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캘리니코스 논평:
《덕의 상실》의 매킨타이어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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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자에서 가톨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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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 유럽학 명예교수이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대표다.

지난주 스코틀랜드 출신 철학자 알래스터 매킨타이어가 96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맨 먼저 그 소식을 알린 사람들 중에는 가톨릭 저술가들과 출판사들이 있었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닌데, 매킨타이어는 40년도 더 전에 가톨릭 교회로 개종했기 때문이다. 《가톨릭 헤럴드》는 그를 두고 “철학계의 거인”이라고 불렀는데, 오늘날 가톨릭계에서 그렇게 인정받는 인물은 결코 흔하지 않다.
그러나 매킨타이어의 삶의 궤적은 복잡하다. 그는 가톨릭에 귀의하기 전에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초까지 정치 활동가였다. 처음에 그는 공산당에서 활동하다 정설 트로츠키주의 단체인 사회주의노동자동맹으로 건너갔고, 마지막에는 국제사회주의자들(현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전신)에서 활동했다. 1961~1962년 동안 그는 마이클 키드런과 함께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공동 편집자를 지냈는데, 그 잡지는 지금도 SWP의 이론지로 발행되고 있다.
매킨타이어가 마르크스주의에 지적 매력을 느낀 이유 하나는 주류 학계의 철학이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는 불만이었다. 훗날 그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사회적 실천의 한 형태로서, 다른 형태의 사회적 실천에 뿌리내리고 그것에 관해 반추하는 철학관”을 발견했다고 썼다.
그래서 매킨타이어는 한평생 주류 도덕 철학에 비판적이었다. 1958~1959년에 발표한 탁월한 에세이 ‘도덕적 황무지에서 남긴 메모’에서 그는 주류 도덕관이 두 극단 사이에서 갈팡지팡한다고 지적했다. 하나는 도덕을 인간의 욕망·필요와 무관한 것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을 “욕망 그 자체”로 축소하는 것이다. 이는 억압적 사회가 필요로 하는 바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둘 다 소외의 형태이지 도덕적 지침이 될 수 없다”고 그는 썼다.
매킨타이어의 해법은 “도덕관과 욕망에 대한 이해 사이의 균열”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인간의 사회적 실천의 역사적 발전과 변화를 탐구해야 한다고 매킨타이어는 주장했다. 그리고 “산업 노동계급의 삶에서 배양되는 인간 평등과 단결의 경험은 인간 소외 극복의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도덕의 파편화에 대한 이런 진단은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긴 1981년 작 《덕의 상실》[국역: 이진우 역, 문예출판사]에서 내린 진단과 매우 유사하다. 그 책에서 매킨타이어는 도덕 담론의 와해, 이데올로기적 논적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도덕 논쟁들의 종결 불가능하고 해소 불가능한 성격, 그러한 논쟁에 만연한 지적·감정적 혼란을 다뤘다.
그러나 그 책에서 매킨타이어는 도덕적 무질서의 원인을 더는 자본주의와 직접 관련된 것으로 진단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17~18세기 “계몽주의 프로젝트,” 즉 전통적 세계관을 근대 자연과학에 바탕을 둔 세계관으로 대체하려는 노력이 도덕적 무질서의 원인이 됐다고 주장한다. 매킨타이어는 빼어난 지성과 박식함으로 위엄 있게 논지를 전개한다. 더욱이 당시 프레드릭 제임슨이 지적했듯이, “그 책 전반에서 마르크스는 매킨타이어가 제시하는 역사와 사회적 삶에 관한 비전의 가장 풍부하고 궁극적인 원천 구실을 하고 있다.” 매킨타이어 자신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덕의 상실》 말미에서 매킨타이어는 트로츠키로 돌아온다. 한때 그는 트로츠키를 본보기로 삼아야 할 지식인으로 높이 샀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선언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정치적 전통으로서 모든 가능성을 소진했다. … 이미 또 다른 암흑기가 도래한 가운데 … 우리는 … 또 다른, 이전과는 분명 매우 다를 성 베네딕투스를 기다리고 있다.” 6세기 서방의 로마제국이 몰락할 때 성 베네딕투스는 사제들의 질서를 구축했다. 매킨타이어가 그 책을 끝내고 몇 년 후에 가톨릭 교회로 개종한 것이 놀랍지 않다.
물론 이런 변화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부분적으로는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꽤나 기초적인 왜곡, 특히 인간의 자유 의지가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점을 왜곡한 것에 바탕을 둔 것이다. 어쨌든 1960년대 중엽에 이르면 매킨타이어가 노동계급의 삶과 투쟁이 자본주의에 맞서 정치적·도덕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잃었다는 것도 분명하다. 잘 알려진 반란이 일어난 1968년 매킨타이어는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편집팀에서 사임하고 곧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남은 생애를 미국에서 보냈다.
그럼에도 매킨타이어는 2007년 《덕의 상실》 마지막 개정판에서 이렇게 썼다. “자본주의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질서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과 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 비판을 발전시킨 것에 나는 큰 빚을 졌고 지금도 지고 있다.” 이후 나는 매킨타이어를 만난 적이 거의 없지만, 한 만남에서 그는 여전히 노동가치론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매킨타이어는 지역적 소공동체들에서 세계 자본주의에 저항할 도덕적·실천적 자원을 발전시키는 것에 희망을 걸었다. 그가 자신이 [위에서 언급된 글 — 역자] ‘도덕적 황무지에서 남긴 메모’에서 개괄한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데에 그 빼어난 지적 재능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