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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주의는 끝났는가?

최근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이하 SWP)의 안팎에서 ‘레닌과 볼셰비키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혁명정당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 속에서 나온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이 글은 오늘날 한국에서 레닌주의 정당을 건설하려는 활동가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최근 몇 주, SWP와 이 당이 구현하려 한 정치 전통이 종말을 맞이했다는 ‘선언’이 영국 좌파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가디언〉 칼럼니스트 오웬 존스는 “SWP와 그 동류의 시절이 끝났다”고 발표했다. 이 말이 맞을까?

2013년 1월 열린 SWP 정기 협의회에서 절정을 이룬 몇몇 내부 논쟁을 계기로 SWP에 대한 공격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이번 협의회에서는 까다로운 징계 안건 하나를 다뤘다.

그러나 그 이후 더 폭넓은 정치적 이견이 드러났다. 협의회 준비 기간에 두 개의 분파가 결성돼, SWP가 발전시킨 민주집중제 모델을 바꾸려 했다. 민주집중제 모델이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속한 조직의 의사 결정 방식을 말한다.

이 쟁점을 두고 협의회에서 격렬한 정치적 논쟁이 벌어졌고, 이번 협의회를 끝으로 임기를 마치는 중앙위원회(당의 지도부)가 민주집중제에 기초해 내세운 입장이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불행히도, 소수 사람들은 이 결정을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징계 사안에 대해 심각하게 왜곡된 해석을 담은 정보들이 계속 흘러나와 인터넷에 퍼졌고, 일부 주류 언론이 이런 왜곡된 정보를 받아들여 보도했다.

소수파는 이런 보도를 이용해, SWP가 이제는 [운동에] “해악적”이라고 주장하며 일련의 요구를 발표했다. 그들의 요구는, 특별 협의회를 열어 정기 협의회의 결정사항을 무효화할 것, 새로 선출된 중앙위원회를 불신임·해임할 것, 당 구조를 대폭 바꿀 것 등이었다.

우선, 이번 일로 인터넷의 어두운 측면이 또다시 환기됐다. 인터넷은 엄청난 해방감을 주지만, 동시에 황당한 가십거리가 퍼지고 그것이 마치 사실인 양 고착화하는 통로 구실을 하기도 한다. 돈이 많아서 변호사를 고용해 이를 막거나 할 처지가 못 되면, 피해자는 그저 손 놓고 있어야 한다.

유명 인사들과 달리 조그마한 혁명 조직은 그런 데 쓸 자산이 없을뿐더러, 정치적 분쟁을 부르주아 법정에서 해결하는 것에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더구나, 이 사건을 두고 소수의 개인들이 ― 유명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 블로그와 SNS를 이용해 SWP 내부에서 캠페인을 벌였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자신이 민주주의를 그토록 찬미했으면서도, 정작 그 활동에 대한 책임은 아무도 물을 수 없게 돼 있다. 그들은, 책임감 없이 권력을 행사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밥맛 떨어지는 방식으로 보여 줬다.

여기서 도출되는 정치적 결론만 아니면, 이 모든 상황은 그저 SWP와 그 지지자들에게만 관심 있는 소재였을 것이다.

오웬 존스와 SWP 전 지도부였다가 최근에 당을 떠난 “돈 마요” 모두, “마요”가 “레닌주의에 대한 교조적인 트로츠키주의 모델”이라고 부른 것을 표적 삼았다. 존스처럼 “마요”도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효가 다한 모델”이라고 본다.

마르크스주의 전통

이 논쟁의 진정한 쟁점은 무엇인가? 트로츠키주의 제4인터내셔널에서 1951년에 축출된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초석을 놓을 때부터, SWP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이어가려 노력했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시작한 이 전통은, 볼셰비키당이 ― 최초이자 현재까지는 유일하게 ― 노동계급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1917년에 정점을 찍었다. 1917년 10월 혁명 때 레닌과 함께 볼셰비키를 이끌었던 레온 트로츠키는 1920년대 중반과 1930년대 초반에 혁명의 타락과 스탈린 독재의 부상에 맞서 싸웠다.

