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우경화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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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아 앙겔라 메르켈의 독일, 사르코지의 프랑스, 고든 브라운의 영국이 EU의 유력한 정치적 축이 될 것이다. 그들은 모두 미국과의 동맹을 확고히 지지할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열렬하게 옹호한다.
메르켈과 사르코지는 2년 전 프랑스와 네덜란드 국민투표에서 부결된 유럽헌법을 부활시킬 궁리를 하고 있다. 그들은 약간 바뀐 유럽헌법을 국민투표를 거치지 않고 은근슬쩍 통과시킬 수 있길 바란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국민투표가 만들어 낸 악몽, 즉 유럽이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추진하는 소수 특권층과 그들에 맞서 저항하는 국민 대중으로 분열했다는 전망은 사라지는 것처럼 그들에게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은 섣부른 것이다. 주류 정치 수준에서 자유시장 우파가 강력한 진지를 구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유럽 대륙에서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 영국에서 마가렛 대처가 시작하고 토니 블레어가 지속한 ― 을 여전히 추진해야 한다.
2005년 독일 총선은 신자유주의를 충실히 따르는 양대 정당, 즉 사회민주당과 기독교민주당이 모두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두 정당은 대연정을 구성해야 했다. 그러나 이 연립정부는 이렇다 할 자유시장 “개혁”을 실행하기는커녕 그런 “개혁”에 합의하기도 매우 어렵다는 것이 드러났다.
저울추
이탈리아에서 대기업들은 1년 전쯤 선출된 로마노 프로디의 중도좌파 연정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변덕스런 우파 정부보다 더 확실하게 경제 구조조정을 추진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프로디 정부는 절반을 갓 넘는 국회 의석 수와 내분 때문에 계속 곤란을 겪고 있다.
프랑스에서 벌어진 일은 이러한 대륙 전역의 교착상태 해소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듯하다. 1995년 11~12월 프랑스 공공부문 파업은 신자유주의 조처 강행이 불러일으킨 일련의 사회적 폭발들 ― 특히 2003년 5~6월 연금 개악에 맞선 교사 파업과 2006년 3~4월 청년 노동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최초고용계약법(CPE)에 맞선 학생 반란 ― 중 첫번째 사례였다.
만약 사르코지가 이런 저항을 극복하고 자유시장 개혁 프로그램을 강요하는 데 성공한다면, 이 승리의 반향은 프랑스를 훨씬 뛰어넘을 것이다. 그러나 사르코지는 그만큼 강력한 대중적 기반 위에서 출발하고 있지 않다.
2주 전 대선 결선투표에서 그는 53.06퍼센트를 얻어 46.94퍼센트를 얻은 사회당 후보 세골렌 루아얄을 이겼다. 이러한 패턴은 1974년 이후 프랑스 대선 때마다 반복돼 온 패턴 ― 온 나라가 좌파와 우파로 양분되고, 비교적 사소한 여론 변화가 균형을 허물고 어느 한 쪽에 승리를 안겨주는 ― 이다.
이번에 루아얄의 무기력한 선거운동과 프랑스의 강력한 급진 좌파의 혼란은 저울추가 사르코지 쪽으로 기울게 하기에 충분했다. 사르코지는 효과적이고 초점이 분명한 선거운동을 펼쳤다. 자신을 주류 정치권 ‘외부의 인사’로 포장한 중도우파 후보 프랑수아 베이루가 1차 투표에서 18퍼센트 이상 득표했다는 사실은 많은 유권자들이 두 유력 후보 모두에게 불만이 많았다는 징후다.
그러나 우파 일간지 〈르피가로〉가 지적했듯, “유권자 다수의 지지를 얻으려는 노력 ― 사르코지는 대통령 선거 기간에 대중의 비위를 맞추려 각별히 애썼다 ― 에도 불구하고, 사르코지는 우파의 전통적 지지층을 넘어서는 데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사르코지를 지지한 유권자들의 사회적 구성은 1995년(자크 시라크가 처음 대통령으로 당선된 해)에 시라크를 지지한 유권자들의 사회적 구성보다 훨씬 더 협소했다. …
“18~24세 유권자 가운데 사르코지에게 투표한 사람은 40퍼센트밖에 안 됐다. 이는 같은 연령대 유권자들이 시라크에게 투표한 비율보다 15퍼센트 포인트 낮은 수치다. … 반면에 … [사르코지는] 최고령 유권자들 사이에서 지지율 우위를 더욱 굳혀, 65세 이상 유권자 가운데 64퍼센트가 사르코지에게 투표했다. 50세 이상 유권자 가운데 사르코지에게 투표한 사람이 52퍼센트인 반면, 루아얄에게 투표한 사람은 37퍼센트밖에 안 됐다.
