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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주년 3·8 세계 여성의 날:
여성은 왜 차별받고, 여성 해방은 어떻게 가능한가

오늘날 여성들의 삶은 모순에 처해 있다.

여성을 수식하는 말은 현모양처가 아니라 ‘여풍당당’, ‘알파걸’ 따위다. 대다수 여성들은 20대 때부터 일생의 대부분을 집 밖에서 일하며 보낸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자 여성들의 의식도 변했다.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성은 전체의 12.8퍼센트밖에 안 되고, 결혼과 출산도 점점 늦춰지고 있다.

여성 노동자의 70퍼센트가 비정규직이고 여성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 남성 임금의 40퍼센트밖에 안 된다. ⓒ이미진

촛불시위 행렬 속에서, 학생회 선거 출마자 중에서 여성들이 많이 눈에 띄는 것도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늘어났다는 증거다.

이런 변화 속에서 여성들은 ‘요즘 세상에 여성이 못할 게 뭐가 있냐’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여성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소수 엘리트 여성들에게서 눈을 돌려 평범한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들여다 보면 여성 차별의 현실이 보인다. 여성들은 대거 사회에 진출해 노동자가 됐지만, 안정적이고 평등하게 노동할 기회는 여전히 적다.

저임금의 저수지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꿈같은 얘기다. 서비스 판매직이나 단순 노무직 등 주로 여성들이 일하는 직종은 임금이 낮고 불안정하다. 같은 일을 해도 여성의 임금은 남성보다 훨씬 적다. 우리은행은 정규직과 비슷한 일을 하지만 임금과 승진, 고용 안정에서 차별 받는 ‘분리직군제’를 도입하면서 이 직군의 98퍼센트를 여성으로 채웠다.

여성 노동자들의 70퍼센트가 비정규직이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남성 평균 임금의 40퍼센트밖에 받지 못해 “저임금의 저수지”를 이루고 있다.

이런 체계적 차별 때문에 여성노동자 평균 임금은 남성의 62퍼센트(2008년 기준)밖에 안 되는데, 이것은 OECD국가 중 최악이다.

여성들은 점점 더 늦게 결혼하고 출산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한창 발휘해야 할 때 아이를 낳느라 불이익을 당하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여성이 아이를 낳고 다시 일을 시작하는 데는 평균 10년이 걸리고, 출산 후 여성들에게 돌아오는 일자리는 대부분 비정규직이다. 아이가 사랑스럽지만, 육아 때문에 사회 활동과 자아실현을 포기해야 하는 데서 오는 답답함과 좌절감, 뭔가 뒤쳐지고 있다는 압박감이 여성들을 엄습한다.

이렇게 여성들이 육아의 굴레에 묶여 있는 상황이 여성 차별이 계속되는 중요한 이유다.

자본주의가 계속 굴러가려면 교육받고 건강한 노동력이 안정적으로 공급돼야 하지만, 기업주들과 국가는 이 모든 책임을 여성들에게 떠넘긴다.

여성 노동력을 더 효과적으로 착취하려고 보육 지원을 늘리고는 있지만, 여전히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한 국공립 보육시설은 5퍼센트대에 머물러 있다. 직장내 보육시설? 아예 기대를 말아야 한다(전체 보육시설의 1퍼센트). 법으로 보장된 유급 육아휴직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S라인과 ‘꿀벅지’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들처럼 ‘성에 솔직하고 당당한 여성’들이 늘었다고 하지만, 그 ‘당당함’의 이면엔 쉼 없는 부위별 다이어트와 피부관리, 최신 유행 따라잡기가 있다. 여성들은 일도 하고 애도 키워야 하지만 동시에 S라인과 ‘꿀벅지’도 가꿔야 한다.

여성은 ‘쭉쭉빵빵’ 몸매와 예쁜 얼굴로 평가된다. 여성의 외모가 곧 여성의 자존감의 원천이 되고, “뚱뚱한 여자는 자기 관리에 실패한 것”이라는 말 앞에 주눅든다.

성형수술 부위는 무려 1백30가지로 세세하게 분류된다. 온갖 잡지와 광고를 통해 여성의 벗은 몸이 팔리고 한낱 눈요깃거리로 전락하고 있다.

한편에서 성해방 담론이 넘쳐날 때, 정작 여성의 자기 몸 결정권은 위협받고 있다.

우파들은 여성이 아이를 낳을지 말지를 선택할 권리를 여성 자신이 아닌, 산부인과 의사들과 검찰·법원이 좌지우지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이명박 정부는 여성들의 삶을 더한층 후퇴시키고 있다. 경찰청장 강희락은 “성매매, 재수 없으면 걸린다”고 했다. ‘한식의 세계화’가 여성부 장관의 임무라던 이명박 정부의 관료답다.

경제 위기의 고통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려는 이명박의 정책 때문에 올해 1월에는 여성 실업자 수가 50만 명에 이르러 1999년 이후로 10년 만에 최악을 기록했다. 최저임금 삭감, 복지 축소 등 신자유주의 정책은 특히 저임금군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여성들의 밥줄을 위협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내놓은 여성정책이라곤 ‘저출산’을 ‘해결’한다며 여성들을 불안정한 단시간 근로로 내모는 ‘퍼플잡’, 여성의 자기 몸 결정권을 부정하는 낙태 금지 정책 따위뿐이었다.

