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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말리 : 원 러브〉 개봉을 계기로 살펴보는 밥 말리의 삶, 정치, 음악

영화 〈밥 말리 : 원 러브〉는 밥 말리를 형성한 정치와 환경에 대해 잘 보여 주지 못한다.

다행히 사운드 트랙이 관객에게 ‘구원의 노래’들이 될 것이다.

그러니 밥 말리와 그의 음악을 특히 좋아한다면 큰 기대 없이 대형 스크린으로 그의 재현을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이 글은 밥 말리의 삶과 사상, 음악의 배경이 되는 시대와 정치 상황까지 영화보다 충분하게, 그러나 매우 간략하게 소개할 것이다. 밥 말리처럼 정치적이고 예술적인 인물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의 용도는 단지 그를 더 잘 아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교훈과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불과 36년밖에 되지 않은 그의 짧은 생애에는 씨줄과 날줄처럼 역사와 사건들이 연결돼 있다.

그래서 이 글은 노예 농장과 자본주의 발전의 관계, 인종차별과 종교의 관계, 1960~1970년대와 레게의 관계, 제3세계 좌파 정부와 국제통화기금(IMF) 간 대결의 반복적인 패턴, 음악과 문화에 대한 작은 얘기까지 간략하지만 모두 다룰 것이다.

밥 말리

그가 가난과 울분을 노래한 최초의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그의 노래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저항을 격려한다는 점에서 남달랐다.

인종차별, 제국주의, 지배자들의 탐욕에 대한 그의 분노 역시 여전히 유효하다.

‘전쟁’, ‘혁명’, ‘봉기’, ‘400년’, ‘방화와 약탈’, ‘반란의 음악’, ‘영혼의 반역자’, ‘겟 업 스탠드 업’ 등 그의 노래와 앨범 제목만 쓱 훑어 봐도 그에 대해 살펴볼 이유가 충분할 것이다.

동시대의 또 다른 ‘영혼의 반역자’ 체 게바라처럼 밥 말리는 수많은 청년의 티셔츠와 포스터, 시위 배너와 배지 등에 불멸의 얼굴을 새겼다.

“투쟁을 포기하지 말라. 삶은 당신의 권리다.”

짧고 분명하고 간결하게 투쟁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옹호하고 설득하는 밥 말리와 피터 토시의 노래 ‘겟 업 스탠드 업’은 전 세계 시위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노래일 것이다.

생전의 밥 말리는 이 노래를 주로 공연의 마지막 순서에 불렀다.

〈뉴욕 타임스〉는 1977년 런던 레인보우 극장에서 열린 밥 말리 & 더 웨일러스의 공연 영상을 1000년 후에 개봉할 타임캡슐에 넣었다.(리마스터링 영상이 유튜브에 있다.)

〈타임〉은 밥 말리의 1977년 앨범 〈엑소더스〉를 20세기 최고의 앨범에 선정했다.

그가 활동한 1960년대와 1970년대는 정치적으로 격렬했고 문화적으로 폭발적이었다.

자메이카 현대사에서도 가장 격동적인 시기였다.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고뇌와 낙관을 표현했던 밥 말리와 그의 음악은 이러한 시대의 산물이기도 했다.

반란의 섬

카리브 해의 섬나라 자메이카에는 ‘400년’이 넘는 식민 지배의 역사가 있다.

이 섬에 1494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최소 2500년 전부터 아라와크족과 타이노족이 정착해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에 의해 이들은 거의 몰살당했다. 스페인에 이어서 1655년부터 지배자가 된 영국은 설탕을 대량 생산하려고 아프리카인들을 대거 잡아왔다.

아프리카에서 카리브 해로 대서양을 횡단하는 노예 무역과 카리브 해의 노예 농장은 자본주의 발전에 결정적 구실을 했다. ‘인종’과 인종차별 역시 이때 처음 발명됐다.

노예 농장은 상품 생산에 값싼 원료를 대량 공급했고 노예 사업의 수익은 대부분 다시 산업 생산을 위해 투자됐다. 이렇게 해서 국가와 지배자들은 부강해졌다. 그러나 식민지 농장의 노예들과 지배국 공장의 노동자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일찍 죽었다.

