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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협정, 주한미군, 그리고 한반도 평화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는 “평화협정을 통해 한국전쟁을 종결”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그 전에 이뤄져야 할 것이 있다는 데 부시의 강조점이 있다. “우리가 한국전쟁을 종결하는 평화조약에 서명할 수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는 김정일에게 달렸다. 김정일은 무기를 검증 가능하게 폐기해야 한다.”

부시는 평화협정의 조건으로 북한의 선(先) “핵무기 프로그램” 폐기를 내세운 것이다. “우리는 핵무기를 가진 북한과는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않을 것”이라는 크리스토퍼 힐의 한 주 전 언급과도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부시의 발언과 함께 평화체제 논의가 본격화됐다는 기대가 커지고 있지만, 그 앞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수 있다.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대한 믿음 없이는 북한이 선(先) 핵폐기라는 조건을 이행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부시가 나서서 핵폐기의 대가로 평화협정을 보장했다고는 하지만, 북한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것은 그동안 미국이 여러 차례 발행한 바 있는 어음처럼 느껴질 수 있다.

미국은 2000년 공동코뮤니케에서도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체계로 바꾸어 한국전쟁을 공식 종식”하는 것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는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하기 위한 4자회담이 진행되기도 했지만 결국 결렬됐다.

부시 정부는 평화협정을 위해서는 북한 핵이 먼저 폐기돼야 한다며 공을 북한에 넘겼지만, 북한 당국은 얼마든지 공을 다시 미국에 넘길 수도 있다. 북한 핵이 폐기되려면 미국이 의지를 보여야 한다면서 말이다.

실제로, 테러지원국 해제와 경수로 지원 같은 문제가 가시화하기 전에 북한이 핵폐기 단계로 이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부시는 평화협정이 북한 핵폐기 여부에 달렸다고 했지만, 북한 핵폐기 여부는 미국 정부에 달린 셈이다.

신속기동군

선(先) 핵폐기라는 어려운 전제조건이 해결된다 해도 난관이 끝난 것은 아니다. 평화협정의 내용을 둘러싸고 논란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한미군 문제가 대표적이다.

그동안 한미 양국은 평화체제 문제와 주한미군은 관계 없는 일이라는 입장이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상의 일들은 한미 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북한이 상관할 바 아니라는 식이다.

하지만 북한은 어떤 식으로든 군사적 위협인 주한미군 문제를 제기할 것이고, 남한 내 정치세력들도 이 문제에 대해 상이한 입장이므로 주한미군 문제는 어쨌든 핵심 쟁점이 될 것이다.

물론 주한미군 문제에서 충돌만 예고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주한미군에 대한 북한의 태도에 변화의 여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1차 남북 정상회담의 전 과정을 총괄했다고 할 수 있는 전 통일부장관 임동원은 “북한은 대내외 선전용으로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해 왔으나, 실제로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미군의 한반도 주둔이 필요하다는 전략적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그는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가 아니라 주한미군의 역할과 지위의 변경을 요구하고 있다”며 “이런 입장은 이미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그리고 직접 미국 쪽에 전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북한 태도 변화는 미국이 추진하는 주한미군 성격 변화와 맞아떨어진다. 미군은 북한의 남침에 대비한 ‘붙박이’가 아니라 한반도를 들락거리며 대테러전 등에 투입될 수 있는 ‘신속기동군’으로 전환을 추진해 왔다.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이다.

평화협정 문제 논의 과정에서 북한의 태도 변화와 주한미군 성격 변화가 맞물려 모종의 타협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어렵사리 타협이 이뤄진다 해도, 주한미군 주둔이 유지되는 종류의 평화체제가 한반도 평화를 보장할 수 있을까?

그동안 진보진영은 ‘전략적 유연성’ 합의의 위험을 경고해 왔다. 대만을 둘러싸고 장차 벌어질지 모를 중국과 미국의 충돌에서 한반도가 전쟁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반도 문제 전문가 셀리그 해리슨도 “이런 상황[중국과 미국의 갈등]에서 남한이든 통일된 한국이든 한반도에 미군의 계속 주둔을 허용하는 것은 미일 관계가 심화하면 할수록 그만큼 위험한 일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그 위험은 미군의 계속 주둔이 한반도 평화협정 하에 이뤄진다 해도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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