전통을 이어간다는 게 뭘까? 몇몇 신성한 공식을 아무 생각 없이 되풀이하는 것이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종파는 스탈린주의자들뿐 아니라 트로츠키주의자들 사이에도 많다. 그러나 진정으로 전통을 구현한다는 것은 끊임없는 창조적 혁신을 필요로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론과 실천의 통합이므로, 혁신 과정은 지적인 차원과 정치적 차원 모두를 포함한다.

마르크스주의가 이론적으로 발전하려면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심화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의 타겟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다. 마르크스는 역작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의 구조적 논리를 밝혀낸 바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발전해 왔고, 마르크스주의의 분석도 그에 맞춰 발전해야 한다. SWP는 이런 혁신 과정에 기여해 왔다. 그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크리스 하먼의 위대한 유작 《좀비자본주의》가 있다.(물론 이것이 유일한 사례는 아니다.)

현재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은 위대한 부흥기를 누리고 있다. 이 부흥 덕분에 정치 활동가들은 1930년대 이래 자본주의 최대의 위기에서 자본주의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자본주의를 타도하려면 노동계급 조직이 필요하다’는 마르크스의 정치적 유산에는 상대적으로 명확하지 않은 점들이 있다.

SWP의 전신인 ‘국제사회주의자들’은 1968년에 레닌주의 조직 모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즉,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때까지 레닌 지도 하의 볼셰비키가 취한 방식을 우리가 조직하는 방식의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는 것이다.

유연한 전술

사실, SWP의 창립자 토니 클리프가 레닌 전기(《레닌 평전 1 - 당 건설을 향해》, 책갈피)에서 밝혔듯, 볼셰비키의 정치 전술과 조직 방식은 매우 유연했다. 그러나 거기엔 몇 가지 공통된 요소들이 있었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이후 경험에서 확인된 것처럼, 노동자 투쟁은 자본주의 지배의 뿌리에 도전하는 혁명적 행동으로 거듭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은, 자본주의 체제와 그에 맞선 저항 사이에 타협을 종용하고 체제를 용인하는 전통들에 의해 이런 혁명적 운동이 억제돼 왔다는 점도 보여 줬다.

역사적으로 이런 전통의 가장 중요한 흐름은 개혁주의다. 개혁주의는 주류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의 승리 이후 서방의 공산당이라는 형태로 주로 표현됐다. 그러나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조직들이 비슷한 구실을 하기도 했다. 1980~81년 위대한 폴란드 연대노조 운동 때의 진보적 가톨릭 좌파, 1978~79년의 이란 혁명과 오늘날의 이집트 혁명에서 나타난 다양한 이슬람주의가 대표적이다.

이런 [개혁주의] 전통이 지닌 영향력은, 자본주의가 노동계급의 의식을 파편화하고 계급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더 작은 일부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부추기는 경향 때문에 강화돼 왔다.

그리하여 1871년 파리코뮌부터 1984~85년 영국의 광부파업까지, 대규모 노동계급 투쟁은 정치권력의 문제가 제기됐을 때 영웅적이고 가슴 뭉클한 패배로 끝나곤 했다.

1917년 10월의 경험이 그토록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볼셰비키는, 1917년 2월혁명으로 차르(러시아 황제)를 타도한 이후 몇 달 동안 압도적으로 강력했던 개혁주의의 (이 경우에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통제를 뚫고, 권력 장악에 대한 노동계급 다수의 적극적 지지를 확보했다.

이런 일은 볼셰비키가 흔히 말하는 “전위정당”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17년 10월혁명 이전에 볼셰비키는 대부분의 시기에 러시아 노동계급의 소수만을 대표했다. 그러나 이 소수는 공통의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을 토대로 단결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은, 이 이해를 바탕으로 조직하고 행동했다.