자메이카는 영국령 섬들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반항적인 곳이었다. 심각한 대규모 반란 없이 조용히 지나간 10년이 거의 없었다. 내륙 산악에 피신한 흑인 노예들도 살아남은 원주민들과 “마룬” 공동체를 이뤄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1760년에는 노예 3만 명이 “태키의 반란”을 일으켰고 1831년에는 노예 6만 명이 무장 항쟁에 나섰다. 결국 영국은 1834년 노예 제도를 도제 제도로 바꿨다가 1839년 마침내 폐지했다. 그러나 노예 소유주들은 재산을 잃은 대가로 보상을 받았지만, 해방된 흑인들은 땅 한 평 없이 가난에 허덕였다.

밥 말리의 노래는 노예 식민의 역사를 현재의 억압적 현실과 연결했다.

“채찍 소리가 들릴 때마다 / 내 피가 차가워지네 / 나는 노예선에서 그들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기억해 / 오늘날 그들은 우리가 자유롭다고 말하지만 / 가난의 사슬에 묶여 있지 / 맙소사, 이걸 모른다면 그건 무지야 / 돈 버는 기계일 뿐이야 / 노예를 부리는 자여, 이제 판이 뒤집힐 거야” ― ‘노예를 부리는 자(Slave Driver)’(1973)

20세기 초반에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서 미국과 남미로 떠났다. 그러나 1930년대 대불황이 닥치자 자메이카로 돌아오게 됐다. 고통과 분노가 커지면서 1935년부터 파업과 폭동이 일어났다.

“슬픔을 잊고(춤을) / 고민을 잊고(춤을) / 약함을 잊고(춤을) / 저들은 배불러 / 우리는 배고파 / 배고픈 군중은 성난 군중 / 이제 약자들이 강해져야 해” ― ‘저들은 배불러(Them Belly Full)’(1974)

1938년 5월에는 파업 물결이 확대되면서 투표권과 독립을 요구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결국 1944년 영국이 새 헌법을 승인했고 1958년 서인도제도 연방의 일부로서 나라를 독립시켰지만, 완전한 독립은 1962년 설탕 공장과 항만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저항을 주도하면서 비로소 가능했다.

밥 말리는 영국 식민 지배의 야만성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매일 거짓된 척하며 / 매일 매일 그래요 / 이들은 큰 물고기 / 항상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으려는 큰 물고기들 / 작은 물고기들만” ― ‘유죄(Guiltiness)’(1977)

로버트 네스타 말리(밥 말리)는 1945년 2월 6일 자메이카의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60대의 백인 영국 해군이었고 어머니는 10대의 흑인 청소부였다. 밥 말리는 아버지를 직접 만난 기억이 거의 없었다.

독립 이후 자메이카는 보크사이트 채굴을 중심으로 산업 개발에 집중했다. 11년간 경제성장률 5퍼센트를 기록했지만 대중의 빈곤은 나아지지 않았다. 가난한 흑인들에 대한 경찰 폭력과 사법기관의 차별, 억압도 그대로였다.

수도 킹스턴 서쪽 빈민가인 트렌치타운에서 이 시기를 보낸 밥 말리의 어린 시절 역시 가난과 편견으로 상처투성이였다. 그러나 그래도 그에게는 음악이 있었다. 학창시절 밥 말리는 친구 버니 웨일러와 함께 거리에서 항상 노래를 부르고 지냈다.

열다섯 살에 학교를 그만 둔 밥 말리는 용접공이 됐다. 하지만 청년들에게 무료로 음악을 가르쳐 주는 가수 조 힉스의 집으로 찾아가 매일 음악을 배웠다. 거기서 같은 용접공 피터 토시를 만났다. 빈민가 청년들은 전선에서 구리선을 뽑아 기타 줄을 만들고 판자와 대나무로 기타 몸통과 목을 만들어 썼는데 그는 유일하게 진짜 기타를 가졌고 연주할 줄도 알았다.

킹스턴 빈민가로 모여든 버니 웨일러, 피터 토시, 밥 말리는 나중에 전설적인 레게 밴드가 될 ‘더 웨일러스(울부짖는 자들)’를 결성했다.

더 웨일러스의 싱글 ‘시머 다운(Simmer Down)’은 1964년 1월 자메이카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지 1년 반밖에 되지 않은 시기였다.

“정신 좀 차려 / 흥분을 가라앉혀 / 정신 좀 차려 / 전투는 더 치열해질 거야”

이 노래는 당시 ‘루드 보이즈’라 불리던 반항적인 청년 세대의 좌절감을 반영한 곡이다.

