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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세계대전은 어떻게 끝날 수 있었는가

제1차세계대전이 오판과 오해의 연쇄작용 때문에 우발적으로 일어났다는 주장이 있다.

영국의 군사사학자 존 키건은 《1차세계대전사》(청어람미디어, 2016)에서 제1차세계대전은 ‘비극적이고 불필요한 전쟁’이었다면서, ‘신중함이나 공동의 선의가 제 목소리를 냈더라면 대전의 발발로 이어졌던 사건들의 사슬을 끓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1914년 여름의 유럽은 평화롭게 풍요를 누렸고, 그 풍요는 국제적 교류와 협력에 매우 크게 의존했기에 전면전이 불가능하다는 믿음은 가장 진부한 상식이었다고도 얘기한다.

제1차세계대전 전에도 전쟁이 일어나기 어렵다는 주장은 있었다. 1910년 영국의 노먼 에인절은 《거대한 환상》이라는 책을 썼다. 여기서 그는 당시 국가 간 경제적 상호 의존성이 커져서 전쟁이 발발하면 국제 신용이 붕괴할 것이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지 않거나 벌어진다 해도 신속히 종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강대국들이 참여한 헤이그 세계 평화회의도 평화에 대한 환상을 심는 데 일조했다. 이 회의는 가중되는 군비경쟁의 압력을 완화하고자 러시아 황제 차르의 제안으로 2회(1899년과 1907년)에 걸쳐 열렸다. 서로 경쟁하던 국가들은 ‘폭발물 투하 금지 선언’, ‘독가스 사용 금지 선언’ 등의 협약을 이 회의에서 맺었다. 그러나 지켜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유럽 왕가들은 혈연관계로 묶여 있었다. 독일 빌헬름 2세와 영국 조지 5세는 영국 여왕의 손자들로 사촌지간이었다.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아내 알렉산드리아는 영국 여왕의 손녀였고, 또 다른 손녀 에나는 스페인 왕비였다.

이 모든 근거들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터졌다. 1000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 프랑스는 전투 연령의 남성 5명 중 1명을 잃었다. 독일은 8명 중 1명을 잃었다. 제1차세계대전에서 가장 큰 전투 중 하나였던 베르됭 전투에서는 참가한 200만 명 중 절반이 희생됐다. 이렇게 참혹한 결과를 가져온 전쟁의 원인을 ‘의사소통 부족’이나 ‘상호 불신’으로 설명하는 것은 가당찮아 보인다.

전쟁의 원인

당시 주요 유럽 국가들 사이의 경제적 경쟁과 지정학적 경쟁의 격화를 빼놓고 전쟁 원인을 논하기는 불가능하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전부터 왕정들 사이에 영토 경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이 경쟁은 질적으로 달라졌다.

19세기 중반 ‘전쟁의 산업화’라고 불린 일이 벌어졌다. 철도와 증기선의 발명으로 기동성이 대폭 확대됐고 무기가 대량 생산됐다. 국가의 군사력은 이제 산업화 수준과 직결됐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는 현대적 무장력의 기반을 강화하려고 산업자본주의의 성장을 촉진했다. 산업자본주의의 성장은 열강 사이의 경쟁을 더욱 격화시켰다.

특히 독일이 영국 공업과 해군력의 우위를 위협하자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1890년 영국의 선철 생산은 800만 톤이었고 독일은 410만 톤이었다. 하지만 1914년에는 영국의 생산량은 1100만 톤이었고 독일은 1470만 톤으로, 독일이 영국을 추월했다. 영국의 강철 생산은 1890년 360만 톤에서 1914년 650만 톤으로 증가했는데, 독일은 같은 기간 230만 톤에서 1400만 톤으로 더 크게 증가했다. 영국이 세계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80년에 23퍼센트였는데, 1913년에는 17퍼센트를 차지했다. 독일은 같은 해 13퍼센트를 차지했다.

