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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의 방법 ⑴:
노동의 소외

아래는 노동자연대 운영위원이자 국제연락간사 최일붕이 ‘마르크스주의의 방법’ 시리즈 강연의 첫 번째 주제로 마르크스의 소외론에 관해 8월 23일 노동자연대TV를 통해 한 발제(영상 보기)의 원고를 게재한 것이다. [  ] 안의 말은 시간 제약으로 실제 TV 발제에서는 생략된 부분이다. 다만 마지막의 첨언은 일부 시청자 질문에 대한 못다 한 답변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소외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가 말한 소외는 따돌림이나 배제가 아니고, 소외감이라는 느낌도 아닙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객관적 조건을 소외라고 불렀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자기와 부양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한데 묶어 노동계급(또는 프롤레타리아)이라고 합니다.

노동계급 사람들이 자기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이유는 자기에게 생산수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산수단을 소유한 개인 자본가나 국영 기업에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서 임금을 받아야 합니다.

노동계급 가운데 이럭저럭 고용된 사람들을 두고 노동자(또는 임금 노동자)라고 합니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에게 생산수단이 없어서 노동자들은 자기의 노동 생산물은 물론이고 노동 자체도 통제하지 못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를 두고 그는 노동의 소외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우리가 토론할 주제는 바로 노동의 소외입니다. 노동의 소외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왜곡된다는 점도 논의할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과 세계 사이의 관계도 노동의 소외 때문에 왜곡된다는 점도 논의할 것입니다.

헤겔과 달리 마르크스처럼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해 자본주의 사회에, 그리고 노동에 초점을 맞춰 소외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소외론의 출발점을 초역사적으로 역사 일반에 걸쳐, 또 노동계급을 넘어 인류 일반으로 확장하는 것에서 시작하면, 소외가 유의미한 마르크스주의적 방법 구실을 못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 발제 후반부에서 좀 더 언급하기로 하고, 먼저 마르크스가 소외에 대해 한 얘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소외된 노동과 그에 대한 반응

역사 전체에 걸쳐 인간은 자연을 대상으로 노동을 해서 생활에 필요한 물건과 재료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러기 위해 인간은 서로 협동하는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이를 두고 노동과정이라고 합니다. 노동과정은 인간 삶의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측면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노동은 생경한, 낯선 외부 세력인 자본가가 지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노동도 낯설고 생소한 것이 됐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단지 살기 위해, 그저 생활 수단을 얻기 위해 일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일은 더는 그의 삶이 아닙니다.

게다가 사용자들은 경쟁과 효율의 필요성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더 적게 주고, 더 빠르게, 더 열심히, 더 오래 일 시킵니다. 자기 일에 대한 통제가 적은 일자리일수록 저임금이기 쉽고, 또 저임금 일자리일수록 자기 노동에 대한 통제 여지가 적은 경향이 있습니다.

갈수록 노동과정은 더 조각나고 더 작은 작업 과정들로 나뉘게 됩니다. 개인적 재능이나 창의성을 발휘할 여지는 별로 없습니다. 노동자들은 마치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돼 버립니다. 경직되게 반복되는 일을 하는 기계 말입니다. 노동자의 일은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말한 “추상적 노동”에 점점 가까워집니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20세기 초·중반의 저명한 좌파 코미디언 찰리 채플린이 주연하고 감독한 〈모던 타임스〉라는 위대한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 영화는 노동자가 어떻게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되는지를 잘 묘사한다. 유튜브나 티빙에서 스트리밍 되고 있으니 꼭 보기를 권한다.]

오늘날에는 노동의 소외가 훨씬 확장됐습니다. 가령 콜센터 일도 [〈모던 타임스〉가 상연된 1936년의] 공장 일과 비슷하게 소외됐습니다. 기후 위기도 노동 소외와 관련 있습니다. 기후 재난으로 주로 노동계급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데도 노동자들은 기후 재난을 갈수록 악화시키는 탄소 배출 많은 생산 방식과 생산물에 관련돼 있습니다.

교사의 일도 자본주의 이전과 다릅니다. 오늘날 교사의 일은 가르치는 것이라기보다는 학생을 측정하고 평가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교사의 노동은 소외됐습니다. 무슨 의미로 교권을 말하는지는 흔히 모호하지만, 교권 운운이 교사가 자기 일에 대한 통제력이 없어 힘을 잃은 상황을 반영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노동이 소외돼서, 인간 삶의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부분이 돼야 하는 노동이 인간이 견뎌 내야 하는 부담이 돼 버렸습니다. 직장에서 일할 때 우리는 성취감을 느끼기보다는 원자화되고 고립돼 있다고 느낍니다.

