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김영진 씨의 글에 답하며:
사회주의자들은 왜, 그리고 어떻게 예술을 탐구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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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서 보이는 몇몇 오독과 오해, 근본적 이견들에도 불구하고 김영진 씨의 글은 내가 쓴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나 역시 위와 같은 입장을 이전의 글에서 표현했기 때문이다. 김영진 씨는 아마도 내가 “어떤 경우에도 음악의 메시지가 중요한 일부가 되고 있는 듯하다”고 말한 것에서 가사의 내용만을 평가 기준으로 삼고 있다고 본 듯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형식적 완성미를 추구하느라 별다른 내용을 담지 못하기도 하던 것에 비
더 중요한 논점이 뒤를 잇는다. 그렇다면 음악이 가진 ‘완성도’나 ‘영향력’, ‘성취’와 같은 것들은 어떻게 측정되는가? 어떤 음악이 왜 ‘혁신적’, ‘창조적’이라고 불리는지, 반면 다른 음악이 어떤 기준 때문에 진부하다고 평가되는지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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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형식적 정교함이나 작법의 독창성은 좋은 음악에 요구되는 첫째 조건은 아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탈리아의 대중문학을 분석하면서 “예술에 대한 탐구는 그것이 왜 ‘읽히는지’, 왜 ‘대중적인지’, 왜 ‘탐구되는지’, 또는 거꾸로 왜 대중이 거들떠보지도 않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지, 그리고 왜 대중의 문화적 삶에서 그것이 빠져 있는지를 조명하면서 수행되어야 한다”고 쓴 바 있다. 김영진 씨는 “음악과 같은 즉자적 예술에 대해 쉽사리 사회적 맥락과 결부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내가 지난 글에서도 지적했듯이, 음악도 다른 모든 예술처럼 인간의 창조물이고, 예술가는 사회의 일부로서 사회적 조건·정서들과 조응한다. 그러므로, 특히 사회주의 신문일수록 예술이 사회와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접근법이 개별 예술 작품이나 예술사를 이해하는 좋은 관점임을 증명하는 예는 무궁무진하다.
트윈폴리오, 한대수, 김민기, 이장희, 김세환, 양희은 등이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 선보였던 모던 포크는 자생적으로 일어나던 청년들의 통기타 문화에 대중운동의 흔적을 뚜렷이 담은 미국 포크를 접붙인 것이다. 은유적 가사, 간소한 사운드, 평이한 코드 진행, 보컬의 비중 있는 배치 등의 특징을 보이는 포크 음악들이 대중적 인기를 얻은 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노동계급의 빈약한 경제적 조건, 군부 독재의 탄압이 불러온 공포와 그에 대한 반항심, 낭만과 즐거움과 희망을 자유롭게 만끽하고 싶어하는 청년들의 욕구가 충돌했던 것을 봐야 한다.
1백40여 명의 예술가들을 고문·구속·연행한 소위 ‘대마초 파동’과 같은 군부 독재의 억압, ‘서울의 봄’과 신군부의 등장, 광주 학살과 정권의 통제 강화 시도 등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정선이나 서유석과 같은 식의 내면화하고 가라앉은 포크, 동요의 포크적 재해석 시도들, 캠퍼스 그룹사운드
뿐만 아니라, 헤비메탈 밴드 ‘시나위’의 신대철은 “두발자유화·교복자율화 조치 이후 … 정치적 상황이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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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에도 쓴 것처럼, 87년 민주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으로 인한 노동계급의 전반적 생활수준 향상, 경제 호황, 사회 전체적인 자유도 증가는 90년대 대중음악을 이전 세대의 그것과 뚜렷이 구분지었다. 비트와 리듬 위주의 장르
한편, 위에서 언급한 사회적 요건들의 영향으로 광범하게 소개된 영미 팝의 영향을 이전 시기보다 더 뚜렷하게 받은 몇몇 밴드들
어떤 사람들은
김영진 씨는
또 김영진 씨는 내가 “‘음악적 영향력을 가진 공간으로 발전’한 이유를 … 메시지의 발전으로 든다”고 주장했다고 하지만, 이는 내 글의 논지를 일면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음악의 ‘메시지’는 가사를 포함한 음악의 모든 구성 요소들의 종합에 의해 구현된다. 음악의 구성 요소들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구성 요소에 대한 필요가 다른 구성 요소의 발전에도 복합적 영향을 끼친다.
하나의 예만 들어 보겠다. 현진영과 듀스 등의 주류 음악 시장에서 춤의 외장재로 취급되던 ‘힙합’과, 한국어의 언어적 특징과 절묘히 맞아떨어지고 미국 힙합에서 찾아보기 힘든 정교한 모음 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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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장기하와 얼굴들의 진부함을 강력하게 역설한 김영진 씨의 주장을 살펴보자. 먼저, 나는 내 글이 내용을 올바르게 반영하는 제목을 달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내 글 어디에서도
앞서 말한 것처럼,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작법을 활용한다는 것은 ‘혁신’, ‘새로운 실험’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아니다. 김덕수 사물놀이패가 혁신적이라고 말할 때, 전통 악기와 장단을 차용했다는 점을 들어 그 의견을 반박하는가? 오히려 전통 악기와 장단을 무대 공연이라는 상황에 맞게 재해석한 것에 더 높은 점수를 주어 혁신적이라고 한다.
내가
바로 여기에서, 지금의 ‘인디’를 분석하는 데 대중운동이 사회에 되먹임한 자기표현 욕구와 경제 위기에서 비롯한 청년들의 좌절감이 중요한 요소인 이유가 나온다. 바로 이런 사회적 배경이 녹아든 덕분에, 장기하의 포크록이 단순한 과거의 답습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장기하는 김광석이 《다시부르기2》에서 모던 포크를 그의 코드로 재해석한 이후 거의 최초로, 그리고 김광석의 코드와는 분명히 다른 ‘해학’이라는 이 시대의 코드로 포크를 재해석했고, 그 영향력은 ‘인디’ 신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것은 인디 신에 이미 존재해 왔던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도 새로운 해석과 표현을 시도할 여지가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마치 클래식은 따분해 하지만 ‘잡리스’의 음악에서는 재미를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김영진 씨처럼 형식적 작법만을 중시하고 사회적 맥락은 덜 중요하게 보는 내재적 관점으로는, 그간 인디신에 만연했던 복고풍이나 ‘루저’의 정서 같은 것들이 왜 장기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대중들에게 전달되었는지, 왜 이것이 대중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그 외에도 분량 상 짚지 못한 몇몇 쟁점들이 있지만, 따로 규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예술에 대한 이런 건설적인 토론이, 마르크스주의가 “첫째, 인류의 개인적·집단적 발전 과정에서 예술이 차지하는 전반적 중요성에 대한 독특한 평가와 이해. 둘째, 예술과 문화의 역사 전체를 이해하는 최상의 분석 방법. 셋째, 개별 예술 작품의 의미와 중요성을 분석하는 데 아주 유용한 관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