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훈 기자는 21호 독자편지에서 정부의 교원평가제를 반대하지만, 민주적 교원평가제 도입도 동시에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교원평가제가 교육에 신자유주의적 경쟁을 도입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반대하지만, 그와 동시에 “학생들의 자주적·민주적 운동과 의사표현을 지지·고무”하기 위해 민주적 교원평가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특정 요구들은 특정한 상황과 조건을 고려해 제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요구가 부자연스러워 대중에게 돈키호테식으로 비칠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교조 지도부는 11월 7일 대의원대회를 열어 교원평가제 법제화를 위한 협의기구인 ‘6자협의체’ 참석을 통과시키려 했다(강동훈 기자가 “교원평가제에 대해 언제나 전교조 비판을 삼가야 한다는 것이라면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은 그래서 반론의 번지수가 틀렸다).
전교조 지도부는 ‘6자협의체’에 참여함으로써 학생들의 교원 평가를 포함시킨 정부의 교원평가제에 동요하고 타협하려 했다.
그런데 교찾사 소속 대의원들이 대의원대회 보이콧 선동을 했고, 결국 대회가 무산됐다. 이들이 옳았고 전교조 지도부가 틀렸다. 좌파는 지도부의 모호하고 동요하는 입장이 아니라 정부 안에 대한 분명한 반대를 요구하는 대의원들을 지지해야 한다.
그 노동자들의 시선으로 봤을 때, 민주적 교원평가제 도입 요구는 “원칙”을 설파함으로써 상황의 본질을 모호하게 만들거나 전선을 교란시키는 것일 뿐이다. 상황의 본질은 정부가 경쟁과 통제를 강화할 교원평가제를 강행하려 한다는 것이고, 노동자들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교사 운동도 학생 권리의 관점에서 요구를 제기하고 운동을 건설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얼마나 작위적인가.
물론 사회 변혁 운동에서 학생 등 피억압자의 민주주의 문제는 실로 중요하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이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있으며, 그들이 지금 무엇을 요구하며 투쟁하는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럴 때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요구를 제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강동훈 기자는 구체적인 문제를 추상적인 문제로 대체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