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9월 칠레 국민연합 정부 등장 40주년:
국민연합 정부는 어떻게 등장했고 왜 무너졌는가?
〈노동자 연대〉 구독
1970년 9월 4일,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살바도르 아옌데가 당선했다. 아옌데의 당선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를 축하하는 대규모 군중이 칠레 거리를 뒤덮었다.
전 세계 언론들은 아옌데를 “세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대통령”이라 불렀고, 좌파들은 ‘사회주의로 가는 의회적 길’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체 게바라가 죽은 후 ‘변혁’이 가능하다는 희망이 희미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아옌데는 6개 정당으로 이뤄진 국민연합의 후보였다. 국민연합은 사회당과 공산당 같은 노동계급 정당뿐 아니라 중간계급 정당도 포함했다.
대중 투쟁
대선 전 칠레는 사회 모순이 커지고 있었다.
1968년과 1969년, 물가가 50퍼센트가량 올랐고, 실업자가 늘었다. 노동자 30퍼센트는 최저임금도 받지 못했다. 이에 저항하는 파업과 시위가 거세게 벌어졌고,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커지고 있었다. 1969년에는 2천 건 정도였던 파업이 1970년에는 5천 건 이상으로 늘었다. 공장 점거도 1968년 다섯 건에서 1970년 1백33건으로 크게 늘었다.
토지 개혁을 요구하는 농민들의 토지 점거도 광범하게 벌어졌다. 토지 점거는 1967년 아홉 건에서 1969년 1백48건으로 늘었다. 교육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투쟁도 있었다.
이처럼 아옌데를 권력에 올려놓은 것은 무엇보다 거대한 대중 투쟁이었다. 아옌데의 당선은 노동계급의 자신감이 커졌음을 보여 줬고, 노동계급의 자신감을 다시 고무했다.
아옌데의 국민연합 정부는 임금을 인상했고 토지 개혁을 실시했다. 그가 말한 ‘사회주의’는 국가가 개입하는 혼합 경제를 뜻했다.
아옌데의 개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 기업이 소유한 구리 광산을 국유화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정부는 칠레의 가장 큰 수출 산업을 통제했지만 대부분의 기업은 여전히 사적 자본가들 소유로 남았다.
아옌데는 자본주의 근본 질서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대통령 취임 전에 대중매체, 교육 제도, 교회, 군대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보장법’에 서명하기도 했다.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지키려는 기구들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런데도 아옌데의 온건한 개혁은 곧 반발에 직면했다. 미국은 (군부에 지원하는 것 외의) 지원을 중단하고, 부채를 상환하라 압박했다.
1971년 11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가 칠레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아옌데 반대자들이 결집했다. 중간계급 여성 수백 명이 물자 부족을 의미하는 뜻으로 빈 냄비를 들고 우익 정당이 조직한 시위에 참가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냄비를 잘 다룰 줄 몰라 하녀들을 데리고 나왔다. 이는 아옌데에게 분명한 경고를 보내는 자리였다.
아옌데의 당선으로 더한층 자신감을 얻은 노동자·민중은 온건한 개혁 이상을 원했다. 아옌데가 당선한 첫 해 동안 파업이 1천7백 건 벌어졌고, 토지 점거는 1천3백 건 가까이 발생했다.
칠레 지배계급이 진정으로 두려워한 것은 아옌데가 추진한 점진적 개혁이 아니라 그 이상을 ─ 권력 문제까지 포함해 ─ 원했던 노동자·민중의 아래로부터 투쟁이었다. 아옌데는 이런 투쟁을 고무하지 않고 억누르려 했다. 1971년 5월에 그는 이미 농민들에게 토지 점거를 중단하라고 요구했고,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행동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아옌데는 지배계급을 달래려 했다. 그러자 지배계급과 우익은 더 자신감을 갖게 됐다. 1972년 1월과 2월, 우익 정당들은 잇따라 의회에서 좌파 총리를 탄핵하고 추가적인 국유화를 금지했다.
트럭 소유주들이 파업을 조직한 1972년 10월은 전환점이 됐다. 사장들은 트럭을 차량 보관소에 묶어 놓고 스스로 무장했다. 당시 유통에서 육로 수송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이를 막은 파업의 목적은 분명했다. 국가 경제를 마비시켜 아옌데를 퇴진시키거나 개혁을 중단하게 하는 것이었다. 상점 주인들도 가게 문을 닫았고, 공장주들은 직장 폐쇄를 했다. 변호사, 의사, 치과의사 등도 동참했다.
그러나 지배계급이 이렇게 목에 칼을 들이대는 순간에도 아옌데는 무력했다. ‘법을 지키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결국 노동자들은 국민연합 정부와는 독립적으로 자신들의 힘을 쓰기로 했다.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수송을 하고 닫힌 상점 문을 열었다. 공장주의 사보타주에 맞서 사수대를 꾸려 기계를 돌렸고 분배를 조직했다. 수도 산티아고 중심부에서만 노동자 8천 명이 수송을 하겠다며 자원했다. 노동자들은 “민중 권력을 건설하자”며 대규모 행진을 벌였다.