볼셰비키는 러시아 노동계급 투쟁에 집단적으로 개입했다. 개입하면서 그들은 그 투쟁이 발전하는 데 기여할 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노동자들이 정치권력을 위해 투쟁할 필요를 깨닫도록, 정치권력을 장악하도록, 볼셰비키를 지지하도록 노동계급을 고무했다.

그리하여 볼셰비키는 그들 자신과 동료 노동자들 사이의 지속적인 대화의 과정을 거쳐 노동계급 다수의 지지를 획득했다. 볼셰비키는 때때로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도 하고, 노동자들이 볼셰비키를 실제로 앞질러 나가는 것을 보며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당은, 다양한 무리의 노동자들에게 생기는 경험의 불균등함과,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의 의식을 파편화하는 것을 극복해야 했다.

혁명가들로서 볼셰비키가 조직한 방법은 10월혁명이 타락하면서 잊혀졌다. 10월혁명은 신생 노동자 국가가 고립되고 내전과 경제 붕괴로 노동계급 자체가 파괴된 결과 타락하고 말았다.

1960년대 후반에 레닌주의의 기치로 모일 때, 우리는 볼셰비키당의 원래 방식을 적용하고자 했다. 하지만 레닌주의를 다시 시작하는 것은 단순하지 않았다.

먼저, 우리는 볼셰비키가 맞선 것과는 다른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노조 관료들에 뿌리내린 개혁주의가 차르 치하의 러시아에서보다 영국과 서유럽 국가들에 훨씬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고조되는 투쟁

다음으로, 이런 상황들은 끊임없이 변화를 겪었다. 1968년 즈음엔 고조되는 노동자 투쟁의 파도가 1974년 초 결국 히스 보수당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까지 나아갔는데, 우리는 1968년 이래로 방향을 바꿔 이 투쟁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런 그림은 서유럽 나머지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때는 프랑스의 1968년 5월과 1969년 이탈리아의 “뜨거운 가을”의 시대였던 것이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이 되니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1974~79년 집권한 노동당 정부는 노동자들의 투지를 가라앉혔고 노동조합 현장 지도자들을 경영 구조 속으로 포섭했다.

그러고 나서 1979년에 대처가 총리가 됐다. 대처는 히스가 시도했던 자본가들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재가동했고, 광부를 비롯한 몇몇 핵심 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을 꺾었다. 대처 정권과 미국의 레이건 정부 시절은 세계적으로 정세의 일대 전환기였다.

그들이 선도한 신자유주의는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노동계급 조직을 약화시켜 자본의 이윤율을 회복시키려는 것이었다. 그 효과는 모순적이었다. 요즘의 세계경제 위기가 보여 주듯, 신자유주의는 근본에 깔린 이윤율의 문제를 해소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더욱 분열됐고, 조직들은 약해져 갔다.

이것이 자본주의에 맞선 저항이 사라졌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그 반대다. 근본적으로 아랍 혁명은 신자유주의가 이집트, 시리아, 튀니지 같은 나라들에서 양극화를 심화시킨 데서 비롯한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경향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다.

첫째, 노동계급의 주류 정치 조직들이 쇠퇴하고 있다. 한때 서구에서 가장 큰 정당이던 이탈리아 공산당은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우경화하고 시장을 받아들이는 등 신자유주의에 적응하려 해 왔다.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의 신노동당 프로젝트처럼 말이다.

이런 노선은 재앙으로 끝났을 뿐 아니라, ― 브라운이 런던 금융가들과 맺은 사악한 협정이 2008년 금융 재앙을 초래하는 데 일조했다 ― 한층 더 분열해 있는 노동계급 안에서 ‘사회자유주의’ (이제 많은 사람들이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이렇게 부른다) 정당의 기반이 계속 쪼그라들고 있다. 이것이 개혁주의가 끝장났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난해 프랑스 대선에서 올랑드가 사르코지를 이겼고,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이 보수당을 앞서고 있다. 그럼에도 개혁주의가 점점 약해지고 있긴 하다.