노동자는 성취감을 주는 창의적인 일을 통해 자기 자신을 표현할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삶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할 대안을 찾습니다. 그리고 사생활과 프라이버시를 개성을 표현할 유일한 수단으로 여기게 됩니다. 직장에서 우리는 얼굴 없고 힘 없고 교체될 수 있는 존재이지만, 직장 밖에서는 집을 꾸미고, 맛집을 찾고, 친구들과 카페에서 수다 떨거나 호프에서 술 마시고, 재미있는 드라마나 영화, 스포츠 경기 관람, 패션 등을 통해 우리의 개성을 표현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그다지 개성 충만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개성 충만한 개인들인 유명인들에게 사로잡히는 이른바 ‘셀럽 문화’가 광범합니다. 그러나 셀럽 문화에 집착하는 것은 내 개성도 중요하고 주목할 만하다는 환상과 현실도피적 동기를 제공할 뿐입니다.

소외 현실로부터의 가장 뚜렷한 도피 사례는 히키코모리입니다. 근래 우리나라에서도 히키코모리가 빠르게 늘었다는데요, 히키코모리 생활도 소외에 대한 반응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자기 삶은 자기가 통제할 수 있다는 정서의 발로인 것이죠.

자본주의 사회의 정신 건강 문제, 특히 우울증 등 만성불안장애도 소외에 대한 반응의 한 형태입니다. 물론 무의식적인 형태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소외가 근본 원인이라는 점에서는 다른 형태의 반응들과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자해 문제를 들어 보면, 자해 행위를 통제 부재의 세계,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듯한 세상에서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확실한 방법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매우 안쓰럽게도 말입니다.

사례 하나만 더 들자면, 노동자들이 매우 보수 우익적인 관념들, 예컨대 성차별, 인종차별, 성소수자 차별 등을 지지하는 것도 소외에 대한 반응의 한 형태입니다. 물론 이는 반동적인 형태의 반응입니다.

소외, 불평등, 경쟁

노동자들은 소외에 의해 노동과정만 통제하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만든 노동 생산물도 생경한, 외부적인 것이 됐습니다. 상품은 노동자들의 소유물이 아니고 사용자와 자본가의 재산입니다.

생산물은 더는 노동자의 직접적 필요를 충족시키지 않고 그저 이윤과 시장의 필요를 충족시킬 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재화를 노동자들이 만들었건만 노동자들은 그중 일부라도 구하려면 돈을 내고 사야 합니다. 중국에 있는 세계 최대급 폭스콘 공장의 노동자들은 자기가 만든 아이폰14를 자기 임금으로 사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노동자들에게 꼭 필요한 주택보다는 사치스러운 대저택이 지어져 많은 노동계급 가구들은 전·월세를, 그것도 종종 반지하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또 영화 하나를 강력하게 추천하고자 한다. 바로 〈기생충〉이다. 그 영화는 대저택을 소유한 부자들의 삶과 반지하 세입자들의 삶을 대조하며 블랙 코미디 스타일로 묘사한다.]

노동의 소외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도, 그래서 사회 전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자신의 노동 생산물은 물론이고 자신의 노동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면, 노동할 기회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게 됩니다. 내가 만든 것인데도 내 것이 아니고 내 일도 내 맘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누구나 자기 일을 자기가 통제할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는 직장을 구하고 싶어 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런 일자리를 구하려 합니다. 그러나 자기 일 통제 여지는커녕 이 일자리 저 일자리 가릴 계제가 아니고 그저 일자리 얻기 자체가 문제되는 경우가 많고 사실 그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서로 경쟁합니다. 결국 노동의 소외는 노동계급 사람들 사이를 소원케 만듭니다. 사람들은 서로 이해득실을 따져 다른 사람을 봅니다.

사회의 경쟁은 이미 학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소외는 교육에도 침투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지 못하고 시험에 나오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가 배우고 싶은 것도 성적처럼 수량적으로 평가 받습니다. 우리는 남들을 경쟁자로 여기도록 교육받고,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는 것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환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남이 내게 도움이 되는지를 재어 보고야 친우 관계를 맺으라고 배웠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어른이 돼서까지 줄곧 상품처럼 평가 받아야 하고 등급이 매겨집니다. 우리는 서로 소외됐습니다. 그리고 서로 소원해졌습니다. 갈수록 더욱 그럴 겁니다.

