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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자본주의와 예술’을 읽고

〈레프트21〉 11호에 실린 이기웅 교수의 ‘자본주의와 예술’을 읽으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예술의 자율성의 상대적 개념과 기원, 자본주의와 예술의 관계 등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갖게 했다. 특히 자본주의와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부분을 더 흥미롭게 보았는데, 이에 대해 의견을 내고자 한다.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은 예술에서 몇 가지 발전을 이룩했다. 전에는 불가능했던 새로운 예술적 시도와 장르가 등장했다. 자본주의의 국제성은 예술의 국제적 교류도 확장시켰다. TV, 컴퓨터, MP3, 극장 등의 발달로 예술의 저변이 훨씬 확대됐다. 이제는 평범한 사람들이 국제적인 예술 작품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자기 삶의 일부로 여기게 되었다. 이것은 자본주의 발전이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만든 측면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곧 그 가능성을 억제하기 시작한다. 이기웅 교수가 지적한대로 그것은 억압적인 국가 권력의 예술 통제일 수도 있고, 예술의 상품화에서 비롯하는 획일화, 예술가의 자본 종속, 예술의 본원적 가치 붕괴일 수도 있다. 물론 사회적 투쟁으로 예술의 자율성을 잠시 확장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도 이에 대한 사례를 볼 수 있다. 예컨대,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등으로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민주화 열망을 탄압하는 동시에 1975년 대마초 파동을 일으켜 수많은 음악인들을 투옥하고 고문해 발전하던 한국의 대중음악을 송두리째 단절시킨 바 있다. 심지어 전두환 정권은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귀여운 캐릭터로 유명한 만화 ‘아기공룡 둘리’를 반사회적이라는 이유로 연재를 중단시키려 했다.

1987년 항쟁은 어느 정도 정치적 자유의 공간을 열어 놓았고, 그 사이로 예술의 자율성이 확장되었다. 예컨대 1984년에 만들었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은 정부의 방해로 묻혔다가 1987년에야 정식 발매할 수 있었다. 1980년대 후반에 인기를 끈 개그 코너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같은 재벌 풍자 개그는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등장할 수 있었다. 얼마 전 개그콘서트에서 이명박 풍자 캐릭터가 조용히 사라진 것과 대비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예술의 상품화는 이러한 진전에 한계를 부여했다. 게다가 이명박 정권의 한예종 장악과 같은 반동은 그나마 쟁취한 예술의 자율성마저도 위협하고 있다.

이기웅 교수는 이에 대해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집단적으로 투쟁해야 하고, 예술가들이 자신의 요구를 “인간의 해방이라는 궁극적이고 보편적 전망과 결합”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최근 있었던 작가, 가수, 만화가 등 예술가들의 반이명박 시국선언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의 집단적 투쟁만으로는 부족하다. 한국에서도 1987년 노동계급의 반격으로 정치적 자유와 예술의 자율성을 어느 정도 쟁취했듯이 핵심은 노동계급의 투쟁에 있다.

사실 예술의 자율성 요구는 노동계급에게도 이해관계가 있다. 앞서 보았듯이 지배계급의 예술 공격은 체제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의 일환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예술 통제는 사회적 분위기를 경색시키려는 방식 중 하나로 지배계급이 즐겨 사용하는 수법이다. 지배계급이 민주적 권리를 공격하고 사회적 분위기를 경색시키는 것은 주로 노동계급의 저항을 꺾거나 착취를 강화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공격은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과도 연결되어 있다.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에서 전 세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수십억 명의 평범한 노동계급과 억압받는 대중에게 예술은 여전히 그저 잠시 즐길거리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에게 삶은 하루하루 생존해나가기 바쁘고 고달픈 일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예술이 상품으로 계속 존재할 조건이기도 하다. 노동계급은 여기서 얻을 것이 없다. 예술의 상품화는 자본가들의 이익일 뿐이다.

누구나 예술을 즐길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창조력을 발휘할 실질적 기회를 누려야 한다. 자본주의는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든 동시에 억제하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예술의 자율성 쟁취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 체제를 건설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을 통한 인류의 해방은 곧 예술의 진정한 보편화와 자율성의 쟁취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예술의 자율성을 옹호한다면, 노동계급의 투쟁을 지지할 수 있어야 하고, 노동계급은 예술의 자율성을 자신의 요구로 내걸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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