여성 차별의 원인

그렇다면 대체 여성 차별은 왜 생겼고, 어떻게 사라질 수 있을까?

많은 여성들이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같은 성공한 여성의 처세술 책을 뒤지며 뭔가 그럴싸한 대안을 갈구한다. 이런 책 대부분은 ‘남성보다 두세 배 일하라’며 여성의 태도를 바꿀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여성 차별은 여성들 자신의 탓이 아니다. 여성들은 이미 집 밖에서, 집 안에서, 살 빼느라, 녹초가 될 지경으로 충분히 자신을 혹사하고 있다.

그러면 여성 차별이 남성 탓일까?

평범한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을 지배할 수 있는 실질적 권력이 없다.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을 싼 값에 착취하고 육아 지원을 삭감하고 낙태 권리를 박탈할 힘이 없고, 그것을 통해 얻는 이익도 없다.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 투자하지 않는 바로 그 체제의 이윤 논리 때문에 함께 희생되고 있다.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은 쌍용차 노동자나 지금 정리해고 위기에 처한 금호타이어·한진중공업 노동자들, 이들에게 동병상련을 느끼는 수많은 평범한 남성들은 여성 노동자들과 한편이지 반대편이 아니다.

여성들은 어느 위치에 있건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기도 하지만(남성과 달리, 힐러리 같은 여성 정치인의 옷차림과 머리 모양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자매애’에서 대안을 찾기에는 계급에 따른 여성들 간의 차이가 너무 크다.

한나라당 여성 의원들은 ‘기자 성접대 발언’을 한 강희락 경찰청장을 보호하고자 국회 여성위 회의를 무산시킬 정도로 계급적 본능에 충실했다.

신세계 이명희 회장이 주식 ‘1조 클럽’에 들고, GS홈쇼핑 사장의 9살짜리 딸이 주식 87억 원어치를 보유할 동안, 여성 비정규직과 여성 빈곤 가구주는 늘었다.

여성 차별은 여성 개개인의 의지와 남성들 때문이 아니라, 여성의 희생을 대가로 운영되는 체제의 작동방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

자본주의의 권력자들은 여성들이 노동자로 일하는 동안에도 고분고분 아이 돌보기에 헌신하고 남성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길 바란다. 그래서 가족 가치를 수호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입하고 여성 차별을 합리화한다.

이런 체계적 차별 속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되기 십상이다. 가정 폭력과 성폭력이 일어나고,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도 모두 여기서 비롯했다.

따라서 여성들은 인간보다 이윤이 먼저인 체제에 도전해야만 여성 차별의 사슬을 끊을 수 있다.

변화의 가능성

우리는 여성이 남성과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우리는 물질적 풍요가 넘쳐나는 21세기에 왜 여성의 육아와 가사노동을 덜어줄 공동 식당, 공동 탁아소에 과감하게 투자하지 않느냐고 따져 물어야 한다. 여성이 이런 굴레에서 해방될 때야 비로소 여성을 둘러싼 조건이 변하고 여성과 남성의 관계도 평등해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여성들이 노동자가 되면서 노동자들만이 발휘할 수 있는 특유의 힘, 즉 파업이나 집단 행동을 통해 이윤에 타격을 주고 권력자들의 양보를 받아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갖게 됐다. 이런 능력은 여성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준다.

그러나 여성들만의 단결로는 충분치 않다.

여성 노동자 대부분이 일자리가 불안정해 조직력이나 파업의 파급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따라서 이랜드 투쟁이 남성을 포함한 전체 노동자들의 엄청난 지지 속에서 사용자의 양보를 끌어낼 수 있었듯이, 여성들의 투지를 남성 노동자들이 뒷받침할 때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 차별은 지독하게 뿌리가 깊어서 그것을 캐내 여성 해방을 이루려면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그 강력한 힘은 여성과 남성 노동자의 단결에서 나온다.

남성 노동자들도 여성 노동자들의 지지 없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만약 세상의 반쪽이 차별받은 채 남아 있다면 나머지 반쪽의 해방도 불가능하다. 여성 차별이 남아 있다면 그것의 뿌리인 자본주의의 이윤 논리도 온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은 남성이 여성을 보는 시선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비관에 빠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변화의 가능성이다. 함께 투쟁한 경험은 남성들의 여성관도 변화시킬 수 있다.

롯데호텔 남성 노동자는 남녀가 함께한 파업이 끝나고 더는 직장 여성 동료에게 ‘미스 김’이라고 하지 못했다고 한다.

쌍용차 가족대책위 여성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투쟁하는 남성 노동자들을 격려하고 연대를 조직하며 놀라운 투지를 보여 줬다. 투쟁의 경험이 ‘순둥이’ 남편과 그 투쟁에 참가한 여성들까지 투사로 만든 것이다.

이보다 더 격렬한 혁명적 투쟁에 나섰던 남성들은 더 많은 의식의 변화를 겪었다. 그래서 혁명이 가장 멀리 나아간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 당과 선진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남성이었지만, 그들은 최고로 발전한 자본주의에서도 시도해 본 적 없는 여성 해방 조처들을 시도했다.

여성들의 당면한 요구를 둘러싼 여성과 남성 노동자 들의 공동 투쟁 경험은 여성 해방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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