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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가

검찰이 전교조와 공무원노조의 민주노동당 지지 활동과 가입을 “중대한 공안 사건”으로 규정했다. 이것은 명백한 이중 잣대다. 정부 고위 관리들은 대체로 특정 자본가 정당들을 지지한다. 장관들 상당수는 아예 자본가 정당의 정치인이다. 또, 지난 대선 때 교총은 이명박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이런 사례들을 열거하기는 어렵지 않다. 물론 검찰은 이들을 조사하지 않았다.

결국 검찰이 문제 삼는 것은 노동자 공무원들의 정치 활동이다.

그러나 검찰의 주장을 뒤집으면 지배자들의 우려를 발설한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노동조합의 정치 활동이 “공안”, 곧 자본주의적 “공공의 안녕과 질서”에 위협이 된다고 본다.

지배자들은 노동조합의 활동이 현존 사회 질서 내에서 즉각적이고 협소한 이익을 보장하는 데 그치기를 원한다. 그래서 노동조합이 좌파 정치나 사회주의 정치와 접촉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으려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경제적 힘과 노동계급 정치 조직의 결합을 통해 노동자들이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단결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자기해방 운동을 촉진시킬 투쟁을 위한 단결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오늘날 빈부격차 확대, 복지 삭감, 해고, 민주적 권리 제약, 전쟁 등을 둘러싸고 첨예한 계급 갈등이 발생하고 심화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조합과 노동계급의 정치 조직들이 함께 참가하고 행동해야 하는 노동자 투쟁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또, 그래야 한다.

노조의 정치 활동에 대한 지배자들의 공격은 노동조합이 이런 투쟁들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교사·공무원 노동자들의 ‘시국선언’(기본적인 권리인 표현의 자유라 할 수 있는)을 공격한 것도 그래서다.

이 공격이 법원의 무죄 판결로 뜻대로 되지 않자, 이번에는 노동조합과 노동계급 정치 단체(이번 경우에는 민주노동당)의 관련성을 공격하고 있다.

지배자들이 노동조합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런 의도를 가리는 이데올로기적 은폐물이다.

따라서 우리 운동은 전교조·공무원노조의 정치 활동에 대한 정부 공격을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교사·공무원 노동자들은 단지 개별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노동조합원으로서, 집단으로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

이데올로기적 은폐

노조의 정치 활동에 대한 지배자들의 공격은 노동조합 내 기회주의를 강화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19세기 후반에 독일사회민주당의 수정주의자들은 노조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지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사회주의자 레닌이 지적했듯이, 정치적 중립성 표방이 노조 내에 기독교 노조나 자유주의 노조가 등장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노조 규약에서 “정치적 지위 향상” 조항을 삭제하려는 공무원노조 지도부의 시도가 그래서 우려스럽다.

물론 국가 탄압 문제를 간과할 수는 없다. 국가 탄압이 주는 어려움은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올바른 태도는 아니다.

먼저, 그런다고 정부가 공무원노조 탄압을 완화할 것 같지 않다. 더 나아가 공무원노조의 민주노총 가입을 공격하려 할 것이다. 또, 지금처럼 첨예한 계급적·정치적 갈등 한복판에서 그런 후퇴가 노동자들의 (‘비정치적인’) 물질적 조건조차 개선해 줄 것 같지 않다. 불가피하지 않은 후퇴는 조합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후퇴를 부를 명분이 될 것이다.

한편, 우리 운동 안에는 노동자들의 광범한 단결을 위해 노조의 정치적 중립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적지 않다.

물론 노동조합은 사용자들에 맞서 되도록 광범하게 단결해야 한다. 일부 노조들의 민주노총 탈퇴 시도에 반대하고, 공무원노조의 통합과 민주노총 가입을 지지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첫째, 노동조합은 비당파적이며 정치는 정당이 하는 것이라는 식의 정치와 경제의 분업은, 진정한 노동자 계급투쟁을 무디게 하는 대가로 조건 개선을 보장 받는 것이다. 노동조합 투쟁은 경제적 조건 개선에 한정하고, 정치 권력의 변화는 진보정당의 선거운동을 통해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강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조합과 노동계급 정치 단체는 각각 그 성격에 따라 고유한 자기 영역이 있고, 그 안에서 나름 독자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둘은 언제나 그 영역들에 상호침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노동조합의 독자적 존립 근거와 노동조합의 비당파성 문제(또는 노동계급 정치 조직과 긴밀히 협력하는 문제)를 뒤섞어서는 안 된다.

둘째, 노동조합 안에는 불가피하게 정치적 차이들이 존재한다. 누군가는 자본가 정당을 지지하고, 누군가는 ‘노사상생’을 주장하고, 누군가는 파업의 단결을 해치는 주장과 시도를 할 수 있다. 이런 주장과 시도에 맞서 노동자들의 단결을 꾀하려면 정치적 차이를 드러내야 한다.

노동조합에서 정치적 차이를 제기하는 것은 단결에 해롭다고 주장하는 플레하노프(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에 맞서, 레닌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현재 계급 모순의 발전 단계가 이런 개선이 현대 사회 내에서 어떻게 가능한지 하는 문제들을 놓고 불가피하게 ‘정치적 차이’를 제기한다는 점을 망각한다”고 반박했다.

이 때문에 한국을 포함해 많은 나라들에서 여러 노동계급 정치 단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단체들의 단결이라는 문제가 생긴다. 그와 동시에, 특정 나라에서 어떤 정치 단체가 노동계급의 이익을 일관되게 옹호하는 진정한 노동계급 정치 단체냐 하는 문제는 결국 주장과 실천을 통해 입증돼야 하는 문제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정치 단체들이 여러 개 존재한다는 현실이 노조의 정치적 중립성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언제나, 모든 곳에서 노동조합과 노동계급 정치 단체의 협력은 강화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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