독일은 자신이 세계 분할 경쟁에서 뒤처져 수출 시장 확보와 원료 수급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독일 지배자들은 두 가지 대책 사이에서 분열했다. 하나는 자기 나름의 식민 제국을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해군력 강화를 동반해, 영국이나 프랑스와의 충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유럽에서 자신의 세력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는 러시아나 프랑스와의 충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독일이 두 가지 대책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동안 영국·프랑스·러시아는 독일 견제를 위해 연합했다. 세 나라의 관계가 이전부터 평화로웠던 것은 아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 쟁탈을 위해 충돌한 사이였고, 영국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도왔다. 독일의 존재가 이들을 연합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 글에서 유럽 국가·민족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 관계와 갈등을 다 다루기는 어렵다. 하지만 위에서 얘기한 대로 자본주의, 특히 제국주의 국가들 간 경쟁 격화가 제1차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충돌들을 여기저기서 낳고 있었다.

그 충돌의 하나가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모로코 위기’다. 당시 아프리카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후발 주자인 독일이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과정에서 모로코를 차지하고 있던 프랑스와 충돌한 것이 ‘모로코 위기’이다. 1911년 ‘2차 모로코 위기’ 때는 모로코의 통치자 술탄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자 프랑스와 독일이 각기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보내 충돌 직전까지 갔다. ‘모로코 위기’는 대규모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충돌 가능성을 보여 줬다.

또 다른 충돌은 역시 두 번에 걸쳐 벌어진 발칸 전쟁이다. 당시 발칸 지역은 이곳을 장악했던 오스만제국이 약화하면서 생겨난 민족국가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곳이다. 주변 제국주의 국가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개입하면서, 지역 내의 국지전이 강대국들 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언제든 있었다.

이렇게 제국주의적 경쟁과 갈등이 누적된 가운데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이 벌어졌다. 따라서 사라예보 사건이 제1차세계대전의 결정적 원인이라는 주장은 문제가 있다. 사라예보 사건은 제1차세계대전의 작은 단초에 지나지 않았다. 진정한 원인은 제국주의 경쟁에 있다.

전쟁의 현실

전쟁 초기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환호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최근의 연구 결과를 보면, 노동자들, 특히 조직 노동계급은 그렇게 열광하지는 않은 듯하다.)

예컨대 프랑스에서는 열차를 타고 전선으로 떠나는 군대를 배웅하려고 역과 거리에 모인 군중이 “프랑스 만세”, “군대 만세”를 외쳤다.

트로츠키는 갑자기 애국주의에 열광하게 된 대중의 심리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많은 사람들은 날마다 아무 희망도 없는 무미건조한 삶을 산다. 그런 상황에서 비상 동원령은 마치 성공을 보증하는 약속처럼 그들의 삶으로 파고든다. 낯익은 것들, 오랜 증오의 대상들은 무너지고 그 대신 새롭고 색다른 것들이 나타난다. 놀라운 변화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미래는 더 나아질까 아니면 더 나빠질까? 물론 더 나아지겠지. 설마 전쟁 전의 상황보다 ... 더 나쁜 상황이 있으려고? 전쟁은 모든 사람들에게 두루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 지금껏 억압당하고 인생에 배신당해 온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이 부자들이나 권력자들과 대등한 위치에 서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열광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런 감정을 지탱할 물질적 기반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전쟁이 빨리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병사들은 크리스마스 때쯤이면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914년 10월 말쯤부터 전쟁은 고착돼 갔고 그 후 양쪽 군대는 4년 즉, 1460일 동안 구덩이(참호) 안에 머물렀다.

독일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유럽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긴 전선이 형성됐다. 1914년 8월부터 종전까지 삽과 가래가 1000만 자루 이상 보급됐다. 연합군은 약 2만 4000킬로미터의 참호를 구축했다. 참호 안의 상황은 굉장히 열악했다.

영국군이 직면한 ‘가장 막강한 적’은 물과 진흙이었다. 병사들은 허리, 심지어 겨드랑이까지 차오르는 물속에서 며칠씩 근무를 서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진흙 속에서 탈진과 익사로 잃는 병력도 많았다. 영국군 7만 4711명이 참호발(열악한 참호 환경 때문에 감염돼 발을 절단할 수도 있는 병)이나 동상으로 병원에 수용됐다.

반면 장교 숙소는 사병들의 그것과 완전히 달랐다. 나무 구슬로 장식돼 있거나 바닥에는 융단이 깔려 있기도 했다.

