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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캘리니코스 논평:
혁명인가 쿠데타일 뿐인가?

레온 트로츠키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 레닌이 다음과 같이 독일어로 말했다고 회상한다. “에스슈빈델트(현기증이 날 정도다).”

지난 몇 주를 돌아보면 혁명가든 혁명가가 아니든 많은 사람이 아찔함을 느꼈다.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에서 1월 14일 튀니지의 대중이 벤 알리의 독재 정부를 무너뜨리기까지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두 주 반이 지나 이집트에서는 더 강력한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가 대중 시위로 쫓겨났다. 그렇다면 이들 사건으로 무엇이 얼마만큼 변했을까?

전략·정보 웹사이트 ‘스트랫포’의 제국주의적 현실론자인 조지 프리드먼은 변한 것이 거의 없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혁명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시위대는 정권은 고사하고 무바라크도 쓰러뜨리지 못했다. 군부가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시위대를 핑계로 삼아 무바라크를 쫓아낸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군부는 2월 10일 무바라크가 제 발로 물러나지 않으리라는 것이 확인되자 사임을 강요하기 위해 쿠데타나 다름없는 짓을 했다.”

프리드먼이 보기에 이집트 혁명은, 무바라크가 자신의 아들인 가말을 계승자로 삼으려 하면서 빚어진 무바라크와 군부 사이의 갈등을 군부가 해결할 수 있었던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이 분석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이 분석에서는 무바라크가 퇴진하기는 했지만 그가 이끌던 체제는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가장 중요하게는 이집트 국가의 핵심, 바로 억압 기구들이 건재하다.

중앙보안군은 1월 28일 거리 전투 과정에서 산산이 흩어져 버렸을지 모르지만 군대는 건재하다.

실제로, 군 장성들이 지난주 금요일 행동에 나선 이유 중 하나는 군대가 동요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성들은 많은 징집병과 하급 장교가 시위대와 우호와 친선을 나누면서도 과연 충성심을 유지할지 우려했을 수 있다.

1978~79년 이란 혁명에서 샤 정부가 무너진 것은 몇 달 동안 시위와 파업이 벌어질 때마다 군대가 유혈 참극을 벌이면서 군의 사기와 응집력이 허물어졌기 때문이었다.

체제 수호

권좌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무바라크의 고집은 그러한 시나리오를 상기시켰다. 그 때문에 미국 정부와 이집트 군부는 무바라크를 냉혹하게 내쳤다.

그러나 군부는 무바라크를 쫓아내고 스스로 권력을 맡으면서 엄청난 주목을 받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군부 최고위원회의 출현은 1952년 이후 가말 압둘 나세르가 이집트를 통치하던 시절의 군사평의회, 즉 혁명지도위원회 같은 기구들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최고위원회의 수장인 모하메드 탄타위는 나세르가 아니다. 최근 위키리크스의 폭로로 밝혀진 이집트 주재 미대사관의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카이로 인근의 [국방부] (전용) 클럽에서는 탄타위를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중급 장교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탄타위를 ‘무바라크의 푸들’이라고 부른다.”

이 증언에 비춰 보면 군사평의회는 현상 유지를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 확실하다. 동시에 이것은 프리드먼 분석의 오류를 보여 준다.

무바라크와 군부 사이의 갈등이 어느 정도였든 장성들이 무바라크를 제거하는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집트 전역에서 조직된 대중 행동 때문이었다.

현재 군부는 호리병에서 나온 거인 지니를 다시 병에 담으려 한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무바라크의 하야를 앞두고 며칠 동안 벌어진 사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 파업 물결의 확산이었다.

이것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집트 노동자 투쟁은 1940년대 이후 가장 격렬했다.

앞으로 이집트에서 1905년 러시아 혁명기에 로자 룩셈부르크가 분석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상호작용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우선, 정치적 승리에 고무된 노동자는 반란을 일으킨 원인이었던 경제적 고통에 관한 해결책들을 요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투쟁은 정권 자체를 제거할 정치 운동을 강화시킬 수 있다.

이집트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