둘째, 1999년 11월 시애틀 시위 이래로, 신자유주의나 때때로 자본주의 자체를 겨냥한 정치적 급진화의 물결이 일어났다. 2003년에 벌어진 이라크 점령에 맞선 거대한 항의 시위가 그 물결의 정점이었다. 2011년 아랍 혁명은 스페인의 5월 15일 운동과 맨해튼에서 전 세계로 번진 ‘점거하라’ 운동의 발생에 일조했다.

이런 운동은 엄청나게 중요하다. 하지만 이 운동들은 비슷한 수준의 노동계급 투쟁이 일반화하거나 심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물론, 노동자들은 중요한 구실을 했다. 같은 해 6월 30일과 11월 30일에 영국에서 벌어진 연금 파업, 그리스에서 벌어진 총파업을 비롯한 노동자 투쟁, 2012년 11월 14일에 남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파업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보라.

거리냐 공장이냐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있었던 급진화의 중심에는 저항하는 노동계급이 있었지만, 오늘날의 급진화는 지금까지는 그렇지는 않은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오늘날 투쟁이 가장 멀리 나아간 이집트에서조차, 호스니 무바라크를 타도한 때부터 2년 동안 거리의 운동이 공장에서의 운동보다 더 중심이었다. 이 점에서 어떤 결론을 이끌어내야 하는가?

노동계급이 끝장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우리는, 자본주의의 모순적이고 불균등한 팽창이 광범한 사회 계층을 임금노동자로 끌어들이는 것을 보았다.

내가 언급한 투쟁들은 (내가 말하지 않은 사례들도 많은데, 예를 들어 중국과 베트남 같은 자본 축적의 새로운 중심지에서 벌어진 투쟁들 같은 예다) 자본의 변화하는 요구에 맞춰 구조조정된 노동계급의 학습 경험을 보여 준다.

사실 노동계급 투쟁의 파고가 올라갔던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 사이 혹은 그 이전에 보였던 투쟁 패턴을 오늘날의 노동계급이 반드시 반복할 것이라고 믿을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현재 급진화 방식에서 드러난 것은,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계급 투쟁의 중심적 구실이 과거에 비해 덜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재계에 더 깊이 연루되면서 주류 정당들이 위축된 것과 함께) 현대 반자본주의 운동에서 정치 조직이 미심쩍은 시선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닌주의가 혁명적 조직이 취할 최선의 형태라고 여전히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입증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것이 존스와 그 부류가 제기한 비판에서 드러난 중요한 쟁점이다. 존스의 다음과 같은 말이 그의 대안인 듯 보인다. “영국에는, 어떤 정당성도 없이 밀어붙이는 긴축에 맞서 일관된 대안을 갈구하는 모든 사람이 함께하는 운동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 말은 매우 좋게 들리지만 완전히 잘못된 방향이다. 점점 더 노동당 내의 지위가 높아지는 존스는 실제로 다음과 같이 쓰기도 했다. “노동조합이 수백만 명의 슈퍼마켓 계산원, 콜센터 노동자, 공장 노동자들과 노동당의 연결을 계속 보증하는 한, 노동당이 노동계급을 위해 싸우도록 강제하는 투쟁을 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존스가 “긴축에 맞선 진정한 대안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노동당 당수 에드 밀리반드에 비판적이라 하더라도, 그는 노동당을 좌경화하는 데 활동가들이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1920년대 이래 몇 세대에 걸쳐 일부 활동가들이 추구해 온 프로젝트다. (실제로 존스는 자신의 부모가 밀리턴트 경향의 회원으로 서로 만났다고 말한다. 밀리턴트는 1980년대에 대부분이 출당될 때까지 노동당을 사회주의 정당으로 바꾸려 분투한 경향이다.)

노동당의 본질

[그러나] 노동당을 왼쪽으로 이끄는 투쟁이 실패한 것은 투지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노동당의 본질 자체가 그 당 내의 좌경적 도전을 꺾은 것이다.