1915~1918년 사이에 독가스 약 13만 톤이 살포됐고 병사 8만여 명이 독가스에 감염됐다. 겨자가스로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병사들을 보며 한 간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것이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입심 좋게 떠벌리는 사람들과, 전쟁이 얼마를 더 끌든지 또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웅변가들이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겨자가스에 노출된 병사들을 위문하러 왔으면 좋겠다. 그들은 계속해서 숨을 쉬기 위해 분투한다. 목소리는 기어들어 가고, 말을 하면 목구멍이 막혀서 질식하리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러시아 병사와 독일 병사들의 친교 행위

군대 반란

무의미하게 목숨을 버리는 것에 반대해 병사들은 적국 병사들과 우애를 다지기도 했다. 전선에서 형제애가 발휘된 가장 유명한 사례는 1914년 크리스마스였다. 그때 전선 전체에서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참호를 이탈해 무인지대에서 만났다. 담배·술·음식·사진·주소를 교환했다. 어떤 부대는 축구 시합까지 했다.

전쟁에 대한 혐오와 반대 정서는 소극적 저항을 넘어 반란으로 나아가는 배경이 됐다.

1918년 칼레에 머물던 영국군 51하일랜드 사단은 7월 21~26일 폭동을 일으켰다. 많은 헌병이 바다에 던져졌다. 12월 9일과 10일에는 왕립포병대의 몇 대대가 연대본부 몇 곳을 불태워 버렸다. 12월 21~27일 탱크부대 몇 개가 파업에 돌입했다. 1919년 1월 칼레 기지에서 또 한 차례의 대규모 파업이 있었다.

1917년 이탈리아에서 병사 5만 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1917년 4월 프랑스군 절반에 해당하는 68개 사단이 전선으로 돌아가길 거부했다.

전쟁 후반 독일에서는 다수 청년들이 후방의 정치적·경제적 상황 때문에 급진화된 채 전복적 사상과 문건을 들고 군에 입대했다.

사병들의 반란과 저항은 전쟁이 주는 고통에 항의하거나 전쟁 자체에 반대해 후방에서 일어난 투쟁과 연관이 있었다.

영국의 여성 우편 노동자들 남성들이 전쟁에 끌려가자 그 빈자리를 여성들이 대체하며 노동자가 됐다 ⓒThe British Postal Museum & Arch

전쟁이 낳은 변화

후방에서 일어난 투쟁은 전쟁 전의 계급세력 균형, 전쟁이 가져온 노동계급의 변화, 주체적 요소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

전쟁 전 프랑스·이탈리아·독일·오스트리아에서는 집중된 노동계급의 양적 성장과 전투적인 노동자 투쟁들이 벌어지면서 노동계급 내에 투사들이 형성돼 있었다. 또 한편에서는 노동조합 상근간부층과 그에 기반을 둔 개혁주의 정당들이 있었다.

이와 함께 전쟁과 함께 벌어진 변화가 노동자 투쟁에 영향을 미쳤다.

첫째, 전쟁 규모가 커서 노동계급 구성에 큰 변화가 생겼다. 많은 노동자가 전선으로 동원됐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성인 남성 80퍼센트가 징집됐다.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는 75퍼센트가 징집됐다. 이탈리아에서는 575만 명이 동원됐다. 그들의 빈자리는 많은 여성과 젊은이들로 채워졌다. 1917년 이탈리아에서 여성들은 군수품 노동자의 70퍼센트를 차지했다. 1918년에 프랑스에서는 37퍼센트, 독일에서는 55퍼센트를 차지했다.

새로이 노동자가 된 여성들은 거리 시위와 파업에 참가하게 됐다. 그들은 징집의 위협을 당하지 않았고 전통적인 노동조합의 규범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초심자의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었다. 이것과 기존 활동가들이 만나면서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경우들이 생겨났다.

전쟁 때문에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은 굉장히 나빠졌다. 1917년 겨울 독일에서는 75만 명이 굶어 죽었다. 여성 노동자들의 한 달 임금은 1913년 128마르크에서 1918년 30마르크로 떨어졌다. 프랑스의 실질임금은 전쟁 동안 20퍼센트까지 떨어졌다. 1918년 이탈리아에서는 물가가 400퍼센트 오른 반면, 임금은 그 절반밖에 오르지 않았다.

모든 나라들에서 노동시간이 적어도 11시간은 늘었다. 이탈리아 토리노의 피아트 노동자들의 주당 노동시간은 75시간이었고, 독일 베를린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70시간이 넘었다.