인간성 상실과 기후 위기

이제 노동의 소외는 인간 본성(본질)을 소외시킨다는 점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마르크스는 추상적인 인간 본성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 본성이 역사 속에서 변해 왔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 본성에 고정불변의 특징들이 있음을 부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일반적인 인간 본성과 역사적 시기에 따라 변화된 인간 본성을 구별했습니다.

일반적인 인간 본성, 즉 인간 본성의 한결같은 측면은 의식주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인간이 자연을 대상으로 협동적 노동을 한다는 점이라고 마르크스는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은 노동자들의 집단적 이익이나 관심사와 별 관련 없고 그저 노동자 개인의 생계를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유적 존재”라고 부른 인간 본성은 멀어지고 순전한 개인으로서의 추상적 인간 본성만이 부각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마르크스는 노동이 인간 본성으로부터 소외됐다고 했고, 뒤집어 말해서, 인간 본성이 소외됐다고도 했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앞서 논의했듯이,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은 그저 살기 위해 억지로 하는 것이고, 자유롭지도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자를 종종 “임금 노예”라고도 불렀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은 창조적이지도 않고, 개인적 의향이나 성향과도 별 관련 없어 개성도 없습니다. 판에 박힌 형식적·의무적·습관적 행위입니다.

자유롭고 의식적인 활동으로서 노동, 즉 인간 본성은 자본주의적 생산 속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노동의 소외는 자연의 소외도 부릅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노동과정과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됨에 따라 노동의 대상인 자연으로부터도 소외된다고 지적했습니다. 노동이 노동자에게 낯설고 통제불능의 것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자연을 매개하는 핵심 수단이 바로 노동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노동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면, 그것은 매개 관계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는 뜻이요, 이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대사(代謝), 즉 신진대사가 불규칙해지고 불균등해진다는 뜻이라는 겁니다. 미국 마르크스주의자 존 벨라미 포스터는 이를 “대사의 균열”이라고 불렀습니다. 노동의 소외가 대사 균열을 일으킨다는 것이죠.

인간과 자연 사이의 대사 균열의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는 바로 기후 변화입니다. 그러나 존 벨라미 포스터가 보여 줬듯이, 일찍이 한 세기 반 전에 바로 마르크스가 기후 변화의 원천인 인간과 자연 사이의 대사 균열에 관해 이미 심각하게 논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이 균열이 자본주의 때문임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기후 혼돈을 끝내려면 결국 자본주의를 끝내야 합니다.

노동의 소외를 놓친 철학자들

발제 앞부분에서 저는 소외를 자본주의 사회 노동자들의 노동과정과 노동생산물과 관련된 그들의 객관적 조건으로 이해해야 한다며, 그러지 않을 경우의 난점들을 발제 후반부에 소개하겠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나치당원이 되는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도 소외 문제를 다루지만 순전히 철학적으로 다룹니다. 1927년에 출간한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저작 《존재와 시간》에서 “퇴락”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실존주의적으로 다루는데, 심지어 소외를 받아들일 수 없는 나쁜 것으로 보지도 않습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와 1950년대에 알베르 카뮈와 장폴 사르트르 같은 프랑스 실존주의자들도 소외 문제를 다루는데, 그들도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이라는 역사적 특수성을 빠뜨린 채 단지 철학적 논의만을 하다 보니 소외를 이른바 “인간의 조건,” 그것도 극복 불가능한 조건으로 다룹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의해 소외된 노동에서 출발해 인간의 예속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갔습니다. 반면 실존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 의해 소외된 노동이라는 역사적 특수성 없이 철학적 논의를 통해 인간 예속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실존주의자들은 노동자의 객관적 소외에 근거하지 않고 노동자의 ‘자기 소외’, 즉 주관적 소외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도 1958년에 발표한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프랑스 실존주의자들과 매우 비슷한 입장을 취하며 ‘자기 소외’에 대해 말했습니다. 심지어 아렌트는 마르크스가 자기 소외, 주관적 소외에 우선순위를 뒀다는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카뮈든, 사르트르든, 아렌트든 소외를 둘러싼 오해를 했다는 이유로 간단히 폄하하고 일축할 철학자들은 아닙니다. 사르트르처럼 마르크스주의자였든, 아렌트처럼 자유주의자였든 어쨌든 그들은 종종 정치적으로 좋은 기여를 했습니다.

