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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진영의 과제는 정상회담공동선언 실천 촉구인가?

진보진영 내 NL계열은 “‘정상회담공동선언’을 적극 지지 옹호하는 실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정상회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의 모순을 들춰내고, “남북관계를 통일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하여 각기 법률적·제도적 장치들을 정비해 나[간다]”는 조항을 이용해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을 펼치는 것 같은 일은 좋은 것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10.4선언’ 지지에 몇 가지 단서를 달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소위 ‘평화 조항’들은 지지하더라도 경제협력의 경우에는, 적극적 반대를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지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남북 경제협력은 자본주의적 경제협력으로, 남한 자본이 북한의 노동력(그리고 자원)을 착취하는 것을 북한 당국이 협력한다는 의미다. 자본은 “단지 물(物)이 아니라 사회관계”라는 《자본론》의 강조를 곱씹을 필요가 있다. 북한의 경제체제(국가자본주의)가 남한의 경제체제(시장자본주의)보다 더 우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남한 자본이 국경을 넘어 북한으로 진출하는 것을 지지할 수는 없다.

둘째, 진보진영은 ‘10.4선언’이 담지 않았으나 중요한 요구를 독립적으로 제기할 필요가 있다. 군축과 그를 통한 복지 확충 요구가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미군 없는 평화협정 체결운동’도 ‘10.4선언’과는 다른 입장으로, 진보진영의 독립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진보연대가 ‘미군 없는 평화협정 체결’ 요구를 “10.4공동선언 실천”의 일환으로 여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아무리 좋게 해석하더라도 ‘10.4선언’은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담고 있지 않고, 북한도 주한미군의 역할 변경을 전제로 주둔 용인 의사를 밝혀 왔다.

독립

셋째, 이처럼 ‘10.4선언’을 지나치게 확대 또는 희망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환상을 부추길 위험이 있다. ‘10.4선언’이 “NLL 문제 등 군사적 장벽을 제거하기로 했다”거나 “어떤 형태의 전쟁도 반대하며 불가침 의무를 확고히 준수하기로 함으로써 공격적인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중단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박경순, 2007남북 정상회담 평가와 향후 과제)는 것 등은 아전인수식 해석이다. ‘10.4선언’은 NLL문제를 우회로로 피하고 있고,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도 불가침을 명시했지만 미국은 잠시 중단했던 한미합동군사훈련을 금세 재개한 바 있다.

넷째, ‘10.4선언’을 지지한다 해서 노무현 정부에 대한 지지로 나아가서는 절대 안 된다.

물론 NL계열 활동가들이 지금껏 그랬듯이 남북 공동 선언은 지지하되 한미FTA와 비정규직 문제 등은 반대하는 식으로 사안별로 구체적인 대응을 해 나아갈 수 있다. 문제는 NL 사상 이론에서 남북관계와 통일 문제의 비중과 중요성이 가장 크므로(흔히 통일만 되면 모든 문제들이 얽힌 실타래처럼 풀릴 것이라는 식으로까지 주장된다), 반신자유주의 운동과 노동계급 투쟁이 남북 화해 협력에 헌신하는 듯한 정부를 불안정에 몰아넣을 수준으로까지 고양된다면, 지금까지 그랬듯이 NL 사상 이론을 모순에 빠뜨리고 NL계열 지도자들을 분열, 비일관성, 어중간함, 동요,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기 등으로 내몰 수 있다.

이미 모순이 느껴진다. 한국진보운동연구소 박경순 소장은 “남측 정부당국은 그것을 철저히 이행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고 비판하지만, 도장 찍고 온 사람을 제치고 ‘우리가 더 잘 할 수 있다’고 시사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고, NL 정치 사상에서 강조하는 “우리민족끼리 정신”과도 모순돼 보인다. 심지어, 남한 정부가 회피할 수 있는 북한 당국의 희망 사항들을 나서서 관철하겠다는 함축처럼 들리기도 한다.

‘10.4선언’에 대한 NL계열의 입장에 발맞춰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가칭)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범국민추진위원회’(이하 범국민추진위원회)를 제안했다. “정부, 국회, 경제계, 시민사회진영을 포함 초당적, 초정파적으로 남북정상선언[을] 이행”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것은 일종의 통일 기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은 민족의 과제이므로 계급을 초월한 연합이 자연스러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기구가 ‘10.4선언’에 대한 해석조차 통일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비교적 명백한 구절을 둘러싸고도 상이한 해석이 분분하고, 심지어 NLL에 대해서는 하나의 정부 안에서 국방장관과 통일부장관이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의견도 천차만별일 것이다.

남북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제국주의에 대한 입장에서도 기구(범국민추진위원회) 구성원들은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할 것이 뻔하다. 북미 갈등이 불거진다면 미국에 친화적 입장에서 북한에 친화적 입장까지 다양할 것이다. 평화협정의 성격에 대해서도 주한미군을 유지하느냐 철수하느냐를 놓고 입장이 팽팽히 맞설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계급연합 기구는 계급투쟁이 일어날 때 마비되거나, 아니면 서로 다른 입장을 화해시키고 무마시키려 하면서 노동계급 투쟁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남북관계 또는 통일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할 때 특정 계급의 이익을 내세워 민족적 단결을 저해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말이다.

초계급적

하지만 민중의 현실 삶에서 통일이 계급투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늘에야 정전협정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지만, 한국전쟁은 이미 54년 전에 실질적으로 끝났고 남북한 모두에서 산업화를 통해 노동계급이 성장했다. 수십 년 동안 우리는 계급으로 나뉜 사회에 살아 왔고 우리의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나날이 계급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럴 때 노동자·민중의 삶과 밀접한 한미FTA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둘러싼 투쟁보다 민족적 단결을 앞세울 수는 없다.

민주노동당은 초계급적·초당적 기구에 스스로 발을 묶어두기보다는 노동자·민중의 정당답게 남북관계 속에 잊혀지거나 덜 주목받고 있는 평범한 노동자·민중 ― 국가보안법 피해자, 개성공단 노동자, 탈북자, 이산가족과 납북자 등 ― 의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모두가 기업의 협력에 대해 말할 때, 민주노동당은 남북 노동자·민중의 연대를 생각해야 하고, 모두가 기업을 위한 3통(통행·통신·통관)을 말할 때 민주노동당은 평범한 사람들의 자유왕래를 생각해야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공단 안에서만 [인터넷이] 통하면 되는데 북쪽 다른 지역까지 연결돼서는 문제가 많다”며, 공단 내로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개성공단의 인터넷을 열어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와 기업들은 개성공단에 한정된 인터넷에 만족할지 몰라도 민주노동당은 남북 민중의 자유로운 통신을 원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6.15공동선언에서 이미 합의됐다는 점진적 통일에 대처하는 민주노동당의 자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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