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의 삶과 지위, 얼마나 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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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3월 17일 온라인 토론회 ‘한국 여성의 삶과 지위, 얼마나 달라졌을까?’(동영상 보기)의 발표문을 지면용으로 약간 손본 것이다.
오늘날 여성의 지위에 관한 논란이 뜨겁다. 특히, 윤석열이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그러나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여성 차별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사회 곳곳에 뿌리박고 있다.
물론 여성의 삶은 수십 년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여성의 삶과 지위는 어떤 상황일까? 그리고 그 정치적 함의는 무엇일까? 여기서는 한국 여성 삶의 변화와 모순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이 물음에 답해 보려 한다.
얼마나, 어떻게 변했나?
먼저, 여성 삶의 변화부터 살펴보자. 오늘날 여성은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집 밖에서 일한다. 통계청이 임금노동자 수를 집계하기 시작한 1963년 당시 여성 임금노동자 수는 약 57만 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24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러나 약 60년이 지난 현재 여성 노동자 수는 931만 명으로, 무려 16배 이상 늘었다.
1992년을 기준으로 하면, 30년 만에 여성노동자 수는 2배 넘게 증가했다.
이제 임금노동자 중 여성의 비중은 44.8퍼센트로, 전체 노동자의 절반에 육박한다.
그동안 경제 불황은 여성 고용에 악영향을 주긴 했으나, 여성 고용의 증가 추세 자체를 꺾지는 못했다. ‘경제 위기 때 여성이 손쉽게 노동시장에서 퇴출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내 어머니 시대에는 여성이 결혼하고 출산하면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는 일이 흔했지만, 이제 더는 그렇지 않다. 이제 여성노동자 중 기혼여성 비율이 70퍼센트나 된다.
수십 년 전에는 여자라서 못 배우는 설움이 컸는데, 여성의 교육 기회가 늘어난 것도 중요한 변화다. 1970년 여성의 대학진학률은 25.3퍼센트에 그쳤다. 그러나 이제 그 비율은 약 74퍼센트에 달한다. 2005년 이후부터는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남성보다 높아졌다. 그리고 이런 추세가 지속되고 있다.
이런 변화의 결과, 현재의 20~30대 남녀는 청소년기에 대체로 교육과 미래에 대한 동등한 기대 속에서 성장했다. 2021년 여가부의 조사 결과를 보면, 20~30대 남녀는 성적과 입시에 대한 관심, 학업 성취, 리더십 및 교내외 활동에서 성별 차이가 매우 적었다.(‘청년의 생애과정에 대한 성인지적 분석과 미래 전망 연구’)
주요 국가 시험에서도 여성이 두각을 나타내 왔다. 지난해 행정고시 합격자의 약 40퍼센트, 외무고시 합격자의 63.4퍼센트, 변호사시험 합격자의 45.8퍼센트가 여성이었다.
여성 법조인도 눈에 띄게 늘었다. 2000년에는 겨우 3퍼센트밖에 안 됐는데, 2020년에는 판사의 31.4퍼센트, 검사의 32퍼센트, 변호사의 27.8퍼센트가 여성이었다.
여성 의사의 비율도 1980년 13.6퍼센트에서 2019년 26.1퍼센트로 두 배로 늘었다.
여성의 교육 기간과 노동시장 진출이 크게 늘어나면서 지난 수십 년간 가족의 모습도 크게 달라졌다. 사람들은 점점 더 적게, 더 늦게 결혼한다. 초혼 건수는 30년 전의 절반 미만으로 감소했다. 1970년에 미혼 여성은 평균 23살에 결혼했지만, 이제 그 연령은 30살로 올라갔다.
이혼이 크게 늘면서, 이혼을 꺼리던 사회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1인 가구도 40년 전에는 4.8퍼센트에 불과했지만, 이제 32퍼센트나 된다.
여성들은 아이를 점점 더 늦게, 더 적게 낳는다. 1970년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은 4.53명이었지만 2021년에는 0.81명밖에 안 된다. 20대부터 아이를 줄줄이 낳고 키우느라 평생을 보낸 이전 세대 여성들의 삶과는 크게 달라진 것이다.
성에 대한 태도도 꽤 개방적이 됐다. 이제 여성에게 섹스는 ‘견뎌야 하는 것’에서 ‘즐길 수 있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오늘날 젊은 여성들은 이전 세대보다 낙태권 요구나 ‘내 몸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에 더 적극적이다.
전반적인 사회 변화와 대중 운동 덕분에 남성에게 유리한 법들도 많이 사라졌다. 가령, 재산 상속 문제에서 아들-딸을 차별했던 상속제도가 1990년대 초에 사라져, 모든 자녀가 같은 비율로 상속받게 됐다. 호주제도 2008년에 폐지됐고, 이혼 시 재산분할에서 여성 배우자의 기여도가 전보다 더 많이 인정받는 추세이다.