달래기
이런 격렬한 계급투쟁 과정에서 코르돈(산업벨트)이 등장했다. 1917년 러시아의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 1919년 독일의 레테(평의회), 1979년 이란의 쇼라(파업위원회) 같이 혁명적 시기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조직이 칠레에도 등장한 것이다.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투쟁한 덕분에 트럭 소유주들의 파업을 무찌를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아옌데는 몇몇 장성들을 내각에 들이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것은 노동자 계급의 힘 대신에 군대를 선택하고, 자본주의적 ‘질서와 평화’를 지키겠다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지배계급을 달래려는 아옌데의 이런 시도는 오히려 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줬을 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위기는 커졌다. 1973년에 인플레이션은 4백 퍼센트가 넘었고, 실질임금은 50퍼센트 삭감됐다. 구리 광산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아옌데는 군대를 동원해 노동자 투쟁을 탄압하는 한편, 사보타주로 아옌데를 끌어내리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기독민주당 등 우파와는 타협했다.
아옌데는 계속 주저했지만, 지배계급은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투쟁이 자신들의 이익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미국의 지배계급도 이런 투쟁이 칠레 밖으로 확산될까 우려해 아옌데를 제거하려 했다. 호랑이를 달래려 떡 하나 주면 결국 호랑이는 몸뚱이 자체를 먹으려 하는 법이다.
1973년 6월 29일, 소퍼 대령이 군사 쿠데타를 시도했다. 노동자들은 즉각 공장을 점거하고 방어조직을 구성해 무장하며 쿠데타에 저항했다. 군부 다수는 아직 때가 이르다고 판단해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고,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어떠한 야당도 쿠데타 시도를 비난하지 않았다. 이는 예행연습일 뿐이었다. 이제 문제는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냐가 아니라 언제 일어날 것이냐가 됐다.
7∼8월에 군대는 여러 대중 조직과 코르돈, 노동조합을 공격했다. 쿠데타 시도에 맞서 노동자들이 지니고 있던 무기들을 빼앗고 지도자들을 잡아다 고문했다. 이처럼 쿠데타로 가는 길을 열어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군이 헌법을 존중할 것이라며 군부를 다시 내각으로 불러들인 아옌데였다.
이 와중에 국민연합의 주축이던 공산당은 ‘좌·우익 폭력 모두 반대’라는 포스터를 붙이며, 노동자들에게 자제하라고 요구했다. 지배계급은 이를 쿠데타 성공의 청신호로 받아 들였다.
결국 1973년 9월 11일 육군 참모총장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아옌데 정부는 맥없이 무너졌다. 곧이어 지배계급은 노동계급의 기층조직까지 파괴하는 체계적이고 철저한 복수를 시작했다. 3만 명에 이르는 노동조합 대의원, 코르돈 활동가 등 노동계급 최상의 투사들을 살해했고, 더 많은 사람을 고문하고 감금했다.
매일 아침 산티아고의 마포초 강을 따라 훼손된 노동자 사체가 떠내려 왔다. 지배계급은 단순한 복수를 한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의 노동계급에게까지 경고하고 협박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잔혹한 학살은 지배계급이 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에 얼마나 겁먹고 두려워했는지를 보여 준다.
대학살
칠레의 비극적 결말이 주는 교훈은 명백하다.
첫째, 자본주의 국가 기구는 중립적이기는커녕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군대, 경찰, 사법부 등 각종 억압 기구들은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둘째, 사회주의로 가는 의회적 길은 없다. 사회주의자가 의회 다수를 차지하거나 행정부 수반으로 선출된다 해도, 지배계급은 자신의 이익을 침해하려는 시도를 필사적으로 저지하려고 사장 파업, 직장 폐쇄, 투자 중단 등 무슨 짓이든 다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칠레 지배계급처럼 법과 민주주의는 간단히 무시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사회주의 정부’를 뒤엎을 것이다.
결국 진정한 개혁을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본가들을 압박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자본가들이 소유한 생산수단을 점거하고 생산을 마비시키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필수적이다. 칠레 노동자가 그랬듯이 말이다.
셋째, 그러나 그런 투쟁이 자동으로 노동계급의 승리를 보장하진 않는다. 혁명까지 이를 수 있는 격렬한 계급투쟁 상황이 무한정 지속될 수는 없다. 지배계급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제압하고 기존 질서를 회복하든지, 노동자들이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사회를 통제하며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세우든지, 둘 중 하나다.
따라서 궁극의 승리를 위해선 자발적인 노동자 투쟁이 자본주의를 뛰어넘도록 지도할 수 있는 준비된 변혁 조직이 필요하다. 대다수 칠레 좌파 조직은 국민연합 소속으로 개혁주의 틀을 벗어나길 거부했고, 결정적 순간에 노동자 투쟁을 통제하는 구실을 했다. 혁명과 반혁명의 기로에서 계급 타협적인 국민연합에 의존하지 않고 노동자들의 독자적인 투쟁을 고무하는 변혁 조직이 절실했다. 불행히도 칠레에는 이런 조직이 없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좌파 정부들의 도전이 갈림길에 직면한 오늘날에도 40년 전 칠레의 비극적 경험은 더 나은 세계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을 줄 뿐 아니라 날카로운 경고 또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