이런 상황은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는 객관적 조건이 됐다.

둘째, 전쟁이 터진 이후 정치적 권리가 제약되고 탄압이 강화됐다는 점도 노동자 투쟁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에서는 의회가 1914년에는 아예 열리지 않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는 1917년 5월까지도 의회가 열리지 않았다. 러시아의 의회 두마도 열리지 않았다. 두마를 열고 노동자 의원들을 탄압하지 말라는 것은 러시아 노동자들의 투쟁 요구였다.

실질적 권력은 군이 갖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황제에게 충성하는 25개 구 사령관이 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파업 사업장에는 군의 직접적인 통제가 시행됐다. 이런 조건은 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를 위한 투쟁이 정치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셋째, 개혁주의 정당과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의 대응이 미친 영향이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개혁주의 정당은 계급을 뛰어넘는 동맹을 추구했고 파업 금지 조처에 찬성했다. 1914년 8월 2일 독일에서 노동조합은 파업 금지를 선언했고, 1916년 사회민주당은 17~60세 인구를 강제로 노동하게 하는 법에 찬성했다. 이들은 노동자들에게 조국 방위를 위해 투쟁을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이 조건들이 각 나라의 투쟁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원칙 있게 전쟁을 반대한 독일 혁명가 카를 리프크네히트

계급투쟁

1916년 프랑스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임금, 노동시간, 감독자의 괴롭힘 등 경제적 요구를 내걸고 투쟁에 나섰다. 1917년 봄에는 여성 재봉사들이 파업을 11일 동안 벌여 토요일 반나절 쉬는 것을 얻어 냈다. 이 파업은 슈망 데 담에서 반란을 일으킨 부대에 알려졌고, 한 병사는 이렇게 집에 편지를 보냈다. “우리도 여성 노동자들처럼 하고 있다.”

노동자 20만 명이 반전 노조 활동가를 강제로 전선에 보내는 조처에 항의해 파업을 벌여 막아 냈다.

1918년에는 이전에 전쟁을 환호하던 장소였던 기차역에서 전쟁 중단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는 확산됐지만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독일의 공세가 진행될 때 파업하는 것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릴 것’이라고 노동자들을 위협하고 투쟁의 힘을 뺐다. 그 결과, 투쟁은 더 전진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투쟁은 경제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의 결합, 새로 조직된 노동자들과 기존 활동가들의 결합을 보여 줬다. 그러나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의 부정적 영향력도 보여 줬다.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오스트리아 빈에서 금속 노동자 4만 2000명이 파업을 벌여 여러 요구를 쟁취했다. 직장위원들이 음식물 통제와 배분을 맡았고, 검열이 완화됐으며 공개모임들이 합법화됐다.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빈 노동자들에게는 “러시아어로 말하라”가 인기 있는 구호였다. 평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확산됐는데 1918년 2월에는 노동자 100만 명이 일손을 놓았다.

어느 평론가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공장에서 파업하는 사람들은 모두 전쟁을 즉시 끝내야 한다고 염원했다. 모두 제국주의자들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러시아 혁명에 강요한 요구들에 분개했다.”

하지만 사회민주당이 투쟁을 주도한 노동자위원회를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정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요구들로 투쟁을 제한하려고 노력했고 투쟁을 끝내려 했다. 반발이 있었지만 투쟁이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을 넘어서 더 전진하지는 못했다.

독일에서는 1915년에 파업이 141건 일어나고 1만 3000명이 참가했다. 그전에 견줘 투쟁이 주춤한 것이다. 하지만 1916년에 파업 건수가 70퍼센트 증가하고 참가 인원이 10배로 증가했다. 초기에는 여성들의 식량 요구 시위가 주를 이뤘다. 투쟁은 곧 카를 리프크네히트 같은 혁명적 좌파가 주도하는 반전 시위로 발전했고 이 때문에 리프크네히트는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베를린에서는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정치파업이 벌어지기도 했다.

