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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마르크스주의 ④:
자본주의는 왜 정의롭지 못한 체제인가

자본주의 체제의 법률 제도가 정의를 구현하기는커녕 유전무죄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활동가 팻 스택이 그 이유를 살펴본다

밥 딜런의 노래 “해티 캐롤의 외로운 죽음”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서 사법 제도를 정당화하는 핵심 메시지가 담긴 노랫말로 시작한다.

명예로운 법정에서 판사가 망치를 탕탕 내리치네.

만인이 평등하고 법정이 공정함을 보여 주려고,

법전의 문구를 멋대로 무시하거나 악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귀족들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일단 경찰에게 붙잡히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흔히들 사법 제도는 정의롭고 공정하고 공평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법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고 동료 시민들[배심원]의 공정한 판단에 따라 재판을 받는다고들 말한다.

‘정의로운 사법 제도’는 우리가 사는 체제가 투영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체제에서는 누구나 출신의 귀천을 떠나 엄청난 부와 명예와 정치권력을 얻어 사회의 정상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

과거의 사회들과 달리 오늘날 세계에서 사람들의 지위는 신이 미리 결정하지도, 법률로 정해져 있지도 않다.

그리고 사법 제도라는 좁은 의미의 정의와 사회 전체라는 더 넓은 철학적 의미의 정의는 근대 문명과 민주적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이론이 그렇다는 것이다. 현실은 매우 다르다. 물론, 현실에서 정치인들이나 대중매체가 사법 제도를 강력하게 문제 삼는 것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다. 최근 캔터베리 대주교[영국 성공회 최고위 성직자]가 이슬람 법전(‘샤리아’)에 대해 한 말[무슬림의 문화적 차이를 인정해 샤리아를 적용하자는] 때문에 조성된 히스테리 분위기는 이런 점을 잘 보여 주는 사례다.

물론, 이런 히스테리 분위기를 부추기는 것은 주로 역겨운 이슬람혐오증이다. 오늘날 대중매체들을 보면 하나같이 이슬람혐오증을 추앙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서구의 부르주아 사법 제도가 최상의 사법 제도라는 오만한 생각도 그런 분위기 조성에 일조했다.

오해하진 마시라. 나는 각종 종교에 근거한 사법 제도를 모두 반대한다. 그러나 우리의 법률 제도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권력자들이 영국의 법률 제도로 정의를 구현하는 데 실패했음을 시인하는 듯한 일들이 얼마 전까지도 거의 매주 벌어졌다.

버밍엄 식스[Birmingham Six, 버밍엄의 술집을 폭탄 테러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나중에 무죄로 풀려난 6명], 길퍼드 포[Guildford Four, 길퍼드의 식당을 폭탄 테러한 혐의로 무고하게 옥살이를 한 4명], 브로드워터 팜[Broadwater farm, 브로드워터 팜 지역에서 경찰의 인종 차별에 반대해 일어난 소요 사태]처럼 이 점이 매우 선명하게 드러나는 몇몇 사건들이 있다. 또, 이런 사건들보다는 덜 두드러지지만 잘 알려진 사례들도 있다.

불평등

이런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비슷한 양상이 되풀이된다. 피고인에 대한 대중매체의 히스테리한 보도가 나가고, 경찰의 부패가 드러나고, 이런 부패를 눈감아 주는 법관이 있고, 배심원이 대개 유죄를 선고해야만 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이럴 때 ‘정의’는 사회 전체의 반영물이다. 부자, 권력자, 국가의 무장력, 대중매체가 상황을 쥐고 흔든다. 결백하지만, 영향력이나 힘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피고인이 된다.

아무리 그래도 왜 이렇게 [이론과 현실이] 서로 다른 것일까? 그것은 체제 자체가 본래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체제는 유산자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고 무산자에게 불리하다. 즉, 부자에게 유리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불리한 것이다.

유전무죄의 상징 이건희 ⓒ사진제공 민중의 소리

가난한 사람들은 갓난아기의 사망률에서도 불평등을 경험하듯이, 심지어 태어날 때부터 이 체제는 한 쪽 편을 들고 있다. 부잣집 아이들은 귀족 학교에 들어가 잘 교육받고, 자라서는 부와 권세를 얻는다.

이 아이들은 더 좋은 의료 혜택을 누릴 것이고, 범죄로 희생될 가능성이 적은 더 좋은 환경에서 살아갈 것이다.

부자들은 탈세하다 걸리면 배 째라 하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급여 부당 수령 “범죄”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비난한다.

그렇게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부유해진 부자들은 이 체제에서 사치를 즐길 것이다.

사회의 부를 창출하고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게 만드는 사람들은 평범한 노동 대중이다. 그러나 노동 대중은 자신들이 창출한 부에서 매우 적은 몫을 가져가는 반면, 소수의 사람들은 다수의 노동 덕분에 막대한 부와 혜택을 향유한다.

물론 몇몇 노동자들은 그물을 통과하듯이 제 힘으로 꽤나 부유해질 수도 있다. 그런 소수를 보면서, 사람들은 이 체제가 만인에게 이해관계가 있는 정의로운 체제라는 환상을 품는다. 살아가면서 대개 그런 환상을 품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사법 제도에 대한 환상은 말할 나위도 없다.

돈으로 정의를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때때로 신문에 대서특필될 때가 있다. 미국에서 이런 사례로 항상 거론되는 O J 심슨 사건[흑인 스포츠 스타가 부인 살해 혐의를 받은 사건]은 흥미롭다. 심슨에게 불리한 여러 증거들이 매우 강력한 듯했지만, 주로 흑인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은 심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사람들은 격분했다. 미국의 사법 제도에서 드문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오해하진 마시라. 돈을 주고 자유를 산 갑부들은 많았다. 단지 그런 부자 중에 흑인이 드물었을 뿐이다.

그래서 미국 사법 제도의 역사에는 백인이 흑인에게 범죄를 저지르거나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 일이 허다했지만, 가장 유명한 사건이 심슨 사건이 된 것이다. 정의롭지 않은 사법 제도에서 이익을 보는 사람이 흑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이 격분했던 것이다.

여기서 밥 딜런의 노래가 다시 떠오른다. 딜런은 순진하게도 미국의 법을 잘 모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맨 앞에서 제시한 노래는 부유한 백인(윌리엄 잰징어)이 볼티모어 호텔에서 뚜렷한 이유도 없이 흑인 웨이트리스의 머리를 후려쳐서 살해한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딜런은 미국의 사법 제도가 얼마나 공정하고 공평한지를 대강 노래하고 나서 이 재판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판사는] 아무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바라보았네.

그 자는 어떤 경고도 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살인을 저질렀다네.

법복을 입은 판사는 준엄하고 또렷하게,

벌을 받고 뉘우치기 바란다며 큰 소리로 선고했네.

윌리엄 잰징어, 징역 6개월!

아, 불명예의 의미를 사색하고 모든 두려움을 비난하는 당신,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세요.

이제 눈물을 흘릴 시간이니까요.

이런 순간은 체제의 고유한 불의(不義)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정말로 극적인 사례다.

참되고 진정한 정의를 구현하려면 참되고 진정한 평등과 자유가 존재하는 사회가 필요하다. 즉, 사회주의 말이다.

출처 : 영국의 반자본주의 월간지 〈소셜리스트 리뷰〉 2008년 3월호
번역 이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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