이런 변화들은 분명 여성에게 진보였다.
지속되는 차별
그렇다면 여성 차별은 과거지사가 됐나? 이런 주장은 주로 우파가 퍼뜨리지만, 평범한 청년층 남성의 일부도 이렇게 여기는 듯하다. 자신들은 여성 차별을 별로 경험하지 않고 자랐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20대 노동시장의 성별 격차는 다른 세대보다 적다고 생각한다. 법적 차별도 대부분 사라졌다고 본다.
이는 변화된 현실의 한 단면을 나타내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주관적인 개인들의 경험을 근거로 사회적 차별의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 게다가 법 앞의 평등이 곧 실질적 평등을 뜻하지는 않는다.
수십 년간 사회 현실의 변화가 있었음에도 성차별은 많이 남아 있다. 일부 차별은 완화됐지만, 일부 차별은 강화되기도 했다.
여성 고용률은 계속 증가하는 추세이지만, 아직 남성에 못 미친다.
출산과 육아로 인한 여성의 경력 단절은 완화되고는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남아 있다. 직장에서 한창 경력을 쌓을 30~40대에 상당수 여성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잠시 직장을 쉬거나, 육아와 병행할 수 있는 질 낮은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2019년 여성가족부 조사 결과, 임신·출산으로 직장을 떠난 여성들이 다시 일자리를 얻는 데는 평균 7.8년이나 걸렸다. 이때 비정규직 비중이 급증하고, 평균임금도 경력 단절 전보다 27만 원이나 깎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일들의 결과로 성별 임금 격차는 여전히 매우 크다. 2021년 여성의 평균임금은 남성의 64.2퍼센트에 불과하다. 1998년 이후 23년째 거의 그대로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영향으로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법제화됐지만, 여전히 현실과 격차가 크다.
여성이 처한 현실은 윤석열과 이준석의 주장과 달리 개인 능력 탓이 아니다. 이제 여성은 학력과 능력, 일에 대한 열의 등에서 남성에 뒤지지 않는다. 그래서 젊은 여성들은 차별에 더 큰 좌절감을 느끼며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보수 정치인들에게 분노하는 것이다.
여성 차별이 유지되는 이유는 양육과 돌봄이 여전히 개별 가족, 특히 여성에게 주로 떠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에서 비롯한 문제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강하고 교육받은 노동력이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것은 생산 시스템의 유지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양육과 돌봄의 책임을 국가에게 지우지 않고 개별 가정에 떠넘겨 지출을 최소화한다. 이윤이 그들의 최우선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국가와 기업인들은 여성을 전업주부로만 남겨두는 건 낭비이므로 여성을 일터로 더 많이 끌어내 사업을 더 확장하길 원한다. 국가가 제한적이나마 양육 지원에 투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양육의 부담을 주로 가족에 떠넘기는 방식은 고수한다.
그래서 국가는 여성에게 ‘일도 더 열심히 하고 애도 잘 보라’고 해 왔다. 이것이 슈퍼우먼 신드롬과 시간제 일자리가 급격히 늘어난 이유이다. 지난 20년 간 급증한 시간제 일자리의 70퍼센트 이상을 여성이 차지한다.
시간제는 임금과 노동조건이 대개 매우 열악하다. 월평균 임금이 92만 원밖에 안 된다. 이는 정규직 임금의 약 26퍼센트밖에 안 되는 것이다(김유선, ‘비정규직 규모와 실태’, 2021년 11월).
낙태권이 여성의 권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지배계급이 여성의 몸을 노동력 재생산 수단으로 여겨 통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가족 내에서 하는 역할이 사회의 성차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가령 여성 비하는 여전히 많다.
성적 자유의 확대는 분명 여성들의 숨통을 틔워 줬지만, 여성의 몸과 이미지에 대한 상품화가 발전하는 모순도 커졌다.
여성을 외모로 평가하고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분위기도 줄지 않았다. 그래서 여성들은 화장과 피부 관리, 다이어트, 성형 등의 압박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직장 내 성희롱, 디지털 성범죄 등도 여전히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여성 내 계급 차이
사회의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여성이 줄어드는 ‘유리천장’ 현상도 여전하다. 특히 한국은 유리천장 지수가 높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2020년 기업 임원 중 여성의 비율은 5퍼센트가량밖에 되지 않고, 여성 국회의원도 19퍼센트에 불과하다.