1916년 겨울을 거치며 경제적·정치적 요구를 내세운 투쟁이 많이 벌어졌고 급기야 1918년 1월에는 혁명적 상황으로 발전했다. 노동조합 활동가와 전투적 직장위원들이 파업과 투쟁을 이끄는 데서 큰 구실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정치적 약점도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동료인 레오 요기헤스가 지적한 대로 그들은 혁명적 에너지를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파업을 넘어서 국가권력에 도전해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됐지만,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이 공백은 사회민주당이나 독립사회민주당이 채웠다. 두 정당은 파업을 자제시키고 국가와의 타협과 중재를 이끌어 내려 했고, 투쟁은 이 제약을 넘어 전진하지 못했다.

물론 독일 노동자들의 투쟁이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독일에서 결정적인 순간은 1918년 11월에 찾아왔다. 완패 행진을 계속하게 되면서 독일 최고사령부는 함대에 영국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함대 수병들은 쓸데없이 목숨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키일 군항의 수병들은 무장한 채 파업 중인 부두 노동자들과 함께 거리행진을 했고 진압군의 무장을 해제했으며 병사평의회를 세웠다. 수병 반란은 독일 전체에서 혁명의 불꽃을 지핀 불씨가 됐다. 혁명이 확산돼 노동자평의회가 세워졌고 독일 황제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혁명에 이은 독일 혁명으로 제1차세계대전은 끝나게 된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왼쪽 팻말) 독일 해군 병사들이 일으킨 반란은 독일 전역으로 번져 제1차세계대전을 끝내고 혁명으로 이어졌다

러시아 혁명

전쟁 종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 혁명을 살펴보자. 혁명적 1912~1914년은 러시아에서 거대한 혁명적 고양이 새롭게 일어나던 시기였다. 1913년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 수는 적게 잡아도 150만 명이나 됐고, 1914년에는 200여만 명으로 증가해 1905년 혁명 때 수준에 근접했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됐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이런 투쟁의 힘과 경험을 갖고 전쟁을 맞이했다.

전쟁 초기 러시아 노동운동이 잠시 혼란에 빠진 건 사실이다. 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약 1000명이 체포돼 도시 밖으로 추방됐다.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약 40퍼센트가 징집되면서 그 자리를 신참들이 채웠다.

하지만 투쟁이 주춤하는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1915~1916년에 파업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경제적 요구뿐 아니라 정치적 요구를 내건 파업과 투쟁이 늘었다. 여기서 볼셰비키가 주요한 구실을 했다. 거듭된 체포와 비밀경찰의 조직 파괴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보르그 노동자 지구를 중심으로 군대와 지방으로 신문을 배포하고 조직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이뤄졌다. 그리고 볼셰비키는 경제적 투쟁뿐 아니라 혁명적 패전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즉, 조국 방위가 아니라 자국 지배계급의 타도를 위해 계급투쟁 강화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이것은 1917년 혁명으로 가는 가교 구실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으로 위기가 날로 심해지면서 지배자들의 분열도 극심해졌다. 차르 체제의 위기는 위로부터 반동적으로 해결되느냐 아래로부터의 투쟁으로 해결되느냐의 기로에 서게 됐다. 마침내 1917년 2월 러시아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이 먼저 투쟁에 나섰고, 이 투쟁을 시작으로 군대 반란과 노동자 투쟁이 확대되면서 혁명이 일어나 차르를 타도했다.

레닌은 2월 혁명 이후 귀국해 ‘4월 테제’를 발표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로 대표되는 4월 테제의 함의는 혁명적 패전주의를 일관되게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당시 2월 혁명으로 등장한 임시정부는 전쟁을 계속하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혁명적 방위주의’를 주장했다.

혁명적 방위주의에 반대하며 레닌은 이렇게 주장했다. “2월 혁명은 제국주의 전쟁이 내전으로 전환되는 첫걸음이었다. 이 혁명은 전쟁의 종결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전쟁을 확실히 끝장내려면 둘째 걸음, 즉 국가권력이 노동계급에게 이양돼야 한다.

“이것은 세계 수준의 돌파구, 자본주의 이해관계라는 전선을 파열시키는 돌파구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오직 이 전선을 돌파해야만 프롤레타리아는 인류를 전쟁의 공포에서 구하고 인류에게 평화의 축복을 선사할 수 있다.”

실제 1917년 10월 혁명에서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실질적인 조처들이 취해지고 혁명이 확산되면서 전쟁에 참여한 제국들이 몰락했다.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에서 말이다. 그리고 제1차세계대전은 끝났다.

