투쟁과, 노동계급의 투쟁과 해방이 별개가 아니고 연결돼 있다는 관점에서 싸워야 하고요. 특히 자본주의에 반대해서 혁명적인 전망을 가질 때 성소수자와 여성과 노동계급 모두의 해방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교훈으로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