노동당은 선거에 연연하기 때문에 투쟁을 위한 전술 토론과 지지 활동보다, 보수당과 상업 언론이 주도하는 선거 여론에서 이기기 위한 노력에 더 치중한다. 밀리반드가 연금 파업에 반대한 것은 노동당 지도부의 투쟁 배신의 길고 우울한 역사 중 가장 최근의 사건일 뿐이다. 이 역사는 1920년대의 램지 맥도날드와 1980년대의 닐 키녹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노동당 의회 지도부의 권력은 역사적으로 노조 관료의 사회적 영향력과 재정적 힘에 의해 뒷받침돼 왔다. 오늘날 노조의 존재는 여전히 노동당과 조직 노동계급을 이어주는데, 거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노조 상근 간부의 구실은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는 조건을 협상하는 것이다. 이는 2011년 11월 30일에 그랬던 것처럼 가끔 노조 관료를 투쟁으로 이끈다. 하지만 이조차도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후 연금 투쟁에서 그들이 배신한 것은 완전히 전형적이다.

노조 관료는 노동자 운동 내에서 보수적 세력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직시하는 대신 존스는 현재 유나이트연맹 위원장 선거에서 렌 맥클러스키의 재선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맥클러스키는 말은 그럴싸하게 하지만, 그는 다른 노조 지도자들이 연금 파업을 교살할 때 팔짱 끼고 구경만 했다. 그는 또한 유나이트연맹을 밀리반드의 노동당을 지지하는 응원 부대로 동원해 왔다. 바로 이 때문에 SWP가 협의회에서, 현장조합원의 활동을 강화하는 데 헌신하겠다고 주장하며 맥클러스키에 도전한 제리 힉스를 지지하기로 표결한 것이다.

비록 존스가 급진적 수사를 말하고 특정한 쟁점들을 두고는 언론에서 훌륭한 태도를 취하긴 했지만, 그는 노동당과 노조 지도부와 한편에 서서 근본에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마요”는 그보다는 더 급진적으로 보이는 의견을 낸다. 그는 예전에 SWP의 지도적 당원이었던 린지 저먼, 존 리즈, 크리스 뱀버리 같은 이들을 지지한다. 이들은 시애틀 이래로 발전한 대중 운동이 레닌주의 정치의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 21세기 초에 발전한 운동을 들여다 보면, 그 운동이 전 세계에 강렬한 인상을 줬음에도 스스로를 유지하는 데는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 ‘점거하라’ 운동도 같은 양상을 보여 주는데, 그 운동은 반자본주의 저항의 세계적 상징으로 급격히 부상했으나 또 급격히 소멸했다.

이런 패턴을 보이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아마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운동들이 보여 준 멋진 시위에 사회적 영향력을 제공할 노동계급의 전투성이 되살아나지 않았던 점일 것이다. 그러나 정치 정당에 대한 “수평주의적” 적대감이나, 합의에 기초한 의사결정이라는 실행 불가능한 (극도로 비민주적이기도 한) 방식 같은 것들이 반자본주의 운동을 지배하는 것은 상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안 됐다.

“마요”와 그 부류가 레닌주의 정치를 포기하고 운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이런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다. 영국에서 긴축에 맞선 저항이 전진하는 데 가장 큰 문제, 즉 노조 지도부가 파업을 막는 구실을 하고 있다는 문제를 마주할 때면 그들 모두 부정직한 태도를 보인다. 존스처럼, “마요”와 그 동조자들도 “관료가 아니”라는 이유로 맥클러스키를 지지한다. 그들이나 존스 모두 영국 노동운동 안의 지배적 세력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공동전선