더 웨일러스가 처음 채택한 음악 스타일은 관악기가 주도하고 하모니를 중시하는 빠르고 경쾌한 리듬의 스카였다. 이후 스카보다 느리고 보컬 중심의 록 스테디 스타일로 변했다가, 마지막으로 느린 일렉트릭 베이스 기타를 중심으로 하는 레게 스타일로 발전했다.

당시 레게는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반항적인 음악이었다.

자메이카 사람들은 지근거리에 있는 뉴올리언스와 플로리다의 미국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자메이카 라디오 방송국도 생겼지만 대다수 흑인 취향을 무시하는 백인들 방송이라 여겨졌다.

미국 라디오 방송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질수록 미국 재즈와 리듬 앤 블루스의 영향, 아프리카 출신 식민지 사회를 특징짓는 타악기 연주 및 민속 전통 등이 혼합됐다.

문화는 흔히 순수하고 경건해야 한다고 생각되는데 실제로는 순수한 문화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혼성이 가장 자연스럽다. 게다가 음악은 전염성이 가장 강한 문화다. 어떤 음악이든 다른 소스의 영향에서 거의 순수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갑자기 세계 음악계의 전면에 부상하는 음악가들이 나오게 된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자메이카 음악은 1960년대를 걸쳐 역동적으로 발전했다.

더 웨일러스는 계속해서 자메이카 차트에서 성공을 거뒀지만 소속사가 수익을 독식하는 바람에 물질적 보상은 거의 없었다. 밥 말리는 잘 곳도 마땅치 않아 이곳저곳 떠돌았고 버니와 피터도 처지가 비슷했다.

결국 음반을 직접 제작하기 위한 돈을 벌려고 밥 말리는 미국으로 갔다. 거기서 화학회사 듀폰의 실험실에서 보조원을 하거나 크라이슬러 자동차 공장의 조립 라인에서 일했다. 밤에는 대형 창고의 야간 교대조로 일했고 틈틈이 주차장 안내원을 하거나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며 돈을 모았다.

라스타파리즘

자메이카로 돌아오고 1967년 무렵 밥 말리는 라스파타리즘에 더욱 심취했다.

나중에 그는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공연과 인터뷰를 해야 했다. 그는 대화가 잘 되지 않는 사람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가 쓰는 자메이카 스타일의 변형된 영어(파투아)와 그가 피우는 많은 양의 대마초가 소통을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영감을 주는 모순적인 종교의 영향이 가장 컸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념이 종교적이라고 하면서 ‘정치’에 대한 관심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 종교는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본명이 라스 타파리)를 살아있는 신 즉 “자Jah”라고 여기는 라스타파리즘이었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갈수록 문제가 생겼다. 셀라시에 자신이 그런 찬사에 동의한 적이 없었고 그의 40년 통치 역시 폭정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1975년 그가 사망하는 바람에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불멸의 존재성이 부정됐다. 자메이카에서 라스타파리 신자는 흔히 경멸과 배제, 탄압의 대상이 됐다.

고난의 자메이카 역사를 생각하면 이 종교의 호소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칼 마르크스는 종교에 대해 이렇게 주장했다. “종교적 고통은 현실적 고통의 표현인 동시에 현실적 고통에 대한 항의다.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상의 심장이며, 영혼 없는 조건의 영혼이다.”

신자가 신앙을 유지하는 한 종교는 더 나은 세상이 기다린다는 희망과 위안을 얻을 틀을 제공할 수 있다.

라스타파리즘은 약속의 땅(시온)이 아프리카에 있다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신자들은 “간자”(대마초)를 신념 체계에 통합해 ‘고양’을 제공하는 신성한 약초로 여긴다.

여기에는 뚜렷한 정치적 요소도 있다. 이 종파는 흑인 민족주의 지도자 마커스 가비의 “아프리카로 귀환”이란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 자메이카 태생인 마커스 가비는 흑인 구세주가 올 거라고 1927년에 선언했는데 3년 뒤 하일레 셀라시에가 에티오피아 황제가 되면서 그가 바로 살아 있는 신처럼 여겨진 것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도 라스타파리즘의 발전과 성장을 촉진했다. 당시 베트남에서 짐바브웨까지 반식민지 투쟁이 계속됐다. 에티오피아는 적어도 식민지는 아니었다. 라스타파리 신자들은 케냐 독립을 위해 싸운 마우마우족 전사들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그들처럼 드레드락(밥 말리처럼 머리를 빗질하지 않고 길게 기르거나 그런 식으로 길게 땋은 머리)을 했다.

