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그람시 사망 70주년:
국가, 동의, 진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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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한때 옛 소련과 중국을 지배한 공식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인 안토니오 그람시는 칼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분석을 발전시켰다. 그람시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독재정권 치하 감옥이라는 끔찍한 조건에서 그런 작업을 했다.
그람시를 재판한 판사는 선고 결정문에서
그람시가 가장 먼저 다룬 문제는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서유럽을 휩쓴 혁명적 격변의 실패였다. 이탈리아는 조건이 러시아와 가장 비슷한 나라였고, 그람시는 1919∼20년의
그람시는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들인 레닌과 트로츠키가 서유럽과 동유럽의 차이에 대해 주장한 바를 발전시켰다.
그람시는 지배계급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켄타우로스 ― 반
짜르 치하 러시아에서는 시민사회가 막 생겨나고 있었다. 그 시민사회는
혁명가들의 과제는 기회가 왔을 때 국가를 직접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람시는 이것을
서유럽에서는 지배계급이 대부분의 시기에
그람시에 따르면, 그런 기구들과 그런 기구들이 사회 전체에 퍼뜨리는 사상을 무너뜨리려면 직접 공격을 감행하기 전에 오랜 이데올로기 투쟁을 벌여야 한다. 혁명정당은 노동계급과 다른 피업악 집단들에 대한 지도력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람시는 이를
붉은 2년
그람시는
동유럽이든 서유럽이든 국가는 탄압과 동의에 의존해 지배했다. 그람시는 국가가 서유럽에서 더 강력하고 압박을 받으면
이 모든 것은 혁명정당과 노동계급의 역동적인 쌍방향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토리노 노동계급 투쟁에서 자신이 겪은 경험을 돌아보며 그람시는 노동계급의 자생적 반란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1924년에 그람시는 혁명정당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다른 곳에서 그는
그러나 당원들은 단순히 명령을 따르는 로봇들이 아니다. 그람시는 이렇게 말했다.
당은 일상의 투쟁 속에서 지도력을 입증해야 한다.
1937년 질병과 파시스트 정권의 학대 때문에 죽을 때까지 그람시의 궁극 목표는 여전히 혁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