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영화 〈가여운 것들〉의 원작 소설 《가여운 것들》:
프랑켄슈타인의 급진적 재구성
〈노동자 연대〉 구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2023)와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소설(1992)은 많이 다르다.
당연한 얘기지만 매체의 특성이 다르다.
대체로 글이 훨씬 더 복잡한 생각을 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영상보다 오히려 글이 더 잘 암시할 수 있는 뉘앙스도 있다. 글로 하는 예술 중에서도 소설이 간단치 않은 인물의 내면을 가장 잘 표현하는 편이다.
자본의 규모 역시 너무 다른데, (메이저 영화처럼)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일수록 타협이 더 많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계관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소설 《가여운 것들》의 작가 앨러스데어 그레이(1934~2019)는 다재다능한 사회주의자였다.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하다는 자신의 신념에 평생 헌신했다.
앨러스데어는 스코틀랜드와 글래스고를 대표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앨러스데어는 《가여운 것들》의 초판 표지를 비롯해 자신의 책들에 “더 나은 나라의 건국 초기에 살고 있는 것처럼 일하라”는 표어를 넣곤 했는데 이는 복지국가의 침식을 조롱하고 일찍부터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지지했던 자신의 정치를 투영한 것이다.
2014년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국제예술축제에서 이스라엘 국비 지원을 받는 공연들을 쫓아내기 위해 예술가들의 보이콧 운동이 시작되자, 앨러스데어는 즉각 이를 지지하는 공개서한을 냈다.
반면, 역시 스코틀랜드 출신인 조앤 K 롤링(《해리 포터》의 작가)은 이스라엘에 “차별적”이라며 보이콧 운동에 반대하는 공개서한을 냈다.
글래스고 전역에 앨러스데어가 그린 벽화들이 있다. 그는 지하철역의 벽화와 교회, 커뮤니티 센터의 천장화도 그렸다.
앨러스데어는 화가, 벽화가, 교사로서 생계를 꾸리며 연극 대본, 라디오 드라마 대본, 소설, 에세이, 스코틀랜드 독립을 지지하는 정치 팸플릿과 논설 등 매우 다양한 글들을 썼다.
문학과 미술을 혼합하는 그의 솜씨를 《가여운 것들》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책 표지와 내부 삽화 모두 직접 그렸다.
소설 《가여운 것들》은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물론이고 안데르센, 에드거 앨런 포, 아서 코넌 도일의 작품들에서 영감과 도움을 얻었다
급진적 괴물의 탄생
《프랑켄슈타인》은 1818년에 익명으로 출판됐지만, 진짜 작가는 20세의 여성 메리 셸리였다.
메리 셸리와 그 주변 사람들의 이름과 인생이 《가여운 것들》에 농담처럼 진담처럼 들어가 있다.
아나키즘의 시조 격인 아버지 윌리엄 고드윈, 페미니즘의 선구자인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시인이며 정치적 동지·연인·남편인 퍼시 비시 셸리, 역시 시인이며 친구인 바이런, 그리고 절친 백스터가 그들이다.
그중 퍼시 비시 셸리는 불꽃처럼 짧은 생을 노동계급과 함께한 혁명가였다. 그의 혁명적 시는 차티스트 운동가들의 성경과 같았고, 1989년 중국 톈안먼 광장, 2011년 이집트 혁명 때 타흐리르 광장에서도 낭독됐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만들어 낸 대학생(당시에는 엘리트 지식인)의 이름이고 괴물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저 “괴물”, “그것(it)”, “피조물”이라 불린다.
《프랑켄슈타인》을 지나치게 메리 셸리의 가족사로만 연결 지어 보는 오해가 흔한데, 이런 관점은 《프랑켄슈타인》을 재구성한 소설 《가여운 것들》이나 영화 〈가여운 것들〉의 감상에까지 따라붙는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방식은 메리와 퍼시 등이 모두 매우 정치적인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한다. 따라서 부당하기도 하다.
메리는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영감을 받은 영국의 급진주의자 서클에 속해 있었고 당시 지배계급은 파리의 혁명적 대중과 반항하는 산업 노동자들을 모두 괴물에 비유했다.
피조물에게 파괴당하는 창조자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는 (마르크스의 묘사대로) “마치 마법사가 자신의 주문으로 만들어 낸 저승의 힘을 더는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을 파괴할 힘이 있는 노동자 계급을 만들어 낸 자본가 계급에 대한 통렬한 은유였다.
후기 빅토리아 시대 홀로코스트
소설 《가여운 것들》은 후기 빅토리아 시대부터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듬해까지 주인공 벨라의 일생 전체를 다룬다.
후기 빅토리아 시대는 대영제국의 최전성기였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는 세계의 4분의 1을 장악했고 세계 인구의 5분의 1을 지배했다.
그리고 재물·자원·식량·문화·유물·사람을 훔쳐서 막강한 힘을 키웠다. 아프리카인 350만 명을 아메리카에 팔아 치워 번 돈은 영국 국가와 기업의 부를 이뤘다.
대영제국이 식민지의 식량을 “자유무역”(사실상 강탈)하는 동안 아일랜드·이집트·인도에서 수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그래서 작고한 미국 마르크스주의자 마이크 데이비스의 명저 《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의 원 제목은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홀로코스트들’(Late Victorian Holocausts)이다. 홀로코스트는 나치에 앞서 영국이 먼저 자행한 것이었다.
반면, 제국의 부르주아지와 중간계급의 삶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안락했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빚은 신세계를 기적이라고 예찬했고 막힘없는 진보를 통해 인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날이 머지않다고 낙관했다.
이러한 산업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역사에 대해 《가여운 것들》은 풍부하면서도 정교한 농담·조롱·풍자를 한다. 사람들이 실제로 겪은 고통과 슬픔에도 맞닿아 있다.
벨라가 이집트에 도착한 때는 영국이 이집트를 침공해 지배한 지 1년쯤 됐을 때다. 벨라는 유럽·러시아·아프리카를 거치는 여행 내내 영국 식민주의자와 논쟁하고 그러면서 사회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2개의 세계 전쟁
소설에는 영화와 달리 결말을 뒤집는 반전이 여럿 있다.
그중 하나는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벨라의 자부심과 희망이다. 그런데 그 날짜가 문제적이다. “1914년 8월 1일”이기 때문이다. 3일 뒤면 대영제국 지배자들은 제1차세계대전 참전을 선언하고 벨라가 신뢰하는 독일 사회민주당은 제국의회에서 전쟁 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질 것이다. 유럽 최대의 전쟁 반대 세력이 전쟁 지지로 돌아선 것이다.
벨라는 전쟁을 지지한 페이비언주의와 결별하고 존 맥클린을 지지한다. 존 맥클린(1879~1923)은 스코틀랜드 역사상 가장 헌신적인 반제국주의자이자 혁명적 사회주의자였다.
하나의 제국주의 전쟁이라 할 만한 2개의 세계 전쟁이 끝나자, 벨라는 1945년의 극적인 변화들을 희망으로 간직하고자 한다. 마치 켄 로치의 영화 〈1945년의 시대정신〉(2013)의 출연자 같기도 하다.
물론 이런 식의 역사적 의미들을 다 알아차려야지 즐길 수 있는 소설은 결코 아니다.
서문, 일기, 편지, 기사, 유서, 주석 등 다양한 문서들, 서로 다른 관점들이 교차하고 연결되면서 마침내 전체가 보이는 독특한 과정이 매우 흥미진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