저는 다만, 마르크스의 소외론에 대한 그들의 오해는 소외를 극복할 효과적인 전략으로 그들이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독일 망명객 마르크스주의자 에리히 프롬도 소외 문제를 진지하게 다뤘습니다. 프롬은 (본지 기본입장처럼) 소련을 국가자본주의 사회로 보았고, 공산당들의 소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짜 마르크스주의로 규정하며 그것을 레닌·트로츠키의 마르크스주의와 대비시켰습니다. 프롬은 또한 주류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프롬의 마르크스주의와 소외론에는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인 계급계급투쟁의 역할이 누락돼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를 명시적으로 자처했음에도 프롬은 계급과 계급투쟁 대신에 개인주관성에 초점을 맞추느라 그만 노동계급이 객관적으로 직면하는 소외에 관해 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또한 그의 반핵·반전 정치는 좌파적 포퓰리즘 경향을 띠며 미국 민주당의 ‘진보파’ 정치인들과 동행하는 (불모의) 전략을 추구했습니다.

소외의 극복

이제 발제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뉴레프트가 등장해 소외에 대해 얘기하던 1960년대에 그런 영향을 경계한 공산당들은 소련 블록에 속한 사회에도 객관적인 노동 소외 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 등 공산당 철학자들은 소외라는 주제 자체를 기각했습니다. 소외론은 마르크스 젊은 시절의 헤겔주의 잔재에 불과하다며 말입니다.

그러나 소외의 효과와 그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보면, 소외의 객관적 현실을 부정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마르크스주의적 방법의 중요한 일부로서 소외론의 역할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소외론에 기초해야만 오늘날의 수많은 문제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소외에 대한 특수한 반응들로서 말입니다.

앞에서 저는 소비주의나 우울증 증가 같은 사례를 들었지만, 학교 폭력이나 무차별 흉기난동 범죄 등도 소외에 대한 특수한 반응들입니다. [소외 때문에 누구나 흉악 범죄자가 되지는 않는다. 특정 흉악 범죄자가 그렇게 되기까지 자란 환경과 경험, 실천 등으로 형성된 그의 심리를 살펴봐야 한다.]

이런 문제들을 설명할 때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소외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곧장 역사 전반에서 나타난 소외나 인간 일반의 소외에 기초한다면, 그런 논의는 추상적이 되거나 현상 묘사에 불과하기 십상입니다.

또한 소외 문제의 해결책을 내놓지 못합니다. 그 정치적 결론은 개혁주의적이거나, 아니면 라이프스타일 바꾸기처럼 도덕주의적이거나, 아니면 자기계발처럼 개인주의적이기 십상입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소외에 기초한다면 부차적으로 심리학, 역사학, 문학, 철학 등의 도움을 받아 소외론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소외에 대한 극도로 다양한 반응들 중 안타깝거나 불건전한 많은 것들이 사라지려면 노동의 소외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우리의 노동은 생명의 자유로운 발현이 되고 인생의 즐거움이”(마르크스) 돼야 합니다.

그러려면 노동계급이 기존의 자본주의 국가를 해체하고 생산 수단과 생산 방법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마르크스는 강조했습니다. 마르크스의 이 말로 제 발제의 결론을 대신하겠습니다.

[소외로 무력감을 느끼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그런 낮은 자신감과 자존감으로 소외 현실을 폐지할 수 있겠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현실의 노동운동은 통제 불능의 객관적 상황을 통제 가능한 객관적 상황으로 전면 변모케 할 능력은커녕 그걸 점진적으로 개선할 능력도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파업 참가 노동자 가운데 노동자들이 시스템 변혁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매우 극소수다. 좋은 발상이긴 해도 믿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사회를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은 더더욱 믿기지 않는다.

이런 상태는 노동쟁의가 개별 일터의 문제들에 국한될수록 강화된다.

그리고 대위기가 엄습해도 시스템을 붕괴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지배자들은 자기네의 지배가 아무리 모순돼 있어도 그 지배가 그냥 무너지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의 생각이 변화한다. 대규모 파업과 대규모 거리 시위를 경험하면 적어도 그 일부 참가자들은 노동자들이 실질적 변화를 추동하는 세력이 될 수 있다고 보게 된다.

트로츠키는 이런 동력을 이렇게 묘사했다. “대중이 혁명 안으로 빨려 들어올 때 미리 준비된 사회 재구성 계획을 갖고 들어오는 건 아니고 구체제를 견뎌 내기 힘들다는 첨예한 감정을 갖고 그러는 것이다. 계급의 길잡이층만이 정치적 기본입장을 갖고 있는데, 이조차 사태의 검증과 대중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혁명의 근본적인 정치과정은 계급이 사회의 위기에서 비롯한 문제들을 점차 파악하는 데 있다. 그것은 연이은 근사치 계산법에 따른 능동적 지향성인 것이다.”

물론 이 방향으로 대중이 학습하며 나아가는 것이 자동적이지는 않으므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혁명가들이 한 스텝 한 스텝마다 관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 발제의 범위를 넘는 얘기다.]