개종하지 않은 레게 가수들도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정의와 평등을 요구하는 라스타파리즘에 연대감을 보였다. 예술가들은 그런 의미에서 드레드락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인종차별적 경찰의 표적이 되는 빈민가 젊은 흑인들에게도 라스타파리즘은 일종의 대항문화로 기능했다. 마치 오늘날 자신의 신앙을 인종차별에 맞서는 방법으로 여기는 젊은 무슬림들이 종교에서 얻는 것과 비슷한 자존감과 정체성을 줬던 것이다.

레게

레게는 특히 드럼과 베이스 기타의 리드미컬한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자메이카 음악 스타일이다.

레게도 라스타파리즘의 영향으로 발전했다. 원래 레게의 힘은 억압에 맞서는 세계적인 투쟁의 분노를 표출하는 데서 나왔다. 밥 말리의 사후, 레게에서 급진적 정치성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레게는 단순히 흥을 돋우는 여름 음악이 아니었다. 1970년대 레게는 혁신적이고 영향력 있고 정치적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런 레게를 ‘루츠 레게’라고 구별해 부르기도 한다.

다른 한편, 레게는 자메이카의 독특한 ‘사운드 시스템’의 영향을 받았다. 사운드 시스템은 DJ들이 라이브 밴드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턴테이블과 커다란 스피커 시스템을 트럭 등에 싣고 빈민가를 순회하는 것이다. 음반을 살 돈이 없었던 대다수 자메이카 사람들에게 사운드 시스템과 거기서 열리는 댄스 파티가 인기였다. 사운드 시스템은 새로운 것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다시 전파했다. 사운드 시스템에서 관중의 생생한 반응을 기반으로 DJ의 보컬이 리드하는 음악 스타일은 랩의 전조쯤 됐다.

1970년대

1970년대 더 웨일러스는 영국으로 건너가 활동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72곳을 18일 동안 순회 공연할 만큼 열심히 활동했다.

결정적 전환은 1972년 크리스 블랙웰과 함께 하면서 시작됐다. 크리스 블랙웰은 영국에서 음반 사업을 하는 자메이카 출신 부자 백인 청년이었는데 라스타파리 신자에 대한 흔한 편견을 거부하는 사람이었다.

크리스 블랙웰은 자메이카에서 녹음된 원본에 오버 더빙을 하고 악기를 추가하는 등 거친 부분을 매끄럽게 다듬어 록 음악의 청중이 더 좋아할 수 있게 만들었다.

1973년에 나온 〈캐치 어 파이어〉는 더 웨일러스를 세계 무대로 끌어올린 획기적인 앨범이다.

같은 해에 나온 앨범 〈버닝(Burnin’)〉에는 ‘겟 업 스탠드 업’이 들어 있다. 이 곡은 더 웨일러스의 전투성을 잘 보여 준다. 피터 토시와 밥 말리가 함께 만들었다. 2020년 〈롤링스톤〉은 이 곡을 밥 말리의 위대한 노래 1위로 선정했다.

종교적 언어와 함께 지금 당장 변화를 위해 싸움에 나서라는 응원이 혼합돼 있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 위대한 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 모든 걸 가져가고 / 모두를 기분 좋게 할 거라고 / 하지만 인생의 가치가 무엇인지 안다면 / 그럼 당신은 바로 여기 땅에서 당신의 것을 찾을 것이다 / 이제 우리는 빛을 본다 / 당신은 당신의 권리를 위해 일어설 거야, 그래”

이 무렵 BBC 스튜디오에서 녹화된 공연 영상도 유튜브에서 리마스터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밥 말리의 왼쪽에 버니 웨일러가 있고 오른쪽에 피터 토시가 있다.

피터와 버니가 탈퇴하면서 밴드 ‘더 웨일러스’는 해체됐고 ‘밥 말리 & 더 웨일러스’가 됐다. 피터 토시와 버니 웨일러는 각자의 길을 가며 자메이카 음악을 발전시켰다.

