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현대차 정규직 활동가가 말한다:
사회주의 정치가 일관된 연대를 가능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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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86년에 현대차에 입사한 후 평범한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때도 노조 건설에 주도적이지는 않았다.

1987년 당시, 나는 2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1공장 동료 수천 명이 몰려와
그러나 사측은 불법이라며 우리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고 했다. 나와 동료들은 분노했고, 공장과 주변 일대에서 강력한 투쟁이 벌어졌다. 완전히 우리들의 해방구였다.
거대한 투쟁 때문에 노동자들의 자신감은 무척이나 높았다. 1988년 현대차노조 이영복 위원장이 직권조인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조합원이 1만 명 이상 모여 집회를 하고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겪은 후 나는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다 1990년에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이 벌어졌다. 노동자들은 경찰을 막으려고 울산 양정동 도로를 점거하고 싸웠다. 공장 안에서도 경찰력 투입에 반대하고 싸우자는 선동이 지속됐다.
그러나 당시 현대차노조 이상범 위원장은 투쟁이 공장 담벼락을 넘어 확대되니까 통제하려 했다. 결국 직권조인을 했고, 투쟁은 사그라졌다. 골리앗 투쟁이 패배로 끝나면서, 나는 비로소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연대해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1991년 5월에는 백골단 쇠파이프에 맞아 강경대 열사가 숨졌다. 현대차 노동자들도
백골단
당시 나는 대규모 시위가 연일 벌어지는 서울 소식이 무척 궁금했다. 그래서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 때 서울로 가서 대학생들에게 그 투쟁에 대해 물어 봤다. 소련이 붕괴하면서, 자주파
때마침 전야제 장소에서
이후 그 동지들과 노동조합 관료주의에 대해서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에는 이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1991년에 나는 현대차 대의원이었고, 별명이
그래서 나는 노동조합 투쟁을 잘하기 위해서라도 올바른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사회주의 활동을 하게 됐고, 노동자들을 정치로 설득하고 행동으로 올바름을 입증하려 했다. 이런 활동 속에서 수배가 되고 구속되기도 했다.
지금 현대차 비정규직 투쟁에 대해 사측은 정규직을 걱정하는 것처럼
정규직들이 비정규직 투쟁을 지지하게 하려면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려는 사측의 논리에 맞서야 한다. 이런 흑색선전과 공세에 적극적으로 반박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선 계급 분단을 숨기는 각종 논리를 명확히 반박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정치 문제를 회피하는 노동자주의나, 투쟁보다는 협상에 치우친 개혁주의 정치는 한계가 많다.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투쟁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사회주의 정치야말로 노동자들의 정치이고 투쟁의 길잡이다. 이런 정치가 나로 하여금 비정규직 투쟁에 헌신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