유리천장은 구조적 성차별의 일부로서, 사라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을 뚫은 극소수 여성의 존재가 곧 여성 해방은 아니다. 소수 엘리트 여성들이 국가와 기업 등의 고위직에 올라간다고 해서 여성 일반의 조건이 개선되거나 차별이 완화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이것을 20여 년간 경험했다. 최근인 문재인 정부하에서 여성 장관은 역대 최다였지만 여성 일반, 특히 노동계급 등 서민층의 조건은 나아진 게 별로 없다.
여성의 삶과 조건은 성별에만 좌우되지 않는다. 계급적 지위에서 받는 영향이 훨씬 더 크다. 상층계급 여성들도 차별을 겪지만, 노동계급 여성이 겪는 차별과는 비할 바가 못 된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이 가진 부와 권력으로 차별의 효과를 크게 완화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계급 여성의 처지 개선에는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적대적이다.
최근 한 언론에 보도된 여성경제인협회 회장의 가장 큰 고민은 보육시설 부족 같은 게 아니라, 중대재해법이었다. 이 법이 자신들의 이윤 추구에 걸림돌이 된다고 성토한 것이다. 이런 자본가 여성과, 어린 자식을 산재로 잃고 투사가 된 고故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씨는 같은 여성이지만 공통점이 별로 없다.
중간계급 지향의 여성계 지도자들은 유리천장을 부수고 고위직에 여성 몫을 늘리는 것을 가장 중시해 왔다. 그들은 주로 민주당을 통해 의원이나 장관 등으로 자본주의 국가기구에 진출하여 성평등 개혁을 이루려 해 왔다.
이런 프로젝트 때문에 막상 민주당 정부가 성평등 염원을 배신할 때나 노동계급 여성의 조건을 후퇴시키려 들 때 여성계 지도자들은 정부 비판을 삼가거나, 쟁점을 호도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여성 노동자들의 잠재력
‘여성 혐오’라는 말이 유행이지만, 이는 객관적 사회관계와 사회구조를 분석하는 용어가 아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은 여성 배제가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들을 사회적 생산 과정에 점점 더 깊이 끌어들여 여성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며 굴러가고 있다.
마르크스는 현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주체로 노동계급에 주목했다. 노동자들이 평상시에 소외를 겪지만, 노동자들의 노동 없이 자본주의 시스템이 굴러갈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특히, 노동자들이 집단적 조직과 투쟁 과정에서 의식이 변화한다는 것도 알았다.
여성이 노동계급의 큰 부분이 됐다는 사실은 여성 노동자들도 남성 노동자들과 함께 근본적 사회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여성이 단지 성차별의 피해자에 머무는 게 아니라, 차별과 착취 모두에 맞서 싸울 능력과 힘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뜻한다.
여성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이나 저임금 직종에 좀 더 많이 종사한다 해서, 여성 노동의 중요성이 줄어들지 않는다. 그리고 조직하고 싸울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마트, 학교 비정규직, 톨게이트 등 여성 비정규직 투쟁 사례는 이를 잘 보여 준다. 최근 여성의 노조조직률이 크게 증가해, 이제 민주노총 조합원 셋 중 하나가 여성이다.
이런 추세 속에 노동계급 여성과 남성이 같은 이해관계와 잠재력을 공유하면서 연대를 구현할 잠재력도 커졌다. 이 과정에서 예전에는 여성 개인의 고충으로 취급됐던 직장 내 성희롱 같은 문제들이 남녀 노동자들이 함께 싸워야 하는 노동조건 문제가 되기도 한다. 몇 년 전 철도 자회사 승무원 여성 노동자들이 겪은 관리자의 성희롱에 맞서, 남녀 조합원들이 근절 대책을 요구하며 함께 싸우고, 철도노조 정규직 조합원들도 연대한 것은 하나의 사례이다.
하지만 잠재력이 언제나 잘 구현되는 건 아니다. 노동조합의 조합주의(편협함과 경제주의) 때문에 노조가 차별 반대 입장을 내놓는 정도를 넘어서 성차별 반대 운동에 자기 조합원들을 실질적으로 동원하는 일은 그동안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연대의 가능성과 소중함을 인식하고 이를 기층에서 구현하려 애쓰는 혁명적 좌파의 구실이 중요하다. 사용자와 정부, 주요 언론이 온갖 이간질로 성별 간 분열을 조장하기 때문에 이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노동계급 여성 대다수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실질화, 그것을 위한 최저임금 대폭 인상, 양질의 일자리, 보육 지원을 비롯한 공공서비스 대폭 확충, 온전한 낙태 권리 보장 등이 필요하다.
혁명적 좌파는 착취와 차별 완화에 필요한 요구들을 놓고 여성과 남성 노동계급이 동참하는 개방적이고 폭넓은 대중 운동을 건설해야 하는 책무를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