시청자 전화 발언

“병원에서는 환자가 물건처럼 취급됩니다”

저는 보건의료 노동자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만이 아니라 인간을 대상으로 노동하는 노동자들도 노동과정에서 소외돼 있습니다.

자본주의에서는 병원도 이윤추구만을 위해 돌아갑니다.

노동 생산성을 높이려고 노동을 잘개 쪼개는데, 그러면서 의료노동자 한 명이 환자 한 명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반적으로 파악하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관계맺는 과정은 완전히 실종됐습니다.

노동자 한 명이 몇십 명의 혈압만 재고, 다른 노동자 한 명은 혈당만 재고, 다른 한 명은 주사만 놓고, 한 명은 처방전만 받는 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는 보건의료 노동자들도 단순 작업만 반복하는 기계로 전락시킵니다.

그 과정에서 환자는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건처럼 취급되고 환자 역시 노동자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지 않고 상품 제공자로만 보게 됩니다.

그래서 낸 돈만큼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모욕을 주는 일도 비일비재 합니다.

저는 몇년 전에 엄청나게 분업화된 공장같은 병원에서 일했습니다.

정신적 활동 없이 단순 작업을 반복하다보니 내가 살아 있는게 아니라 죽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얼마 전 보건의료 노동자들이 이런 현실에 항의하며 파업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저는 현실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환경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이런 활동들이 진정으로 인간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연대 같이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단체의 활동이 소외를 극복하고, 근본적으로는 소외된 노동을 만드는 자본주의 자체를 없애 소외를 끝내는 데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에 대한 오해

저는 마르크스가 종교를 바라본 관점이 소외와 연관이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요, 이 말만큼 널리 오해되는 말도 없는 것 같습니다. 마치 마르크스가 종교를 백해무익한 마약에 비유하고 그저 근절시켜야 하는 것으로 말한 것처럼 여겨지죠.

하지만 마르크스 시대에 아편은 마약이 아니라 진통제였습니다. 마르크스 자신도 엉덩이의 종기 때문에 아편을 진통제로 복용한 적이 있지요. 그러니까 마르크스의 말은 “종교는 인민의 진통제”라는 뜻입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대목 바로 앞에서 마르크스가 한 말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자,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영혼 없는 세계의 영혼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진통제가 소외로 가득 찬 이 세계의 고통 자체를 없애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고통을 그대로 둔 채 그저 진통제를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전혀 해결책이 아닐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소외가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투쟁해야 하고, 그렇게 해서 결과적으로 ‘진통제’가 필요없는 사회가 돼야 종교가 사라질 것이라는 게 마르크스의 요지였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종교가 없어진다는 것은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요구하는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외가 없는 세상을 위해 싸워야 할 것이지, 종교 그 자체에 반대하는 게 마치 중요한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질문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실제로 여러 종교들의 역사를 보면, 전부 계급 사회가 등장한 이후에 생겨났고, 계급이 등장하면서 소외로 가득 차게 된 이 세상을 나름대로 설명하고 위안을 주고 또 합리화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계급 사회 이전에도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 같은 원시종교가 있었는데요, 이러한 원시종교들은 소외로 설명할 수 없는 걸까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혁명적 함의 때문에 소외론을 배격한 소련 옹호자들

발제자가 말했듯이 1960년대 뉴레프트는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면서,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을 폭넓게 인용했습니다.

그러면서 ‘사회주의’를 표방한 소련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여전히 소외돼 있다는 진실을 포착했죠.

다만 그들 중에는 스탈린주의를 버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 소외론의 진정한 출발점인 유물론적 분석까지 버린 사람들이 많았죠. 그래서 소외는 사회 편제가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개념이 아니라 주되게 심리 문제를 뜻하는 것이 됐습니다.

한편 발제자가 말했듯이, 스탈린주의자들은 소련에 노동의 소외가 없었다고 강변했습니다. 물론, 옛 소련 내부에는 시장 경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련 국가가 서방 국가들과 경쟁하며 서방 민간 자본가들처럼 자본을 축적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는 관료들이 노동계급을 착취하고 지배한 국가자본주의 사회였습니다.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했지만, 그 국가를 통제한 건 바로 관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련 노동자들도 서방 노동자처럼 자신의 노동생산물과 노동을 통제하지 못했고, 관료들이 노동 과정을 지배했습니다.

