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그람시 사망 70주년:
계급, 이데올로기, 서유럽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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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시는 사상이 널리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려면 일단의 개인들이 그 사상을 사회 전체로 전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람시가 살던 20세기 초에 이탈리아인들은 대부분 소도시나 농촌에서 살았다. 당시 유력한 사상을 전파한 사람들은 성직자·교사·법률가·의사 등이었다.
그람시는 모든 작업장과 지역사회에 공산주의자들의 네트워크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상식적인 사회관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언론이 우리 삶을 속속들이 좌우하는 전능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획득하려면 국가나 집권당에 헌신하는 사람들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이런 네트워크가 그런 사상을 상점이나 술집이나 가정의 일상 생활 속으로 옮길 수 있다.
토니 블레어가 직면한 한 가지 문제는 그의 당의 뿌리가 시들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당이 곧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노동당 뿌리의 영향력은 그 어느 때보다 약하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지역사회에서 대안 사상을 주창할 사람들을 결집시킬 네트워크가 부족한 문제를 다뤄야 한다.
그람시는 이렇게 주장했다. “대중은 가장 광범한 의미에서 스스로 조직하지 않고는 눈에 띄지도 않고, 자체적으로 독립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지식인들, 즉 조직자들과 지도자들이 없는 조직은 없다. 다시 말해, 이론-실천 관계의 이론 측면이 없는 조직은 없다. 그것은 사상을 개념적·철학적으로 정교화하는 일종의 ‘전문가들’이 존재하는 것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지식인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힘들고 모순으로 가득 찬 오랜 과정, 전진과 후퇴, 뭉치고 흩어짐을 거듭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대중의 충성심은 흔히 심각한 시험을 거친다.”
감옥에서 검열을 피해 글을 써야 했던 그람시는 “혁명정당”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어서 “유기적 지식인들”이라고 표현했다.
유기적 지식인
운동의 지도라는 생각은 자연히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블레어나 스탈린의 지도 개념, 즉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지도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도는 어떤 투쟁에도 있기 마련이다. 마치 1789년
그람시는 이런 종류의 지도는 “어떤 과학적·추상적·이론적 공식들을 기계적으로 반복하지 않았다”고 썼다. “그것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능동적인 대중 전체에게 유기적 지도를 제공하는 문제다. 이 지도는 낡은 도식들을 따르지 말고 혁신해야 한다.”
그람시는 노동계급의 자생적 반란이 우선 중요하다고 봤다. 그리고 그는 “자생성”과 “의식적 지도”의 통일을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제1차세계대전 후 그람시 자신이 경험한 토리노 노동자들의 반란과 공장 평의회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서구 사회에서 노동계급은 의회 민주주의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당연하게 여긴다. 여기에는 상식이 깃들어 있다. 의회 민주주의나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이런저런 독재보다 낫고, 따라서 이는 우리가 쟁취하고 지켜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직접 경험한다면,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이를 뛰어넘어 새롭고 더 민주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람시의 주된 관심사는 서유럽 노동계급이 혁명 쪽으로 넘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페리 앤더슨은 1977년 그람시를 다룬 주요 논문
공동전선
혁명가들은 이런 혁명적 위기 전까지는 소수임을 인식한 채 노동계급과 피억압 집단 사이에서 오랫동안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활동을 해야 한다.
이 말은 혁명가들이 혁명적이지 않은 노동자들이나 그들의 대표들과 함께 활동하면서도 혁명적 사상과 전략을 가장 명료하게 표명하며 대화를 나누는 비
공장 평의회나 러시아에서 소비에트라고 부른 것이 이 점을 가장 고차원적으로 보여 준다.
우리가 “기동전”으로 공세를 취할 수 있기 전까지 우리는 사회주의 사상이 운동에서 득세하도록 “진지전”을 벌이며 “진지전”에서 승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