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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와병설 논란이 보여 준 것

지난 9월 9일 김정일이 북한 정권 수립 60주년 기념행사에 불참하면서 그가 중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이 우파 언론들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지고 있다.

그러나 김정일의 중병과 관련한 보도는 대부분 아님 말고식 추측성 기사들이다. 그래서 그가 실제로 병을 앓고 있는지, 병세가 얼마나 심각한지 등은 현 시점에서 알 수 없다.

김정일의 와병설을 놓고, 당장 주변 열강은 조심스런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북한 정권의 불안정이나 급격한 붕괴가 동북아의 세력 판도에 미칠 파장을 경계한다.

특히 미국은 여전히 중동에 집중해야 할 처지라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벌어지는 걸 부담스러워한다. 〈뉴욕타임스〉도 미국 정부가 김정일 정권을 독재라고 비난하지만 동시에 김정일 정권의 붕괴가 낳을 파장을 우려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때도 클린턴은 재빨리 애도를 표하며 김일성 사망으로 북한이 불안정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북한과 북한 핵 동결을 위한 제네바 합의를 맺은 바 있다.

그럼에도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이명박 정부와 부시 정부는 ‘개념계획 5029’를 ‘작전계획’으로 격상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작계 5029

〈조선일보〉도 사설에서 “이제는 [개념계획 5029를] ‘작전계획’으로 격상하고 실질적으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됐다” 하고 주장하고 나섰다.

개념계획 5029는 북한에 ‘급변사태’가 벌어지면, 한미연합군이 대량살상무기 확보를 명분으로 북한에 개입하려는 것이다. 또한 북한 주민이 대규모로 탈북하면 이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북한의 ‘치안’을 회복하기 위해 한미연합군이 평양으로 진군하는 것도 포함돼 있다. 이런 호전적인 ‘개념계획 5029’를 ‘작전계획’으로 격상하려는 것은 북한의 ‘유사시’를 대비한 군사적 개입 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실행 계획을 더욱더 구체화하겠다는 것이다.

우익들은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저지하려면 군사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은 대량살상무기를 제국주의적 군사 개입의 빌미로 삼아 왔을 뿐이다. 오히려 미국은 벙커버스터 등 실전에서 사용가능한 소형 핵무기를 개발하고 2001년 〈핵 태세 보고서〉에서 북한 등을 선제 핵 공격할 계획을 세우는 등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전 세계인의 공포를 확산시켜 왔다. 1만 기가 넘는 핵무기를 보유한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

김정일이 사망해 북한 군부가 사태를 장악하면 한반도의 긴장이 높아진다며 이에 대비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주장에는 북한의 강경파와 군부가 한반도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는 시각이 깔려 있다. 우익들은 최근 북한의 핵불능화 조처 중단도 북한 군부의 입김이 강화한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남한과 미국의 지배자들이야말로 한반도 위기의 주범들이다. 1994년 북한 핵개발을 둘러싼 전쟁위기나 1998년 금창리 지하 시설을 둘러싼 위기 모두 미국이 초래한 것이었다. 북한의 핵불능화 조처 중단도 미국이 핵불능화에 상응하는 테러지원국 해제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미국은 자신의 동북아 패권을 유지하고자 북한 위협설을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한미동맹의 군사적 위협은 북한을 더 강경한 자세로 내몰 수 있다. 미국의 대북 압박이 그동안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하게끔 만들었듯이 말이다.

그리고 남한과 미국 정부가 우려하는 ‘급변 사태’에는 민중 봉기 등 북한 민중의 저항으로 북한 체제 전반이 흔들리는 것도 포함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연합군은 점령군으로서 북한 민중의 자주적 활동과 저항을 억누르는 구실을 할 것이다. 마치 1945년 해방 이후 조선 민중의 염원을 미군과 소련군이 짓밟았듯이 말이다.

제물

5029 계획과 같은 군사 개입이 현실화하면, 북한을 한·미·일 삼각 동맹에 대한 완충지대로 여겨 온 중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공산이 크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도 “5029는 북한의 급변사태를 … 동북아 전체로 확대시킬 수 있[으며] … 5029가 실행에 옮겨지면 제2의 한국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이미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북한에 개입하기 위해 2003년부터 북·중 국경 경비를 경찰에서 정규군으로 바꾸고 배치 병력을 늘려 왔다.

물론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직 김정일의 건강이 어떤지는 불확실하며, 현재 그가 통제력을 잃고 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현 상황에서 한국과 미국이 당장에 공세적인 군사 개입을 시도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러나 현재 세계적 경제 위기가 심화하고 있어, 앞으로 전 세계에서 지정학적 경쟁이 첨예해질 개연성이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미국과 중국 등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지역인 동북아에서도 앞으로 지정학적 긴장이 높아질 수 있다. 북한 권력구조의 위기는 저들에게 동북아의 ‘균형’을 일거에 흔들 수 있는 사태이며, 군사적 개입을 해서라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형을 만들고 싶을 것이다.

이처럼 최악의 경우 동북아 최빈국 북한은 제국주의 패권 경쟁의 제물이 될 수 있다. 한반도 민중의 안전과 생명은 이들에게 안중에도 없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저항의 가능성은 없는가?

남한 우익들은 김정일 와병설이 나오자 대북 강경책을 잇달아 요구하고 나섰다. 여전히 ‘주석궁에 탱크 몰고 가자’고 타령하는 조갑제 같은 우익들에게 북한 민중 스스로 북한 체제를 변화시킬 가능성은 관심 밖이다. 그리고 이런 자들이 김정일 정권을 독재 정권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역겹기 그지없다.

한편 많은 사람들은 북한 정권의 불안정이 낳을 혼란을 우려한다. 박노자 씨도 “고통스럽겠지만 북한의 자체적인 ‘자기 개선’, 즉 기존의 통치 집단의 자기 변신 이상으로는 현실적으로 희망적 시나리오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과는 전혀 다른 가능성도 존재한다. 권력의 불안정과 지배자들의 암투가 민중 저항의 계기가 된 사례들이 역사에 많다. 남한에서는 1979년 10.26으로 박정희가 사망하자 이듬해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와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서울의 봄’이 펼쳐진 바 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격하 운동을 펼치는 등 스탈린주의 체제가 일시적으로 약화하자, 1950년대 내내 동독·폴란드·헝가리 등 동유럽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거대한 저항이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북한 지배자들이 혼란에 빠지고 북한 민중이 저항을 일으키는 ‘급변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제국주의 열강과 남·북한 정부가 북한 민중의 저항을 가로막고 짓밟지 못하게 저지하며, 북한 민중의 저항을 지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