특히 피터 토시는 제국주의, 인종차별, 불의에 대한 외침으로 가장 노골적으로 정치적 성향을 드러냈다.

1974년 앨범 〈네티 드레드(Natty Dread)〉에는 밥 말리의 자전적 가사가 돋보이는 불멸의 명곡 ‘노 우먼 노 크라이’가 있다. 여러 가지 (모두 느린) 라이브 버전이 더 익숙할 것이다.

“우리가 앉아 있던 때가 기억나 / 트렌치타운 공공주택지에서 / 위선자들을 바라봤지 / 우리가 만나는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그들을 / 우리가 가진 좋은 친구들, 오, 우리가 잃은 좋은 친구들 / 여기까지 오는 동안 / 이 위대한 미래 속에서도 과거를 잊을 수 없어 / 그러니 눈물을 거두길”

밥 말리가 부른 노래들은 대부분 밥 말리 혼자 만들었거나 밴드 멤버와 함께 만들었다. 하지만 이 노래처럼 어떤 이유로 작곡가/작사가에 다른 멤버나 지인의 이름을 넣어 발표한 것으로 추정되는 노래들이 꽤 있다.

그는 “야만의 제복”을 입은 경찰을 증오했다.

“오늘 아침 깨어 보니, 통행 금지 시간이야 / 맙소사, 나도 죄수였어! / 날 지키고 서 있는 얼굴들을 알아볼 수 없었어 / 그들 모두 야만의 제복을 입고 있었어, 에!” ― ‘방화와 약탈(Burnin’ and Lootin’)’(1973)

로저 구에버 스미스의 원맨쇼 〈로드니 킹〉(넷플릭스)에는 불타는 LA 거리의 이름들을 나열하며 나직하게 ‘방화와 약탈’을 부르는 명장면이 있다.

1974년 에릭 클립튼이 불러 더 유명해진 밥 말리의 노래 ‘내가 보안관을 쐈다’(1973)도 사실은 보안관이 아니라 (인종차별적인) 경찰을 쐈다는 뜻이었다.

밥 말리는 자신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를 분명히 했다.

“당신이 큰 나무라면, 내가 당신에게 말해 주지 / 우리는 날카롭게 준비된 작은 도끼다 / 당신을 베어낼 준비가 됐어”― ‘작은 도끼’(1973)

그는 정치인들을 불신했다.

“절대 정치인이 (아아-아아) 당신에게 호의를 베풀게 하지 마십시오 / (두두두두) 그들은 항상 (아아-아아) 당신을 영원히 통제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영원히 영원히)” ― ‘혁명’(1974)

1980년대 아일랜드에서 공연하는 밥 말리 ⓒ출처 Eddie Mallin

음악 산업은 항상 반항을 통제해서 이윤으로 전환시키려고 했다. 자본주의에 안전한 음악을 만드는 것은 음악 비즈니스의 목표 중 하나다. 이윤을 위해서는 광고주와 방송사가 위협을 느끼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종 사람들이 적절하게 표현하고 싶은 것이 연애와 이별이 다가 아니라 울분과 저항일 수 있다.

많은 백인 청년들도 밥 말리의 레게에서 이런 측면을 발견했을 것이다.

“사는 게 가장 힘든 곳 (콘크리트 정글) / 오, 최선을 다해야지, 그래 (콘크리트 정글) / 내 발에 사슬은 없지만 난 자유롭지 않아 / 난 내가 여기 감금돼 묶여 있는 걸 알아” ― ‘콘크리트 정글(Concrete Jungle)’(1973)

1960년대는 자메이카와 가까운 미국 남부와 쿠바에서도 격동의 시기였다. 미국 흑인 운동이 부상했고 쿠바 혁명이 일어났다. 아프리카, 아시아, 심지어 서방 내부에서도 반제국주의 투쟁이 일어났다.

‘400년’의 반식민지 투쟁 역사가 있는 자메이카에도 그 반향이 일었다.

이런 배경에서 1965년과 1968년 킹스턴 거리에서 가난한 이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청년들의 시위도 확산되었다. 이런 분위기의 가장 큰 정치적 수혜자는 마이클 맨리의 인민국가당(PNP)이 되었다.

좌파 정당 PNP는 1938년 파업 물결 이후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창당했다. 마이클 맨리는 1964년 97일간의 방송국 파업을 이끌었고 1972년 급진적인 선거 캠페인을 통해서 PNP의 집권을 이끌고 총리가 됐다. 곧 그는 세계적으로 저항의 상징이 됐다.

