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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김용욱 기자의 답변을 읽고:
명확히 해야 할 문제들

김용욱 기자는 〈레프트21〉 40호 독자편지란에서 내 비판에 대한 반론을 펼쳤다.

첫째, 김용욱 기자는 “동아시아에 화려하게 복귀하려는 미국”이라는 말을 “상대적 변화”를 뜻하는 것으로 썼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여기서 명확히 해야 할 진정한 문제는 단어 뜻이 아니라 천안함 사건을 바라보는 인식 차이다. 김 기자는 천안함 사건이 “[미국이] 동아시아에 화려하게 복귀”할 계기를 제공했다고 본다. “한국 정부”는 “개입할 빌미를 주”며 미국을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반면, 나는 미국이 천안함 사건의 주요 관련자이자 최대 수혜자라고 본다. 미국은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돌아온’ 게 아니라 한반도 주변 긴장의 원인 제공자로서 ‘이미’ 여기 있었다.

천안함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한미 양군은 서해에서 합동군사훈련(키 리졸브)을 하고 있었는데, 전쟁 상황을 가정한 이 훈련의 작전지휘통제권이 미국에 있었다는 것만 봐도 미국이 서해상에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복귀?

김 기자의 주장과는 달리, 중국에 “경고”를 보내려는 미국의 “일련의 압박”도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새로 나타난 변화는 아니다. 미국은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을 추진해 왔고 이것이 중국을 자극해 지난 몇 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군비 증강 같은 긴장이 조금씩 쌓여 왔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추진된 주한미군 지위 변경(‘전략적 유연성’)과 한미동맹의 전략적 재편은 미국의 세계전략의 일부일 뿐 아니라 중국도 겨냥한 것이다.

둘째, 김용욱 기자는 ‘과연 일본이 지금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제1의 동맹이라는 지위를 잃었는가, 한국이 그것을 대체했는가’ 하는 물음에 냉전 이후 세계에서 “미국과 주요 동맹 간 이해관계의 불일치가 발생”할 수 있다는 단순히 원론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그리고는 미국과 독일의 관계를 예로 들었다.

그러나 미일 동맹의 현 상태 분석을 이런 유추로 대체할 수는 없다. 일본과 독일은 경제와 정치 상황, 주변국과의 관계, 역사 등 여러 면에서 서로 다르므로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지난 20여 년 동안 일본에서 미국과의 관계 재편이 주요 쟁점이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54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하토야마가 미국 대등외교와 아시아 중시를 들고 나온 것은 이것의 반영이었다. 그러나 후텐마 기지 문제를 통해 드러난 것은 일본 민주당이 일각의 기대와는 달리 지금 결코 “탈미(脫美)” 또는 “탈구입아(脫歐入亞)” 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은 1990년대와 2000년대 내내 미일동맹을 유지·강화하고자 노력했다. 미국의 주류 정치인들은 일본이 ‘아시아의 영국’이기를 바란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전략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지위를 순식간에 다른 국가로 대체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그것을 “한국 정부에 빼앗[겼다]”는 식의 최근 회자되는 주장은 미국에 알아서 기는 게 최선이라는 한국과 일본의 한미동맹 중시 우파들의 천박한 시각이 깔린 주장이다.

셋째, 김용욱 기자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을 [이란 제재 문제]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는 바람에 세계 체제 질서라는 더 큰 맥락을 놓[쳤다]”는 나의 비판에 자신의 글의 주된 축은 “미-중 갈등이라는 세계 체제 질서”였다고 썼다.

그러나 나는 되묻고 싶다. 이란 제재 문제를 왜 미중 관계에서 봐야 하는가? 지금이 미중 신냉전 시대인가? 중국은 미국을 세계적 차원에서 견제하는 글로벌 파워가 됐는가? 아직 그렇지 못하고, 앞으로도 그다지 녹록치 않을 것이다.

이란 제재는 미국의 중동전략의 장애물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이란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모두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이 크다. 이런 상황은 오바마의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의 관심사는 핵무기 없는 세상도 인권도 아니고, 오직 자신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다. 미국은 이란을 고립시키고 굴복시켜, 그 지역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만큼 경제적·정치적으로 약한 국가로 만들려 한다.

물론 제재는 이란의 평범한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지난해 거리에서 솟구쳤던 저항 운동이 제재를 빌미로 한층 탄압받을 것이고, 이라크 제재 때처럼 보통 사람들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우리는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미국의 이란 제재와 그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협력에 반대해야 한다. 우리가 한반도라는 프리즘이 아니라(이런 관점은 ‘파병’ 문제에만 관심을 갖거나 ‘한반도’ 전쟁 위기에 더 주목했다) 국제주의적 관점에서 이라크 전쟁을 분석하고 반전 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었듯이, 지금도 그런 관점에 서야 한다.

미국의 중동전략

아쉽게도 김용욱 기자는 38호 글에서 미국이 중국을 이란 제재에 동참시키는 문제와 이를 위해 어떻게 대북 제재를 이용했는가 하는 부차적 문제에 지나치게 몰두했다. 물론 미국은 중국을 달래서 이란 제재에 동참시키고 싶어한다. 그래야 제재의 효과도 확실히 내고 자신의 영(令)도 서니까 말이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 제국주의의 프로젝트를 돕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것은 미국의 쉽지 않은 처지를 보여 주지만, 이것을 “주된 축”으로 삼아 이란 제재 문제를 분석할 수는 없다.

대북 제재가 이란 제재 문제에서 중국의 “양보를 얻기 위한 [미국의] 비장의 카드”였다거나, 미국이 “대북 제재에서 한국 정부의 손을 들어준 대가로” 이란 제재를 요구했다는 주장은 (둘이 서로 모순되는 것은 제쳐 놓고서라도) 미국이 대북 제재에 별 관심이 없고 별 이해관계도 없는 제3자 같은 잘못된 인상을 준다. 또, 미국이 천안함 사태를 한국에 양보 압력을 가하는 “지렛대”로 삼았다는 주장은 (첫 번째 문제에서 다뤘듯이) 미국이 천안함 사태에 끌려 들어와 한국 편을 들어줬다는 잘못된 인식을 반영한다.

물론 미국은 한국 정부에 이란 제재 동참 압력을 강하게 가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천안함 사태에서 미국에 빚을 졌다는 식으로 보지 않더라도, 미국의 압력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사실, 한미 경제·정치·군사 관계 자체가 미국이 활용할 수 있는 지렛대 아닌가.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 파병을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일종의 교환으로 여겼노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한국 정부가 자국 이해관계의 득실을 계산한 결과 (한미동맹이 중요하다고 보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프로젝트를 돕기로 했다는 것이고, 우리는 이에 한사코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