“사르코지는 또 시라크가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노동자 사이에서 득표한 것보다 표를 더 적게 얻었다. 반면에,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노동자 사이에서 좌파의 득표율은 각각 57퍼센트와 59퍼센트였다. 루아얄은 2004년 지방선거와 유럽의회 선거에서 좌파가 대량 득표한 계층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일부 좌파 사이에서 유행하는 생각, 즉 과거의 대처와 마찬가지로 사르코지도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강령으로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는 생각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 이민 규제를 선동하는 사르코지의 데마고기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이민자들이 너무 많다”는 데 동의한 프랑스인이 1993년에는 53퍼센트, 1997년에 31퍼센트였던 반면 이번에는 28퍼센트에 불과했다.
적대감
사르코지는 좌파의 뿌리가 매우 깊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적대감이 널리 퍼져 있는 사회를 운영하게 될 것이다. 사실, 사르코지 자신도 이런 정서에 영합하는 선거운동을 펼쳤다. 그는 유럽중앙은행이 금리를 너무 높게 유지한다며 비난하고 유럽산 제품의 ‘보호’와 ‘유럽 농산물 우선’ 정책을 요구했다. 시라크 정부의 재무장관 재직 당시 사르코지는 32억 유로의 구제기금을 조성해 프랑스의 중공업 회사 알스톰이 파산하는 것을 막았다.
실제로, 〈파이낸셜 타임스〉칼럼니스트 마틴 울프는 다음과 같이 예상한다. “사르코지의 승리는 유럽에서 벌어질 투쟁을 예고한다.” 울프가 우려하는 것은 사르코지가 “경제적 자유주의자”라기보다는 “포퓰리스트 개입주의자”라는 것이다. 사르코지가 이끄는 프랑스는 “내부적으로 분열되고 외부적으로 비타협적인” 사회가 돼, EU 통합을 가로막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유럽 지배계급의 대변자 가운데 울프 혼자서만 사르코지가 골칫덩이가 될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것은 아니다. 사르코지가 선거에서 승리한지 이틀 뒤에 〈파이낸셜 타임스〉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유럽 재무장관들은 … 유럽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단호하게 옹호하면서, 사르코지에게 프랑스의 경제 문제를 유럽중앙은행 탓으로 돌리지 말라고 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사르코지의 승리에 한계가 있고 그의 정치가 모호하다고 해서 우리가 그의 대선 승리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시라크가 대통령 재임 기간 12년 동안 오락가락하며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인 반면, 사르코지는 강력하고 단호한 지도력 아래 프랑스 우파를 결집시켰다.
특히, 파시스트 지도자 장-마리 르펜의 인종차별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언사를 일부 차용하며 사르코지는 국민전선(FN)이 주류 우파에 도전하지 못하게 봉쇄할 수 있었다. 사회당은 특히 프랑수아 미테랑의 대통령 재임기(1981~95년)에 교활하게 르펜을 이용해서 우파를 분열시키고 약화시켰다.
시험
그러나 사르코지의 우파적 발언은 단순히 미사여구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사르코지가 법과 질서를 훨씬 더 강조하고 더 거리낌없이 사회운동들을 탄압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이쯤에서 사르코지와 대처를 비교하는 것도 적절할 듯하다. 대처는 보수당에 강력하고 자신감 있는 지도력을 제공했고, 국가 기구를 이용해서 주요 노동자 집단들 ― 철강노동자·광부·인쇄공·항만노동자 ― 을 가차없이 공격하고 짓밟았고, 그럼으로써 신자유주의가 승리할 수 있는 정치적 토대를 놓았다.
사르코지도 프랑스에서 그와 비슷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그리 되면 유럽에서 [정치적] 교착상태가 깨지고 우파에게 유리한 상황이 조성될 것이다.
그러나 계급 세력 저울의 그런 변화를 성취하는 데는 선거 승리만으로는 부족하다. 대처도 영국에서 그런 변화를 성취하기까지 첫번째 임기(1979~87년)를 고스란히 바쳐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처의 승리가 결코 불가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르코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전투적인 사회운동, 좌파 정부와 우파 정부를 모두 날려버린 경험이 있는 사회운동과 대면하고 있다.
이 운동이 사르코지를 물리치는 데 필요한 저항 권력과 강력하고 응집력 있는 정치적 지도력을 찾을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향후의 진정한 시험이 될 것이다. 그 결과는 단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