당시 자메이카는 2퍼센트의 인구가 80퍼센트의 부를 차지하고 24퍼센트의 성인이 실업자인 상태였다. 맨리 정부는 대중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교육·의료·주택 등 복지 개혁을 추진했다. 부분적인 토지 개혁도 단행했다.

1974년에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선언했다. 외국인 소유의 전기, 전화, 버스 회사를 국유화했고 미국과 캐나다의 보크사이트 기업에 대한 세금 감면을 취소했다. 알루미늄의 원료인 보크사이트는 미국의 전쟁 산업에 중요했다.

맨리 정부는 남아공의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을 지지했고 앙골라 독립 전쟁에서 반군을 지원했다. 쿠바를 국빈 방문하며 쿠바와도 협력했다.

“앙골라에서 우리 형제들을 가두고 / 모잠비크에서 / 남아프리카공화국 / 인간 이하의 속박 / 모든 곳이 전쟁 / 나는 전쟁을 말한다 / 동쪽의 전쟁 / 서쪽의 전쟁 / 북쪽의 전쟁 / 남쪽의 전쟁” ―‘전쟁’(1976)

그러나 미국은 자신의 뒷마당에서 미국에 저항하는 쿠바 같은 나라를 더 허용할 생각이 없었다. 미국 정부와 보크사이트 기업들, 자메이카의 부자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함께 좌파 정부에 대한 불안정화 캠페인에 돌입했다.

임금 인상을 정리 해고와 물가 상승으로 무력화시켰고 알루미늄과 보크사이트 가공을 다른 나라로 옮겼고 해외 자본 유입도 급감했다. CIA는 우파 정당(JLP)을 부추겨 폭력과 테러를 조장했다.

1970년대 중반 세계 경제의 위기도 맨리 정부에 불리했다. 무역 적자와 국가 부채가 급증했고 대중의 삶이 더한층 나락으로 떨어졌다. 결국 IMF가 긴축 프로그램을 강요했다. 그러나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마이클 맨리는 “우리는 팔리지 않는다”며 IMF의 요구안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1976년 12월

이것은 IMF와 국제 반제국주의 운동 세력 양쪽 모두에 중대한 시험대였다. 자메이카에서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관철된다면 다른 제3세계에서도 신자유주의 공격의 기세가 오를 것이었다.

따라서 1976년 12월의 총선은 마치 IMF와 맨리 정부의 정면 승부처럼 여겨졌다.

자메이카 현대사에서 정치적 대립과 사회적 긴장이 가장 고조된 이때 발생한 밥 말리 암살 미수 사건은 이 시기의 상징적 사건이 됐다.

바로 이 시기를 배경으로 영화 〈밥 말리 : 원 러브〉가 시작한다. 2018년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누가 밥 말리를 쏘았나〉도 그렇고, 2015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1100페이지가 넘는 소설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도 그러하다.

밥 말리는 자신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자메이카의 권력과 영향력을 노리는 사람들에게는 더 확실히 그렇게 여겨졌다.

1976년은 그가 국제적 스타덤에 오르는 중이라서 자메이카 사회에서 점점 더 영향력 있는 인물이 돼 가고 있었다.

밥 말리와 아내 리타는 치열한 총선 유세 기간 중 인민국가당(PNP)이 주최하는 콘서트에서 공연하기로 했는데 그 이틀 전에 괴한들에게 총격을 받았다.

나중에 그의 노래 ‘앰부쉬 인 더 나이트’(1979)에서 가해자들에 대해 언급했다.

“사회가 기획한 / 밤의 매복 공격 / 나를 정복하려 해”

여기서 “사회”는 지배계급을 가리키는 게토의 은어다.

넷플릭스의 〈누가 밥 말리를 쏘았는가〉는 이번 영화보다 더 나은 관점을 보여 준다. 케빈 맥도날드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말리〉(2012)와도 다르게, CIA와 우파 정당이 암살 배후였음을 많이 보여 준다.

밥 말리는 콘서트 참가를 강행했고 1976년 12월 총선은 마이클 맨리가 승리해 연임에 성공했다.

이후 말리는 영국으로 피신했다.