소련에서도 이렇게 소외가 만연하면서 여러 사회 문제가 일어났죠. 예컨대 심각한 대기오염 같은 환경 문제가 있었죠. 소련에서는 국내총생산 대비 이산화황 배출량이 미국의 2배가 넘었을 만큼 대기오염이 심각했습니다. 체르노빌 사고 같은 방사능 오염 문제도 있었죠. 자살률도 서방 못지않았습니다. 1984년 당시 인구 10만 명당 30명에 육박했을 만큼 소련의 자살률이 높았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을 보면, 소련을 변호한 사람들이 왜 소외론을 배격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특히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갖는 혁명적 함의를 염려했을 겁니다. 체제 내 개혁이나 개인들의 의식과 태도 변화로는 소외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아 사회의 주된 문제를 민주적으로 결정해야 노동자들이 노동의 주인이 될 수 있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은 소외를 철폐할 이해관계와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계급투쟁을 통해 소외를 극복할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내에서 소외를 극복할 수 있을까?

저는 흔히 자본주의 내에서 소외를 완화하거나 극복해 보려는 두 가지 노력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노동 과정에서 겪는 소외를 완화하려는 노력인데요. 세분화된 분업 때문에 노동이 단조롭고 지루하며, 힘들고 위험하고 노동자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컨대 스웨덴 자동차 기업 볼보는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겠다며 컨베이어 벨트를 없애고, 숙련 노동자 10명 가량의 팀을 꾸려 자동차 한 대를 처음부터 끝까지 자율적으로 만들어 내는 이른바 인간 중심 공정을 채택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일은 첫째, 노동자들이 다양한 제안을 해도 오로지 그것이 효율성을 높이는 경우에만, 즉 노동강도를 높이는 경우에만 채택됐습니다.

둘째, 볼보 모델도 현대 자본주의의 발달한 생산수단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첨단 장비를 끊임없이 도입해야 했고, 그 결과 이윤율 저하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적자를 보다가 몇 년 만에 컨베이어 벨트 공정으로 회귀했고 볼보는 포드자동차에 인수되면서 [노동자들이] 대량 해고됐습니다.

이는 소외된 노동이 특정한 노동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임금노동 자체가 소외된 노동입니다.

소외를 극복하려는 또 다른 노력은 노동 이외의 활동에서 위안을 찾는 것입니다. 발제자가 말했듯이 다양한 여가 활동을 하거나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는 것이 삶의 중심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약간의 위안을 줄 수는 있어도 진정한 탈출구가 되지는 못합니다.

첫째, 여가 활동을 하기 위해서도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합니다. 여가 활동도 시장의 지배를 받아 갈수록 산업화되고 획일화되며, 가족 관계는 사람들의 바람과 달리 갈수록 애정보다는 금전 관계에 의존하게 됩니다.

둘째, 노동 이외의 활동에서 위안을 찾는 것은 결국 노동자들이 개별 소비자로 원자화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개인 생활과 여가 활동을 계획하고 준비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를 개인적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노동자들은 자신을 집단의 일부로 보고 집단적 투쟁에 참여해야만 비로소 소외를 근절하는 과정의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습니다.


흉악 범죄와 소외

저는 최근에 일어난 흉악 범죄를 이해하는 데서 노동의 소외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의 소외 문제를 지적하는 게 흉악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면죄부를 주는 게 아닌가 하고 질문한 분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흉악 범죄가 매우 끔찍한 일이고 사람들이 여기서 느끼는 분노나 공포를 이해하면서 출발해야 합니다. 당연히 가해자는 적절한 처벌을 받고 피해자들은 구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반복되는 이유에 대해서 주류 언론과 정부는 그 근원을 감추려 합니다. 그리고 그 근원을 파악하는 것은 이런 범죄가 다시 재발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데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언론과 정부는 이런 범죄의 가해자들을 괴물처럼 취급합니다. 그러나 타고난 천사가 없듯이 타고난 악마도 없는 것이죠. 자신이 무언가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계속적으로 반복되면 사람들은 더 심각한 무기력과 불안감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쟁 때문에 열패감이나 시기심도 심각하게 느끼고 그러면서 어떤 사람들은 정신적 장애를 겪기도 합니다.

실제로 대다수의 연쇄살인범과 사형수들은 신체적·정서적 발달이 자리잡지 않은 시절에 이런 열패감 등을 많이 느끼는 경험을 한 경우가 많습니다. 학대나 결핍을 겪고 그 결과로 인간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는 경우들도 있고, 별다른 직업이 없는 사람들인 경우도 많죠.

그래서 적잖은 범죄의 가해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소외와 억압에 짓눌리고 망가진 사람이라는 점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때로 이는 자신보다 약한 상대한테 분풀이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만은 자기가 무언가를 통제한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죠.

