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즈워스 방북과 북미 회담:
얼어붙은 북미 관계가 풀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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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 보즈워스의 방북은 북미 관계 개선을 기대하는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다. 지난 1년 동안 북한 로켓 발사와 2차 핵실험을 둘러싼 북미 간 첨예한 긴장과 갈등에 걱정하던 많은 사람들은 드디어 오바마 정부가 대북 포용 정책이라는 ‘정상 궤도’를 찾은 것 아니냐고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기대와 달리, 정작 보즈워스의 방북 결과는 북미 협상이 매우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회담 직후 보즈워스와 북한 당국은 회담이 “매우 유용했다”고 발표했지만, 지난 몇 달간 물밑 접촉을 통해 조율을 해 왔음에도 6자회담 재개의 구체적 시점과 방식에 관한 합의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여전히 평화체제 이행과 관계정상화를 6자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내걸고 있고, 미국은 북한이 제시한 의제는 6자회담 틀에서만 논의 가능하다며 ‘선 6자회담 복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북한이 제재 해제를 6자회담 복귀의 전제조건으로 요구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미국이 쉽게 이 요구를 들어줄지도 미지수다. 보즈워스 방북 직후 미국이 북한발 무기 선적 화물여객기 정보를 태국에 넘긴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12월 12일치 〈뉴욕타임스〉를 보면, 미 행정부의 한 관리는 미국이 이 사건을 통해 북한과 대화를 하면서도 제재 등 압박 수위를 낮추지 않겠다고 경고한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 처한 위기 때문에 북한과의 관계에서 시간벌기가 필요할 수 있다. 그래서 지난한 협상 끝에 2005년 9·19 공동성명이나 2007년 2·13 합의 같은 합의가 도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북미 관계의 여정을 되돌아보면, 이런 합의가 항구적 평화를 보장해 주지는 못했다. 경제지원 의제는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에서, 평화협정과 관계정상화 의제는 2000년 북미 공동 코뮤니케에서 이미 다뤄진 적이 있지만, 미국이 자신의 입맛에 따라 합의사항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합의사항은 원점에서 다시 논의되곤 했다.
앞으로의 북미 관계 또한 다람쥐 쳇바퀴 돌듯, 협상과 합의, 합의 파기와 강경 대응 등이 교차하는 불안정한 양상을 보일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이 직면한 위기 때문에 북한과 협상에 나섰지만, 미국은 지난 20년간 그랬듯이 강대국들의 각축장인 동아시아에서 자신의 패권을 천명하기 위해 언제든 다시 ‘북한 위협’을 활용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협정이 진정한 평화체제를 보장하는가
최근 북미 협상 전후로 평화협정 체결에 대한 기대가 높다. 언제든 미국이 북한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꿔 이를 막아 보자는 것이다. 강대국들에 의한 강제 분단과 한국 전쟁까지 치른 한반도 민중이 항구적 평화를 바라는 심정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따라서 평화협정 체결 요구는 지지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평화협정이 근본에서 진정한 평화체제를 가져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우선, 이 협정조차 지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사실 미국이 북한을 위협하는 것은 정전협정 체제와 같은 ‘냉전 상황’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탈냉전 이후 여러 강대국들이 미국의 지위를 넘본다는 점 때문에, 미국은 동아시아 강대국들을 견제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북한 위협’을 명분으로 삼는 것뿐이다. 따라서 미국은 언제든지 평화협정에 구애받지 않고, 북한을 위협하려 할 수 있다.
설령 평화협정이 ‘돌이킬 수 없는’ 협정으로 존속된다고 하더라도, 과연 평화협정이 항구적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가 하는 점도 문제다. 벌써부터 평화협정 문제는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쟁점화하고 있는데, 외교통상부 장관 유명환은 북미 간 평화협정을 반대하면서 평화협정 논의가 주한미군 철수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이미 미국과 남한은 주한미군의 영구주둔을 꾀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때 미국과 한국은 주한미군에 대한 전략적 유연성을 합의했는데, 이는 주한미군의 임무를 확대하고 영구 주둔의 명분을 만드는 것이었다.
전략적 유연성 합의에 의하면, 주한미군은 앞으로 단지 북한의 대남 공격에 대항하는 방어 구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중국 등 지역 강대국들을 겨냥해 동아시아 지역에 개입하고 더 나아가 ‘테러와의 전쟁’ 등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에 신속하게 개입할 수 있는 신속대응군 기지로 재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용산 미군기지를 평택 기지로 확장 이전하기로 합의했다.
사실 북한조차 평화협정 체결 이후 반드시 주한미군이 철수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은 지 오래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워싱턴포스트〉에 다음과 같이 인터뷰한 바 있다. “김 위원장은 주한 미군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한국의 입장을 잘 이해했다. … 한반도는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주한미군이 남아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그의 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
주한미군의 구실 변경은 한반도 영토가 미중 간 군사적 충돌을 위한 전진기지가 되는 위험천만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런데 북미 간이든 남북미중 간이든 평화협정이 체결된다고 해서 자동으로 주한미군이 철수한다고 보기 어렵게 됐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진정한 평화체제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평화협정만으로는 부족하다. 미국이 북한을 위협하는 근원적 뿌리를 제거해야 한다. 세계 패권을 위해 강대국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체제, 즉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체제를 변혁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패권 경쟁 당사자의 약속에 의해서도, 북한 당국처럼 군사적 경쟁을 이용하는 것을 통해서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면, 진보진영이 할 일은 그저 얼마나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는지 지켜보며 응원하거나, 북한의 군비 증강을 지지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진영에게는 이런 어긋난 대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체제에 대한 변혁의 씨앗은 오늘날 경제 위기와 전쟁 등 자본주의적 제국주의가 낳는 여러 실패에 대한 대중의 아래로부터 저항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진보진영은 이런 저항을 이끌면서 체제에 대한 근본적 도전으로 발전시킬 임무가 있다. 이 과제가 성공할 때만, 진정한 한반도 평화도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