런던에서 평온을 찾고 2장의 성찰적인 앨범 〈엑소더스〉와 〈카야〉를 녹음했다. ‘턴 유어 라이츠 다운 로우(Turn Your Lights Down Low)’와 ‘웨이팅 인 베인(Waiting in Vain)’ 같은 아름다운 사랑 노래들, ‘쓰리 리틀 버즈’도 이때 나왔다.

영국에 있는 동안 말리는 1970년대 후반 폭발적으로 유행한 뉴웨이브 음악의 창의성을 인정하고 공감했다.

“사회에서 거부당하고 / 불합리한 대우 / 내 존엄성으로 보호 / 나는 리얼리티를 찾는다 / 새로운 물결 새로운 열풍 (펑키 펑키 펑크) / 뉴 웨이브, 뉴 웨이브, 뉴 프레이즈 (펑키 펑키 펑크) / 더 웨일러스가 거기 있을 거야 / 더 댐드, 더 잼, 더 클래시 [영국의 펑크록 밴드들], 메이 탈스 [자메이카 레게 밴드]가 거기 있을 거야” ― ‘펑키 레게 파티’(1977)

1976년 에릭 클랩튼이 버밈엄 공연에서 인종차별주의자 에녹 파월을 지지한다고 선언한 것을 계기로 영국에서 RAR(Rock Against Racism)이 시작됐다. RAR의 창립자들은 특히 에릭 클랩튼이 흑인 음악인 밥 말리의 ‘내가 보안관을 쐈다(I Shot the Shriff)’를 불러서 재기에 성공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격분했다.

“얼마나 많은 강을 건너야 할까요? / 얼마나 많은 강을 건너야 보스와 얘기할 수 있을까요? / 우리는 가진 것을 다 잃은 것 같습니다. / 우리는 정말 대가를 치렀습니다.”

밥 말리는 그의 가장 전투적인 노래 중 하나인 ‘방화와 약탈’에서 폭동의 근본적인 원인을 명쾌하게 요약했다. 사람들이 폭동과 소요로 표출하는 분노는 극심한 빈곤과 불공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찬가지로 마틴 루터 킹도 폭동을 “목소리 없는 자들의 언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러한 통찰력은 여전히 정확하고 정치 지도자들의 역겨운 반응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1978년 밥 말리는 다시 킹스턴으로 돌아와 원 러브 평화 콘서트를 열었다. 여기서 좌파 정당 PNP의 마이클 맨리와 우파 정당 JLP의 에드워드 시가를 무대 위로 불러내 서로 손잡게 만든 일이 유명하다.

그러나 마이클 맨리는 이미 1977년 초부터 IMF에 항복했다. 개혁을 뒤로 돌렸고 공공지출을 대폭 삭감했다. 정치 폭력과 암거래가 폭주하는 배경 이면에는 대중의 절망감, 배신감, 패배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결과 1980년 총선에서 에드워드 시가의 우파 정당(JLP)이 자메이카 역사상 가장 큰 차이로 8년 만에 재집권했다. 마이클 맨리의 PNP는 겨우 8석을 얻었다.

불과 1년 전, 카리브 해의 그레나다와 니카라과에서 반란이 일어나 미국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모델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커지고 있었지만 자메이카는 레이건과 대처에게 자신감을 선사했다.

1980년 4월 밥 말리는 아프리카 로디지아[짐바브웨]의 백인 우월주의 통치 종식을 기념하는 축하 행사에 초청돼 공연했다. 1년 전에 나온 전투적 앨범 〈서바이벌〉은 영국을 쫓아 낸 로디지아의 해방 운동이 인종차별 정부마저 전복시킨 것을 축하하는 내용이었다.

짐바브웨에서 공연을 한 지 1년 만에 말리는 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투쟁적인 메시지들은 평화와 사랑에 대한 요청, 그리고 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구원으로 인도될 것이라는 믿음과 혼합돼 있었다.

그에게 음악은 가벼운 도피가 아니었으며 이러한 변화와 인도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었다.

‘구원의 노래(Redemption Song)’(1980)는 그의 마지막 앨범의 마지막 트랙에 수록됐다. 밴드의 반주나 코러스 없이 홀로 어쿠스틱 기타만 써서 불렀다.

“노래하는 거 도와 주지 않을래요? / 이 자유의 노래들을 / 내가 가진 건 / 구원의 노래들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