그래서 한 경찰대 교수는 연쇄살인범의 심리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한 바 있습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완전히 외면당한 이들이 살인에 이르는 동안만큼은 몰입에서 오는 성취감과 피해자를 제압하는 데서 오는 우월감을 느끼게 된다.”

통제력을 잃은 한 개인이 그것을 회복하는 경험을 하기 위해 다른 개인을 괴롭히거나 죽인다는 것입니다. 정말 비극적이고 기괴한 일이죠. 우리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이런 괴물들을 만들어 내는 자본주의의 소외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흉악 범죄 문제에서도 적용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발제자의 정리

먼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로 일그러진 사람들의 의식이 과연 변화 가능할까?”라는 질문이 있었는데요.

소외라는 게 통제 불능의 객관적 상황이잖아요. 그렇다면 노동계급이 통제할 수 있는 객관적 상황이 된다면 그게 소외를 극복하기 시작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노동계급이 투쟁하고 그것이 전면화, 즉 계급의 일부만이 자신들의 이러저러한 특수한 요구를 가지고 싸우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급이 일반적으로, 전반적으로 싸워서 노동자 권력이라는 말이 허황한 공상이 아니라 현실 가능한 듯한 상황이 된다면 소외로 일그러진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하기 시작할 수 있겠죠.

그러나 물론 성공을 거두어야겠고 그래야만 그것이 지속성이 있겠죠. 그래서 노동자 투쟁이 클수록, 그리고 성공을 거둘수록 그걸 통해서 의식이 변화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생겨나게 되고, 그것이 나중에 결정적으로 사회 전체로 확대될 때 우리는 소외의 지양을 맛보기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다음에, “흉악 범죄의 문제를 소외로 설명하는 것이 면죄부를 주는 거 아니겠냐”는 걱정은 일리가 있다고 봐요.

여기서 핵심적인 논쟁이 네이처(nature, ‘천성’)냐 너처(nurture, ‘육성’)냐, 즉 [흉악 범죄는]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는 문제인데요. 다행히도 압도적으로 많은 범죄학자들이 후천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연쇄 살인마의 아들이나 딸이 커서 연쇄 살인마가 되기는커녕 아주 좋은 사람들이 되는 것을 소재 또는 주인공으로 삼는 영화나 드라마들도 있어요.

이렇듯 후천적 요인들이 [흉악 범죄자를] 만들어 낸다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 그렇게 사회가 그런 사람을 만들어 낸다면, “모든 사람이 범죄자, 특히 흉악 범죄자가 되지 않는데 그것은 어떻게 된 것이냐?”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바로 그 부분에서 범죄자 개개인들이 어떤 실천과 경험을 해 왔는지, 그래서 어떤 심리를 일궈 왔는지 하는 점들을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겠죠.

다 공통적인 것은, 아까 한 시청자 분이 전화 발언으로 지적했듯이 소외로 인해서 힘 없고 무기력하다고 느끼는 개인들이 흉기 난동을 부리는 등 강력 범죄를 통해서 자기가 사람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흉악 범죄, 특히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무차별 범죄가 증대하는 게 이런 소외와 관련이 있는 건데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범죄자 개개인들의 경험, 실천, 이것으로부터 형성되는 심리 등을 같이 봐야 한다는 거겠죠.

한 분이 전화 발언으로 종교에 대해서 얘기해 주신 것에 동의하고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은,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종교는 사람들의 [정신적] 타이레놀이다”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어쨌든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도 종교가 있었고요. 원시 사회에도 종교가 있었어요. 그렇다면 그것을 소외로 설명할 수 있냐는 질문을 하신 것 같은데요. 이 경우에는 우리가 자본주의적 소외와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의 소외를 구분할 필요가 있어요.

마치 제국주의도 자본주의 이전의, 가령 4~5천 년 전 아카드 제국의 제국주의, 이집트 왕국의 제국주의, 바빌로니아 제국의 제국주의 같은 식으로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자본주의적인 제국주의와는 다르듯이, 소외도 자본주의 이전의 소외와 자본주의적 소외는 다릅니다.

자본주의적 소외는 엄청난 규모와 영향력이 있고, 무엇보다도 원인이 임금 노동에서 비롯한 노동의 소외에 있다는 것,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전 사회에서는 없었던 매우 특수한 양상들이 나타난다는 것이 차이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자본주의 이전의 소외는 인간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의 유한함, 제약성이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는 그것이 자본주의적이고, 근본 원인이 노동, 임금 노동의 소외에 있는 것으로 바뀌고, 따라서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 나타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자본주의를 영원히 끝장내고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든다면 종교는 서서히 필요 없어질 것입니다. 종교를 억지로 폐지하려는 무모하고 멍청한 노력을 하기보다는 말이죠.

