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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강제병합 1백 주년:
한일병합의 역사에서 이끌어내야 할 교훈들

1백 년 전 한일병합으로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한일병합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욕구 때문이지만, 더 넓게 보면 당시 동아시아 패권을 둘러싼 열강 간 경쟁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19세기 자본주의의 세계적 팽창 과정은 제국주의를 동반했다. 아니 제국주의를 통해 자본주의의 세계화가 가능했다. 동아시아는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과 수탈에 직면했다. 서구는 야만족들에게 ‘자유 무역’의 미덕을 가르치기 위해 함포를 동원했다.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개방’시켰고, 곧이어 일본은 미국에게 굴복했다.

중국이 굴욕을 당하자 조선은 경악했다. 조선은 강력한 반(反)서구화를 내세우며 전통 체제를 보수해서 대응하려 했다.

1909년, 일본의 강제병합에 저항하다가 처형당한 의병들

조선인들이 서구에 품은 반감은 단지 보수 엘리트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의 반서구 감정이 단지 세계 흐름에 눈이 어두운 무지몽매함이나 편협한 국수주의의 발로만은 아니었다.

당시 ‘문명‍·‍개화‍·‍개방’이라는 대세가 지금처럼 당시 조선인들에게 자명한 것은 아니었는데, 이는 무엇보다 서구식 근대화가 야만적이고 잔인했다는 간단한 사실 때문이었다.

이미 조선인들은 중국에서 서구의 ‘근대인’들이 한 짓을 모르지 않았다. 그들이 강제한 자유무역과 시장 경제는 전통적 가내공업을 몰락시켰다. 당시 동아시아를 휩쓴 가뭄 때문에 수백만 명이 굶어 죽어 해골이 들판을 뒤덮었지만, 곡물의 상품화는 전통적인 국가의 재난 구제 시스템을 붕괴시켜 재앙의 규모를 비할 데 없이 크게 만들었다. 태평천국의 난에서 볼 수 있듯이 제국주의자들은 굶주림에 지쳐 반항하는 민중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불균등결합발전

이런 일들은 조선의 개항 이후 특히 일본에 의해서 고스란히 반복됐다. 1894년 동학농민봉기의 주요 요구에 외세 배격과 쌀 수출 금지가 들어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강화도 조약 이후 근대화의 압력을 더는 무시할 수 없었던 조선 정부는 나름으로 대응을 하려 했다. 어느 정도의 근대적 개혁 조처는 피할 수 없어 보였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조지 노벡은 트로츠키의 불균등결합발전 이론을 좀더 일반화시킨 바 있다. 그는 결합발전의 형태를 두 가지로 구분했다.

1) 후진 사회가 선진 문화의 산물을 단순하게 ‘흡수’하는 경우다. 예컨대, 인디언은 사회질서의 근본적 재배치 없이 돌도끼를 철도끼로 대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변화는 철도끼를 가져온 백인들의 문명에 단지 약간만 의존하면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2) 후진 문화의 요소들이 선진 문화로 통합된다. 예컨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모피 무역에 뛰어들어 돈이 그 사회로 유입됐을 때, 원시 공산제적 관습에 반해 사적 이해관계를 세운다든지, 새로운 인디언 무역상들과 모피 사냥꾼들을 세계 시장에 종속시킨다든지 하는 ‘혁명적’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

조선 정부와 온건 개혁파 들은 첫 번째 경로를 원했다. ‘동도서기’, ‘중서체용론’ 등의 논리로 조선 사회의 근본적 개혁 없이 근대의 산물을 도입하는 식이었다. 이에 따라 상투를 자르고, 군대에 신식 소총을 도입하기도 했고, 대한제국기에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흉내 낸 군주제를 시도했지만, 상황에 대처하기에는 매우 미온적이었다.

여러 열강의 내정 간섭과 군사 개입 때문에 조선 정부는 이런 미온적 개혁마저 일관되게 추진할 수도 없었다. 브루스 커밍스의 지적대로 “전지(全知)한 천재가 한국의 왕좌에 앉아 있었다 해도 자국의 영토를 겨냥한 그런 쟁탈전의 와중에서는 한국의 ‘근대화’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을 두고 경쟁했던 주요 열강은 중국, 러시아, 일본이었다. 중국은 전통적 조공체제를 ‘근대화’해서 조선을 실질적인 식민지로 만들고자 했다.

러시아 역시 동아시아로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남하정책에 한반도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하마터면 식민지나 반식민지로 전락할 뻔했던 일본은 서구의 제국주의 세력이 태평천국의 난 진압 등 중국 문제에 힘을 집중하는 틈을 이용해 독자적 근대화에 착수할 기회를 얻었다. 신흥 아류 제국으로 등장한 일본은 서구 열강에 자신의 성과를 과시하고자 했다. 조선은 최적의 먹잇감이었다. 일본은 조선 침략을 발판으로 명실상부한 열강의 반열에 오르고자 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조선 정부가 독립을 지키려고 채택한 전략은 이런저런 열강을 끌어들여 그들 간에 세력균형을 맞춘다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곡예였다. 조선 집권층의 각 분파들은 러시아나 중국을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했고, 급진 개화파는 일본을 끌어들여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려 했다.

