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성의 날의 기원과 역사: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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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은 누구나 ‘여성의 날’을 기념한다. 이명박 정부의 여성부가 행사를 후원할 정도다. 심지어 기업들은 이 날을 상품판매 기회로 삼는다. 그러나 여성의 날의 기원은 전혀 다르다.
1908년 3월 8일 뉴욕 럿거스 광장에 모인 미국 여성 노동자 1만 5천 명이 소리 높여 외쳤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이 아니라 휴식이다!” “우리는 빵과 장미를 원한다!”
당시 이민자이고 여성이며 대부분 10대인 어린 노동자들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초착취 의류 공장에서 하루 12시간 심지어 18시간 동안 일해야 했다. 일을 마치고 좁고 더러운 셋방으로 돌아가면 퉁퉁 부은 다리와 발목을 붙잡고 잠들었다. 겨우 열살 남짓한 아이들도 위험한 기계에 아슬아슬 매달려 일했다.
그래서 여성 노동자들은 더 나은 작업조건에서 일하고 남성 노동자들과 같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 것(‘빵’)과 함께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투표할 권리(‘장미’)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듬해 잔혹한 착취에 맞서 의류 산업 전체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벌인 13주간의 파업은 이를 묘사한 노래 ‘2만 인의 반란’의 한 구절처럼 “여성들도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 줬”다. 여성 평등을 바라는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깊은 감명을 받았다.
‘2만 인의 반란’
독일 여성 해방 운동가이며 혁명적 사회주의자인 클라라 체트킨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1910년에 열린 국제 사회주의 회의에서 체트킨은 뉴욕 여성 노동자들의 감동적인 투쟁이 벌어진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삼아 매년 기념하자고 제안했다. 더 많은 여성들이 뉴욕 여성 노동자들의 용기와 전투성을 이어받아 노동계급으로서 자신감과 의식을 얻고 조직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클라라 체트킨의 바람대로 이듬해 유럽에서 열린 첫 번째 세계 여성의 날은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러시아의 여성 혁명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행사가 “소용돌이치는 여성의 바다를 이루어 전율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고 썼다. 가사에 얽매여 지내던 주부들도 이날만큼은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집회에 참가해 ‘여성과 의회’, ‘노동여성과 상호부조’, ‘주부와 정치는 무슨 관계가 있나’ 같은 기사들을 읽고 보통 선거권을 비롯한 여성 평등 문제를 토론했다.
제1차세계대전이 벌어져 금지되기 전까지 유럽에서는 매년 여성의 날 시위가 치러졌다. 콜론타이는 “각국에서 여성의 날 행사를 치른 뒤 점차 많은 여성이 사회주의 정당에 가입했고 노동조합이 성장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위대하고 위대한 1917년이 왔다. 1917년 3월 8일은 가장 중요한 여성의 날이었다. 이날 굶주림과 추위, 전쟁이 주는 모진 고통을 견디다 못해 러시아의 여성 노동자들과 여성 농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빵과 평화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성난 외침 앞에 러시아 황제(차르) 체제가 무너졌다.
더 나아가 여성 노동자들과 남성 노동자들이 스스로 권력을 잡은 10월 혁명은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며 꿈꾸던 진정한 여성 해방을 눈앞의 현실로 만들었다.
새로운 노동자 정부는 이제까지 여성을 억눌러온 차별적인 법률을 모두 없앴다. 남편 허가 없이 여성 혼자 여행갈 수 없고 부부의 침실에 아내를 다스릴 채찍을 놓던 러시아에서 이혼이 자유화되고 낙태가 합법화됐다. 러시아 여성들은 당시 가장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의 여성들조차 보장받지 못하던 투표권을 얻었다. 남성과 동일한 임금을 받고 해고당할 두려움 없이 출산 휴가를 갈 수 있게 됐다.
다른 한편으로 여성을 가정 안에 갇히게 만들던 가사노동을 사회가 책임지려는 노력이 뒤따랐다. 각 가정에서 여성들이 부담하던 식사 준비와 빨래, 육아를 공동으로 해결할 식당과 세탁소, 탁아소와 유치원이 동네 곳곳에 세워졌다.
세계 여성의 날은 이렇듯 투쟁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투지와 눈물, 저항과 힘의 역사에서 비롯했다. 뉴욕 여성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인 지 1백 년이 더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여성차별 속에 산다. 세계 여성의 날은 다시 거리와 작업장에서 벌어질 여성들의 투쟁 속에서 기념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