“소외가 차별과 비슷한 말로 쓰일 때가 있는 것 같은데 이렇게 느슨하게 쓰면 어떤 문제가 있을까?”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제가 발제에서 말했듯이 소외라는 말이 일상 어법에서 배제, 따돌림 같은 말로 쓰이면서 소외와 차별이 서로 구별이 안 되는 것처럼 돼 있는데요.

사실 소외라는 말처럼 차별이란 말도 객관적인 현상을 뜻하는 거고요, 자본주의의 체계적인 차별이고 객관적인 거예요. 개인이 자신은 차별받고 있지 않다고 여기거나 여성이 아니라 남자들이 차별받고 있는 거라는 따위의 주장과는 관계없이 차별은 시스템적으로, 사회적으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차별이라는 말을 소외와 비슷하게 쓴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따돌림, 배제 같이 개인(들)이 다른 개인(들)을 따돌리거나 배제하는 것인 양 말하는 것인데요. 예를 들면, “여성 혐오”라는 말과 비슷해요. “여성 혐오”라는 말도 전혀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고 어떤 사회 현상에 대한 유의미한 분석을 위한 용어가 아닙니다. 상당히 개인주의적인 용어이고요. 그래서 도덕주의적인 결론으로 나아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일부 남성들에 대해서 완전히 도덕주의적으로 배제하고 캔슬하는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가 소외나 차별을 객관적인 현실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를 변혁시키는 전략과 소외와 차별에 맞서 싸우는 투쟁을 서로 결합시키는 데 반해서,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쳇바퀴 돌 듯] 맴돌고 사기 저하되죠.

한 분이 “소련이나 북한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이 노동자 국가의 생존을 위한 필요 때문이었으므로 노동의 소외가 아니었다”는 주장을 소개하고 이를 비판해 주셨는데요.

소련이나 북한, 중국 같은 나라가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 변형태인 국가자본주의라는 것은 〈노동자 연대〉 신문이 누차 말한 것인데요. 그런 분석이 없다고 하더라도 옛 소련이나 지금의 북한과 같은 곳에서 노동자들은 임금 노동자들입니다. 그들은 생산 방식을 통제하지도 못하고, 자기들이 만든 생산물을 통제하지도 못하고, 생산 수단에 대한 통제력이 없어요.

옛 소련의 노동자들이 핵발전소를 만들고 싶어해서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같은 역사적인 대형 사건이 일어났겠습니까? 지금 북한의 노동자들이 핵무기를 만들고 싶어서 만들겠어요? 이 제국주의 체제가 가하는 압력에 대해서, 그리고 주변의 다른 열강들도 다 그런 방식으로 군비 축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지배 관료가 나름대로 핵으로써 맞서겠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강요되고 있는 거죠.

그래서 그런 사회들의 노동자들도 생산물, 생산 방식, 생산 수단 모두에 대한 통제력이 없잖아요. 이게 바로 노동의 소외 아닙니까?

사적 소유가 없다고 해도 국가가 바로 그 사용자 노릇을 하고 임금 노동을 착취하는 집단적, 간접적 착취자 구실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계급이 있다는 것이죠.

“자본가들도 이 상황을 어쩌지 못하는데 그들도 소외돼 있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이 있었는데요. 지금의 기후 재난, 기후 혼돈, 그리고 핵전쟁의 위험으로 가고 있는 세계를 보면 자본가들도 소외돼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들은 노동의 소외를 일으키고 있고, 그로부터 혜택을 입고 있고, 거기에 이해관계와 기득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그 시스템이나 방식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들도 소외돼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맞기는 하지만 매우 추상적으로만 맞는 것이죠. 무엇보다 [그런 진술은] “도대체 그래서 어쩌라는 말이냐”라는 구체적 진실이나 구체적인 해결 방법에 대해서 아무것도 전혀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마르크스는 헤겔을 이어받아서 일반적인 소외에 대해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에 역사적 구체성, 역사적 특수성을 부여해서 자본주의하에서 소외된 노동이라는 걸로 매우 구체화시켰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현상들, 170여 년 동안 발생한 현상들, 또한 앞으로 수십 년 동안(그 이상은 인류가 기후 재난 때문에 생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생겨날 여러 문제들을 설명할 수 있는 도구와 이론적 무기를 우리에게 제공했습니다.

우리는 그 무기를 가지고 자본주의 시스템과 소외된 노동을 끝장내야만 지금의 불행과 참담한 현실들을 끝장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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