물론 잠시 열강 간 세력 균형이 이뤄지기도 했다. 특히 청일전쟁 이후 러일전쟁에 이르는 기간이 그랬다. 그러나 그것이 조선에게 혜택을 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조선 정부는 그 대가로 광산, 산림채벌권, 철도 부설권 등 각종 이권을 열강에게 나눠 줘야 했다. 이런 와중에도 민비가 일본 자객에게 살해되고, 왕은 외국 대사관을 떠돌았다. 심지어 일본은, 1945년에 미국과 소련이 그랬던 것처럼, 러시아에게 38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분비물”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세력균형은 일본에게 유리하게 급격히 바뀌었다. 이는 중국에서 벌어진 사태의 결과이기도 했다. 의화단의 난을 틈타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자, 영국과 미국은 이를 저지하고자 했다.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었고,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원조를 받아 러시아와 전쟁에 돌입해 승리했다.

결국, 한반도는 일본이 차지하게 됐고, 열강은 이를 승인했다. 예를 들어 미국은 가쓰라 테프트 조약을 맺어 일본의 한국 지배권을 용인했다. 또, 그들이 볼 때 “썩어빠진 동양 문화의 악취나는 분비물”(조지 케넌)인 조선인이 독립하겠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기도 했다.

고종은 일본의 침략을 막고자 열강에 호소했지만, 누구도 경청해 주지 않았다. 마치 팔레스타인인들이 유엔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듯이, 고종이 헤이그 세계평화회의에 밀파한 특사들은 무시당했다.

강제병합이 임박하자 저항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안중근은 일본이 동아시아 연대를 배신한 죄를 물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일본의 침략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한 것은 지방의 일부 양반과 민중이었다. 1908년 당시 일본인들이 추정한 무장 게릴라들의 수는 6만 9천8백32명이었고, 그들과 일본군 사이에는 거의 1천5백 회의 충돌이 있었다.

일본은 이 저항을 잔인하게 진압하고 나서 강제병합을 공식화했다.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조선을 강제병합했다. 그 후 30여 년의 일본의 식민통치 기간에 수많은 조선인이 고통을 당하고 희생됐다.

지난 8월 10일 일본 총리 간 나오토는 소위 ‘사죄’를 하면서 정신대 문제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

지난 8월 10일 일본 총리 간 나오토는 “식민지 지배가 가져다 준 많은 손해와 고통에 대해 여기에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죄”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사죄’는 얼마나 진정성이 있을까? 8월 15일 제2차세계대전 종전일을 앞둔 시점에서 한 발표인데도 왜 중국에는 사죄하지 않았을까?

며칠 전 간 나오토의 자문 기구인 ‘새로운 시대의 안전보장과 방위력에 관한 간담회’가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일본의 군사 정책은 더욱 호전적이 될 듯하다. 이 보고서는 그동안 일본이 공식적으로 표방한 비핵3원칙을 개악해서 핵무기 반입을 허용하자고 제안한다. 미일동맹 강화를 염두에 둔 것인데, 미국의 핵이 “지역 전체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 중국 해군에 대응해 군사력도 재배치해야 한다고 했다. 얼마 전 일본은 30년간 유지해 온 잠수함 18척 체제를 개편해, 20척 이상을 보유하겠다고 발표했다. 결국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하토야마 시절 잠시 삐걱댄 미일동맹을 강화하고, 일본 자위대의 공세적 재편을 지속하겠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일본은 1백 년 전에 그랬듯이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긴장을 고조시키는 주범중 하나다.

사실, 미일동맹 강화를 위해서도 일본이 어느 정도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려는 제스처는 필요할 수 있다. 자민당 정권 시절 총리 아베 신조처럼 과거 일본의 만행을 옹호하는 행위는 동아시아 주변국의 민족주의를 자극해, 미일동맹의 지도력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비례해 주변국들로 하여금 중국의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부추길 수도 있다.

반제국주의

한일병합의 역사에서 오늘날 우리가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이 두 가지 있는 것 같다.

첫째, 제국주의 간 경쟁과 세력균형을 활용해 동아시아 지역의 안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미국을 이용해 중국을 견제한다는 생각이나, 중국을 이용해 미일동맹을 견제한다는 생각은 위험천만한 생각이다. 특히 한반도가 이들 열강 간의 이해관계가 교차하고 있고, 군사적 긴장이 높은 지역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둘째, 반제국주의 저항에서 자국 지배계급이 동맹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1백 년 전 조선 정부든 급진개화파든 당시 기득권 세력들은 민중의 반외세 저항을 비난하고 탄압하는 데서는 일치했다. 그들의 반란이 기득권 세력을 위협하는 반란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조선 왕조가 일본군을 동원해 동학농민군을 학살했다. 그들은 민중반란이 외세의 침략보다 더 두려웠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주류 지배자들은 말로는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를 비난하지만, 오늘날 제국주의적인 미일동맹에는 침묵한다. 말로는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지만, 위안부 문제, 강제동원 문제 등 숱한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데는 한국 정부의 책임도 크다. 그동안 역대 한국 정부는 행여 일본을 중심축으로 하는 미국의 동아시아전략에 누가 될까 봐, 행여 한일 간의 경제 관계가 나빠질까 봐,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해 왔다.

천안함 사태 이후 더욱 격화되고 있는 제국주의 패권 경쟁과 군사적 긴장 고조를 볼 때,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이 더 폭넓게 건설돼야 한다. 이것이 한일병합 1백 년을 되돌아보며 내려야 할 결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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