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남북 정상회담 -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평화’보다 ‘번영’에 주안점을 둔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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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이 손을 맞잡고 화해를 다짐하는 것이 대결과 적대보다 훨씬 좋은 일임은 말할 나위 없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여러 해 동안 쌓였던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 정착을 앞당겨야 한다는 기대를 모았다. 1차 남북정상회담 때 한곁에 밀어뒀던 군비통제 문제를 이번에는 다뤄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다.
남북 정상이 7년 만에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적지 않았다. 정상회담말고 또 무엇이 만신창이가 됐던 임기 말 노무현의 지지율을 비록 반짝일지라도 50퍼센트 대로 끌어올리겠는가.
하지만 이에 비해 두 정상이 합의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하 ‘10.4선언’)은 평화 정착의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키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10.4선언’은 경제협력사업에 대한 길고 상세한 내용(5항)을 담은 반면,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완화와 군비통제 문제는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자유왕래 부분도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군축
군사적 적대 종식 문제는 경제협력과 관련해서만 구체적 계획이 제시됐다(3항). 예컨대 국방장관 회담은 “각종 협력사업에 대한 군사적 보장조치”를 다루기로 했고, ‘서해 평화수역’도 경제협력과 연동지었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에 대해서는 ‘평화와 경협의 선순환’이라며 칭찬들이 대단하지만, 사실 금강산이나 개성공단에 적용된 정경분리 원리(군사적 긴장이 있더라도 교류와 협력을 지속해 긴장 해소에 기여한다는)와 큰 차이가 없다.
이것은 군사문제인 NLL 문제를 일단 회피하고 경협 먼저 추진함으로써 평화를 정착하자는 시도이다. 그러나 개성공단을 비롯한 수년 간의 남북경협은 “군사문제 해결 없이 경제협력의 확대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전 통일부 장관 임동원)는 교훈을 줬을 뿐이다.
3항은 “군사적 긴장 완화”와 “분쟁문제 대화와 협상[으로] 해결”, 그리고 “불가침 의무 준수” 등 의미 있는 내용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남북기본합의서(1991년)’의 제2장 9조와 10조에 이미 명시됐던 것들이다. 합의보다 이행의 중요성을 웅변해 주고 있다.
특히, 남한 정부가 평화를 말하면서도 수십 년 동안 육중하게 불려놓은 군사력을 축소할 뜻을 언뜻이라도 비치지 않았다는 점은 군사적 긴장완화 의지를 의심케 한다. ‘10.4선언’이 ‘9.19공동성명’과 ‘2.13합의’를 언급함으로써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는데도 말이다.
남한의 국방예산은 1990년대와 2000년대 내내 엄청나게 증가했다. 올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남한은 세계에서 11번째로 많이 군사비를 지출하는 나라다.
노무현은 이지스 구축함인 ‘세종대왕함’ 진수식에서 “정말 이 좋은 배가 우리에게 필요한 거냐 곰곰이 생각도 해 보았다”며 “우리가 언제까지 북한하고만 아웅다웅하고 있을 일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주한미군 역할변경론의 유사품처럼 보이는 한국 군사력 역할변경론(북한에 적대적이지 않은 군사력이라는)을 내세우며 군비 증강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엄청난 군사력과 군비 경쟁이 지속되는 한 종전선언이 이뤄지더라도 실질적인 평화체제로 나아가기는 어렵다. 〈프레시안〉이 주최한 연속기획강연에서 전 통일부 장관 임동원은 “한반도 평화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평화를 담보할 ‘실질적인 조치’들이 마련”돼야 한다며 “포괄적 신뢰구축 조치와 군비감축”을 강조한 바 있다. “베트남의 예에서 보듯이, 평화협정을 체결한다고 평화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평화체제로 나아가는 데서 더 결정적인 것은 북미관계다. 미국은 북한의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가 선행돼야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핵무기까지 폐기하고 검증을 거쳐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을 마치려면 여러 해가 걸릴 수 있다. 또,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안정 요인은 남북관계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설사 “연내 종전선언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지 않는다”는 주한 미 대사 버시바우의 말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의 희망대로 연말이나 내년 초에 종전협상 개시가 선언된다 해도, 그것은 평화체제로 가는 길고 불투명한 과정의 출발일 뿐이다.
‘10.4선언’은 중요한 문제인 자유왕래도 충분히 다루고 있지 않다. 이산가족 상봉은 당사자들이 고령인 점에 비춰 너무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납북자는 이번에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취급을 받았다.
