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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회담 이후 국면, 민주노동당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평화와 통일은 온갖 고난 속에서 진보진영이 추구해 온 것인데도 남북 정상회담 국면에서 스포트라이트는 노무현이 받았다. 미국을 거슬러 북한과 손잡지는 않겠다는 것이 집권 내내 그의 입장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동안 유일 평화정당을 자신해 온 민주노동당이 이 국면에서 자칫 가려질 위기를 걱정할 법하다. 과연 어떻게 해야 민주노동당은 진정한 평화와 통일의 정당으로서 대중에게 호소력을 가질 것인가?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제안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범국민추진위원회’에는 이런 고민이 묻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 이런 제안은 정상회담 당사자인 정부가 각계 협조를 당부한 것에 응답하는 차원에서 할 만한 것이어서, 그 정치적 효과는 ‘공세’적으로 보이기는커녕 노무현 정부에 대한 지지 표명처럼 보일 공산이 크다.

이 제안에는 남북관계 문제에서 정부가 계급적으로 중립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남북 정상회담은 회담의 당사자가 누구이냐 하는 문제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그 결과가 해당 정권의 성격이나 의도를 넘어[선다]”는 것이다.(김은진 최고위원, ‘2차 남북 정상회담의 의의와 민주노동당의 역할’)

물론 회담은 상대가 있는 법이고 둘의 의견이 조율되지만, 회담의 남측 당사자가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남한의 정치세력들은 남북관계와 통일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인 게 엄연한 현실이다. 단일한 민족적 이해관계가 존재하며 그것을 집권 세력이 대변하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남한의 집권 세력들은 모두 자기 지지 기반인 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략적 타산을 하며 움직여 왔다.

노무현 정부 대북 정책의 근간에는 한미공조 속에서 남북관계를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과 평화는 번영의 조건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또, 경제가 붕괴 일보직전 상태인 북한이 남한 경제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통일을 미루고 북한을 천천히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깔려 있다.

이런 관점이 이번 남북 정상선언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예컨대 남북 경제협력에서 노무현 정부가 대변한 것은 새로운 투자처와 싼 노동력, 풍부한 자원을 원하는 남한 자본이다. 10월 17일 민주노동당 중앙당사에서 열린 ‘남북 공동선언과 진보진영 대응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서울시당 주최. 이하 ‘대응방안 모색 토론회’)에서 이번 남북 정상회담의 특별수행원이었던 발제자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경협의 성격에 대한 나의 지적에 대해 “남북 경제협력이 기업 마인드인 것은 맞다”며 “민중적 차원의 고민 지점은 없다”고 인정했다.

김 교수는 또, 경협에 비해 군비통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는 내 지적에 대해서도 “군사[분야]의 독자적 축이 중요”한 게 맞다며 “이제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군축

이런 점만 보더라도 민주노동당이 남북 정상회담 국면에서 독자적 목소리를 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남북 정상선언의 긍정적 측면을 지지하면서도 동시에 그 한계를 지적하고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민주노동당이 진정한 평화와 통일의 정당으로서 대중에게 변별력 있는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는데도 “[현 통일정세가] 민주노동당과 진보세력의 주장들을 국민적 현안,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시킬 것이며 이 과정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세력은 자연스럽게 의미 있는 정치세력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민경우, ‘정상회담 이후 민주노동당의 과제’)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남북 정상회담은 “정권의 소유물”이 아니고 “정상회담의 주인”은 “민족자주와 통일을 바라는 모든 사람”(김은진 최고위원, 앞의 글)이라며 남북 정상선언의 한계마저 두둔하려 한다면 김은진 최고위원이 걱정하는 “구경꾼 신세”에 머물 가능성은 더 커진다.

예컨대 ‘대응방안 모색 토론회’에서 김동원 민주노동당 자주평화통일위원장은 “군축은 현실성이 없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이 군축을 별도로 제기할 수는 있지만 남북 정상선언이 왜 그것을 담지 못했느냐고 말할 수는 없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북 정권이 평화를 다짐하는 지금만큼 군축을 말하기 좋은 때가 또 언제일까? 군축과 그것을 통한 복지 확충이라는 민주노동당의 대안이 지금만큼 설득력 있어 보일 때가 또 언제일까?

“자유왕래는 당면 과제가 될 수 없다. 너무 이르다”(김동원 위원장) 하고 주장하는 것도 아쉽다. 1960년 4월혁명 때부터 1980년대 말까지 민중 운동이 고양될 때마다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가도 못하느냐”는 구호가 터져나온 의미를 곱씹어야 한다. 분단으로 고통받아 온 사람들을 외면하고 급작스런 인구 이동에 따라 남북 정권이 입을 타격을 먼저 생각하는 관점은 자칫 평화적 분단 고착의 효과를 낼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북한에 진출한 기업들은 남한에서와 같은 경영 방식으로 북한 내 기업을 운영하며 채용과 해고의 자율권을 더 원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이런 기업들에 고용된 북한 노동자들의 조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그들과 남한 노동자들의 연대를 위해 노력해야 하고, 기업의 3통(통신, 통관, 통행)만큼 노동자·민중의 왕래와 교류도 자유로워지도록 만드는 것을 과제로 삼아야 한다.

김근식 교수가 남북경협에는 없다고 시인한 “민중적 차원의 고민”은 민주노동당의 몫이어야 한다.

모순

민주노동당은 이번 대선에서 “코리아 연방” 건설을 주장하겠다고 한다. 이용대 정책위 의장에 따르면, “연방통일국가는 연방제 방식의 ‘통일경제’를 실현하는 것이고 통일경제는 자본주의의 확대가 아니라 … ‘민중이 잘 사는 경제’[이다].”

코리아 연방제 자체에 대한 논의는 잠시 뒤로 미루고, 일단 여기서는 왜 이런 관점이 남북 정상선언 평가에는 적용되지 않는지 묻고 싶다.
만약 “통일경제[가] 자본주의의 확대가 아니”어야 한다면, 자본주의의 확대가 명백한 현재의 남북경협을 민주노동당이 지지하는 것은 모순 아닌가? 만약 “기득권 구조=분단구조”(이용대)라면 당국과 재계 같은 기득권층이 주도하는 현재의 남북관계는 분단구조를 극복하는 과정인가 아닌가?

남북관계/통일 문제에서는 민주노동당의 미래 국가 비전(강령)과 현실 문제 대처 방식(전술)을 잇는 고리가 완전히 실종돼 있는 듯하다. 통일된 미래 국가에 대한 비전은 선전 차원에서 온갖 변혁적 내용을 담은 반면, 현실의 남북관계 정책은 노무현 정부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을 정도인 때도 드물지 않다.

통일(또는 남북관계 개선)과 그 이행 주체, 그리고 민주노동당 집권이라는 각 요소들의 아귀가 맞지 않아 빚어지는 혼란인 듯하다. 자주계열의 바램과는 다른 대목이다. 그런데 만약 민주노동당이 집권 전까지는 남북관계에서 정부 당국의 주도성을 인정하고 그를 지지하는 것으로 역할을 제한한다면, 민주노동당은 스스로 무대 뒤로 가려지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그동안 노무현 정부와는 다른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비전을 내놓곤 했다. 이를 남북 정상회담을 조명하는 데 적용하고 남북 민중에 필요한 요구를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진보정당답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제국주의적 전쟁으로 점철된 시대에 진보는 민족문제에서조차 정부와 기업주들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