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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신자유주의 운동의 정치세력화로서 급진 좌파

현 정세의 주요 특징은 신자유주의적 제국주의에 맞선 대중 저항의 발전이다. 이 점은 특히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들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국제적으로 미국 제국주의를 곤경에 빠뜨린 것은 이라크 수렁이다. 대중적 저항 운동들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라틴아메리카의 운동이 가장 두드러진다.

유럽의 상황은 훨씬 불균등하다. 재계·정계·언론계의 엘리트들은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들을 지지하는 데서 한통속이다. 이 점은 사회적 자유주의 현상 ― 영국 노동당 같은 정당들이 시장에 굴복하는 것 ― 에서 드러난다.

그럼에도 지난해 3∼4월 프랑스 학생들의 반란은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을 좌절시킬 대중 저항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그러나 대중운동은 고정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산물이고, 역사의 흐름을 따라 우여곡절을 겪으며 발전한다.

1999년 11월 시애틀 시위 이래로 운동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정치 문제다. 운동의 초기 국면에서는 저항 운동이 정치나 정당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믿음이 득세했다.(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다니엘 벤사이드는 이것을 ‘사회적 환상’이라고 불렀다.)

이런 입장의 근저에는 국가 권력을 향한 투쟁이 모종의 스탈린주의로 귀결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놓여 있었다. 많은 활동가들은 존 홀러웨이가 제기한 “권력을 잡지 않고 세계를 바꾸자”라는 구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믿음이다. 신자유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선 국제 저항 운동은 당연히 정치의 장(場)에 들어가기 마련이고 운동의 정치적 대표성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점을 라틴아메리카에서 매우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가 선두 주자인 운동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국가 권력 문제를 제기했다.

베네수엘라의 대중운동은 우고 차베스의 개량주의 정부를 지지하며 발전했다. 볼리비아의 대중운동은 에보 모랄레스를 권좌에 올려놓고 그가 석유·천연가스 산업을 국유화하는 프로그램을 추진하도록 강제했다.

물론 몇 가지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두 나라의 국가는 모두 자본주의 국가다. 궁극적으로 운동은 자신의 민중권력을 발전시켜 자본주의 국가를 대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운동은 패배할 것이다.

운동이 라틴아메리카만큼 멀리 나아가지 않은 유럽에서 정치 문제는 운동과 정당의 관계 문제로 제기됐다.

몇몇 나라에서는 운동의 요구들을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새로운 좌파 단체들이 등장했다. 영국의 리스펙트, 포르투갈의 좌파블록, 독일의 새 좌파당이 대표적이다. 2001∼2004년에 운동이 최고조에 이른 이탈리아에서는 현존 좌파 정당인 재건공산당이 운동과 완전히 일체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제 두 가지 문제가 나타났다. 첫째는 새로운 좌파 정당들의 정치와 관계 있다.

운동과 정당

이 문제가 가장 분명히 드러난 곳은 이탈리아다. 재건공산당 사무총장 파우스토 베르티노티의 모호한 혁명적 미사여구와 당의 실천 사이에는 늘 간극이 있었다.

재건공산당이 로마노 프로디의 중도좌파 연립정부에 참가하고 최근 아프가니스탄과 레바논 파병에 동참하면서 이 간극은 더 두드러지고 있다. 재건공산당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반전 운동[이탈리아 반전 운동을 말함]에 미친 영향은 거의 재앙에 가까웠다.

라틴아메리카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의 경험은 ‘혁명인가 개량인가’의 문제가 여전히 현실적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여기에 두번째 문제가 있다.

일부 극좌파는 개량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의 차이를 이용해 새로운 좌파 정당 건설을 회피하거나 심지어 방해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독일에서 종파주의 조직들이 새 좌파당의 일부가 베를린의 사회적 자유주의 연립정부에 참가한 것을 거론하며 신생 정당을 유산시키려 한 사례는 가장 극단적인 것이다.

스타티스 쿠벨라키스가 보여 주듯이, 프랑스는 더 복잡하고 비극적인 사례다. 결국, 극좌파의 분열 때문에 올 봄 대선은 두 명의 우파 포퓰리스트 후보가 선거를 주도하게 됐다.

이 두 문제의 배후에 똑같이 놓여 있는 것은 사회적 자유주의로 후퇴한 광범한 대중 정당이냐 아니면 협소한 혁명적 조직이냐 하는 잘못된 선택이다.

시애틀 투쟁 이래로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태도는 이러한 사이비 양자택일을 거부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의 목표는 혁명적 대중정당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목표를 이루는 방법은 과거에 노동당이나 그 밖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지지했던 노동 대중 상당수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뿐이다.

현재 상황에서 그럴 수 있는 방법은 사회민주주의에서 떨어져나온 사람들에게 개방적인 새로운 정치 조직을 건설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혁명인가 개량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정치 조직들을 적극적으로 건설하는 동시에 그 안에서 독립적인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 전략을 위해 분투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리스펙트인가 사회주의노동자당인가’ 하고 묻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둘 다 필요하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성장·강화는 리스펙트의 성장·강화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