백 번 양보해, SWP가 이런 대안의 기초를 제시할 가망이 없는 종파주의자들이라고 치자. 그러나 존스는 SWP에 (저의가 의심스런) 찬사를 보낸다. “SWP는 오랫동안 체급을 뛰어넘어 게임을 해 왔다. 예컨대 SWP는 전쟁저지연합의 배후에서 조직의 기초를 닦았다. 전쟁저지연합은 10년 전에 임박한 이라크 학살에 맞서 2백만 명을 거리에 집결시켰다. 종파주의와 공격적 회원 가입 운동으로 다른 활동가들의 반발을 샀지만, SWP는 최근 월섬스토에서 인종차별주의 조직인 영국수호연맹에 톡톡히 망신 준 거대한 시위를 조직한 ‘반파시즘연합’ 같은 결정적 운동이 전진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니까 SWP는 끔찍하지만, 그래도 지난 10년 동안 가장 중요한 운동 대부분에서 결정적 구실을 했다는 거다. 이런 모순은 어떻게 봐야 할까?

사실 우리는 공동전선 정치에 충실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테러와의 전쟁”이나 나치에 맞서는 것 같은 구체적 쟁점에서 광범하고 강력한 운동을 건설하는 데에 다른 정치 세력들과 원칙적이고도 동지적 방식으로 잘 활동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정부에 맞서 파업을 촉구하는 활동가와 노조 간부 들의 중요한 동맹체인 ‘단결해 싸우자’(Unite the Resistance)에서도 같은 원칙을 따라 왔다.

더구나, SWP 비판자들이 SWP에 대해 가장 싫어하는 우리의 조직 방법이 바로, 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가 “체급을 뛰어넘어 게임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우리의 민주집중주의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충분히 토론한 후에 결정을 내려야 하지만 일단 다수결로 결정을 하면 모든 당원이 이를 따라야 한다. 이는 우리 생각을 실천에서 검증하고자 한다면 꼭 필요한 것이다.

둘째, 이런 [조직적] 결정을 이행해서 SWP가 투쟁에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강력한 정치적 지도부가 당의 실천에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려고 당을 조직한다. 그 지도부는 정기 협의회에서 평가를 받는다.

바로 이런 민주집중주의 모델 덕분에 우리는 힘을 핵심 목표에 집중시킬 수 있었고, 우리가 지원한 여러 공동전선은 그리도 효과적으로 건설될 수 있었다.

이 모델이 당 내외에서 공격받고 있다. 가증스럽게도, SWP 내 소수파는 민주적으로 도달한 협의회의 결정 사항을 수용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이들과 좀더 규율있지만 이들 입장에 민감한 일부 동지들은 우리가 민주집중주의 적용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도부를 더 느슨하고 약하게, 이미 결정된 사항도 계속해서 재논의하고, 영구분파 허용하자고 말이다(현재 분파는 정기 협의회를 앞둔 토론 기간에만 허용된다). 그들이 성공을 거둔다면, SWP는 훨씬 더 작고 비효율적인 조직이 될 것이며, 광범한 운동을 건설하는 데 기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논쟁에 걸린 판돈은 정말 크다. 2011~12년을 거치면서 프랑스 반자본주의신당(NPA)이 안에서부터 무너졌는데, 이는 장뤼크 멜랑숑이 이끄는 좌파전선으로 대규모 이탈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사태는 유럽과 전 세계의 극좌파를 약화시켰다. 붕괴는 정치적 견해차와 좌절에서 비롯했지만, NPA가 몇몇 SWP 당원들이 옹호하는 내부 체제와 매우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됐던 것이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NPA 내에서 있었던 모든 논쟁은 네 개의 영구 분파 사이의 쟁투라는 필터를 거쳐 이뤄졌다. 당원들의 충성심은 당 그 자체가 아니라 분파에 집중됐다.

나는 SWP가 내부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정치적으로 강력하다고 확신한다. 우리의 이론적 전통과 민주적 구조 덕에 우리는 꼭 필요한 정치적 명확성에 도달할 수 있고 이번 징계 사안에서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내가 틀렸고 SWP가 정말로 무너진다 하더라도, 애초 SWP가 해결하고자 했던 정치적 문제들이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당 정치와 노조 관료에 의존하거나 운동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찬양만 해서는 반자본주의 투쟁은 전진하지 못한다. SWP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조직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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