제2인터내셔널의 논쟁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전쟁 때문에 위기와 투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만 유일하게 전쟁과 고통의 원흉을 타도하고 인류를 진정한 평화로 이끌 수 있는 시작인 노동자 권력이 수립됐다. 이런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를 이해하려면, 당시 국제 사회주의 정당들의 연맹체인 제2인터내셔널 내의 논쟁을 알아야 한다.

1914년 8월 4일 독일 제국의회에서 사회민주당 의원들은 전쟁 공채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왜냐하면 제2인터내셔널의 공식 입장은 일관되게 전쟁 반대였기 때문이다.

1907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대회는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채택했다. “전쟁이 임박하면 각국 노동계급과 그들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은 국제사회주의[제2인터내셔널] 사무국의 굳건한 지원을 받아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전쟁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한다. 그럼에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전쟁의 신속한 종결을 위해 개입해야 하고 전쟁으로 말미암은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이용해 대중을 분기시켜서 자본가계급 지배의 철폐를 앞당기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한다.”

제2인터내셔널은 1912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협의회에서도 비슷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하지만 이 입장을 지킨 것은 러시아 볼셰비키와 소규모 사회주의자들밖에 없었다.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전쟁에 찬성하는 투표가 권력에 가까이 다가가는 수단이라고 정당화했다. 특히 만장일치 투표가 당을 훌륭하고 세련되고 능력 있게 보이게 할 것이라고 희망했다. 이것은 독일 사회민주당이 가진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태도, 즉 국가를 분쇄하지 않고 선거를 통해 장악해 활용할 수 있다는 생각과 실천의 연장이었다. 전쟁은 사회민주당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치적 문제점을 밝히 드러냈다.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 카를 카우츠키는, 전쟁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올바른 태도는 어느 나라가 전쟁을 유발했고 반대로 어느 나라가 희생자인지 판단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카우츠키는 누구나 자신의 조국을 지킬 권리와 의무가 있고, 진정한 국제주의는 자신의 나라와 교전 중인 나라를 포함해 모든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이런 권리가 인정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레닌은 군사 전략가 클우제비츠의 말, “전쟁은 단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를 인용해 카우츠키를 비판했다. 카우츠키는 전쟁이 발발하면 이전에 형성된 모든 정치적 관계들이 중지되고 완전히 새로운 상황이 등장한다고 전제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공격하는 자와 방어하는 자들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레닌은 제국주의가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상황, 부르주아지들 사이의 경쟁적 쟁투,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탄압하는 자본가들의 열망 등 정치의 연장으로 전쟁을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전쟁의 성격이 분명해지고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대응도 분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제1차세계대전이 주는 교훈

자국 지배계급의 전쟁 노력을 지지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또 다른 논리는 이랬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래서 자국의 승리는 자본주의 발전과 사회주의 도래를 가속화할 것이다. 반대로 패배는 경제 발전을 지체시키고 사회주의의 도래도 지체시킬 것이다.

이것은 현실의 검증을 이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완전한 숙명론을 대변하는 논리이다.

레닌은 이런 숙명론과 명확하게 단절했다. 레닌은 전쟁 경험은 어떤 사람들은 망연자실하게 만들고 파탄시키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각성시키고 단련시키기도 한다면서, 사회주의자들의 구실은 전쟁이 혁명을 낳을 것이라고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혁명적 자각과 결단을 일깨워 그들이 혁명적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을 돕고, 이를 위한 조직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것이 레닌이 전쟁에 반대했던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가장 달랐던 점이다. 볼셰비키는 숙명론, 기회주의와 이론적·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조직적으로도 단절했기 때문에 혁명적 전술을 일관되게 실행할 수 있었다.

레닌은 《사회주의와 전쟁》 마지막 장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역사에 대해 얘기한다. 전쟁에 관한 볼셰비키의 전술은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그 전 30년 동안 발전시켜 온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볼셰비키는 경제주의, 멘셰비키, 청산파 등과의 논쟁을 거치면서 혁명적 원칙에 충실했고 노동계급 운동에 개입해 계급적으로 각성한 노동자들의 다수를 자기 주위에 결집시킬 수 있었다.

이 점이 당시 러시아와 다른 나라들 사이의 차이를 설명해 주는 열쇠다.

제1차세계대전과 뒤이은 혁명은 노동계급이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세력임을 보여 줬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도 보여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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