번영을 위한 평화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이상철 위원장은 “상봉을 확대한다고 하지만, 이산 1세대 40만∼50만 명 중 상봉 신청 인원이 10만여 명인데 기존 방식(1년에 2∼3차례 2백명 씩)을 확대한다 해도 모두 상봉하려면 수십 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1970년대 동서독보다 훨씬 못한 수준이다. 상호 고향방문이나 결혼, 여행의 자유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이산가족 생사 확인조차 허락되지 않고 있는 상황은 보통 사람들의 염원이 남북관계에서 얼마나 뒷전인가 하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10.4선언’ 가운데 가장 길고 상세한 내용을 담은 항목은 5항으로 경제협력사업들에 대한 것이다. 북한 자원에 대한 개발권, 대북 투자 시 우대조건과 특혜 부여, 개성공단 2단계 개발, 3통(통행·통신·통관) 등 제도적 보장조치 완비 등 5항에서 언급된 것들은 대체로 남측 기업주들이 원했던 것이다.
이는 《민족21》 편집주간 정창현 교수의 지적대로 “우리가 제안한 걸 북이 사실상 전격 수용”한 셈이다. 남측 기업주들의 입장에서는 보따리에 다 담기 어려울 만큼 성과가 컸다고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우파 일각에서는 이번에 합의된 경제협력 계획만으로도 엄청난 비용이 들 것이라며 “퍼주기” 공세를 펴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비용을 1백12억 달러(10조 2천6백억 원)로 추산했다. 하지만 이것은 북한에 퍼주는 것이 아니라 남한 자본의 북한 진출을 위해 남한 정부가 기반 시설을 지원하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일방적 지원이 아니라 상호 이익을 챙길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공리공영”). 이번 선언에 명시된 또 하나의 원칙인 “유무상통”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융통한다는 뜻으로, 남한의 자본·설비와 북한의 자원·노동력을 서로 맞바꾸자는 의미일 것이다.
북한 철도와 도로의 개·보수도 남한 수출 물자를 대륙으로 이동시키기 위한 투자의 일환이다. 현대아산이 제작한 자료(〈개성공업지구의 투자환경〉)에 따르면, TCR철도(중국횡단철도)나 TSR철도(시베리아횡단철도)를 이용할 수 있게 되면 해상 운송수단을 이용할 때보다 거리와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다(〈그림〉 참고). 남한 자본의 입장에서 북한은 냉전 기간 내내 섬처럼 고립돼 있던 남한을 대륙으로 연결해 주는 꿈의 다리인 셈이다.
사실, 이 점에서 보수 우파도 남북경협을 반긴다. 그들은 “북한이 먼저 ‘투자안전국’이 돼야 한다”(〈조선일보〉)고 훈수할 따름이다. “기업들이 중국이나 동남아 대신 북한에 투자할 수 있[으]려면 북한이 법·제도·인식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바꿔야 한다.”
냉전 우익의 정상회담 헐뜯기
김하영
‘10.4선언’에 대한 냉전 우익들의 헐뜯기는 전혀 근거 없는 것이다. 그들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가 NLL을 무력화시킨다고, ‘통일 지향으로 법률·제도를 정비’한다는 조항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것 아니냐고 호들갑을 떤다.
‘10.4선언’이 이런 것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우회로를 택했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국방장관 김장수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NLL을 지킨 것이 성과”라고 했을 정도였다. “북한 함정이 NLL을 침범해 공동어로수역에 들어오면 기존 교전 규칙대로 대응하겠다.”
이명박의 한나라당은 “핵 폐기 없는 종전선언은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에 대한 비판은 “핵 가진 자와는 악수를 할 수 없다”던 김영삼의 말로를 보여 주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김영삼의 호전적 태도는 1994년 한반도가 전쟁 일촉즉발로 가는 길을 닦았고, 그해 말 북미가 타협의 길로 들어섰을 때 그는 국제적 왕따가 됐다.
답방 약속을 아예 부도내겠다는 것이냐는 우익의 주장에 이르면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김정일 답방을 벌떼처럼 반대하고 나선 것이 누구였던가.
〈조선일보〉는 아예 ‘10.4선언’의 이행 여부를 새 대통령이 결정해야 한다고 훈수 둔다. “차기 대통령은 10. 4 남북공동선언을 다시 검토해서 국기(國基)를 흔들 수 있거나 국민에 감당 못할 부담을 지울 수 있는 사안을 가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10.4선언’에 대한 지지/반대 구도로 이번 대선을 치러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 한나라당 내부에서 나올 정도로 냉전 대결주의는 인기가 없다. 이명박이 냉전 대결주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은 산토끼를 잡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