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주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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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대단한 집안이다. 그런데 김정은이 이런 잔인한 짓을 한 때가 남한에서 반정부 운동이 한창이라는 사실이 시사적이다.
옛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1937~38년 이른바 모스크바 재판을 통해 옛 동지들을 다 살해하고 공포 통치를 강화했다.
스탈린이 이런 유혈 숙청을 벌이던 때가 프랑스 노동계급의 전국적 공장 점거 운동이, 그리고 스페인 노동계급과 빈농의 반파시스트 혁명과 내전이 한창이었다는 사실도 시사적이다.

실제로, 옛 소련 몰락 후 기밀해제된 문서들에 따르면, 스페인 혁명 운동이 스탈린의 통제를 벗어나 POUM
당시 스탈린이 지배하고 있던 코민테른
이런 사실들은 소련 트로츠키주의자이자 역사가 바딤 Z 로고빈
기밀해제 문서들은 스탈린의 권력을 위협한 세력이 스페인 혁명가들 외에도 실재했음을 보여 준다. 특히 러시아 국내에 말이다. 그들은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첫째, 중년이 된 볼셰비키 선임 당원들. 이들은 20대와 30대에 1917년 10월 혁명을 체험하면서 볼셰비키당에 입당했던 사람들이다. 그동안 이들은 하는 수 없이 스탈린 통치를 감내하면서도, 급속한 경제 성장에 고무돼 점점 스탈린 공포 통치에 대한 불만을 키워 왔다.
둘째, 군부 내의 트로츠키 지지자들. 이들은 1918~24년 트로츠키가 적군 총사령관이던 때 그 휘하에서 내전을 수행했었던 야전 지휘관들이다. 게다가 군대 사병들은 여전히 농민 출신이므로 이들은 농민의 불만을 표현하고 있었다.
당시 스탈린의 보안경찰인 내무인민위원부가 보기에, 트로츠키를 지지하는 지휘관들이 농민 사병들의 지지를 받아 군사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궐석기소하면서 나치의 보안경찰인 게슈타포와 협력했다는 터무니없는 혐의를 씌웠다. 이는 트로츠키의 사상이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토론되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보안경찰은 피의자들을 트로츠키의 공범이라는 누명을 씌워 기소했는데, 그 가운데 진짜 트로츠키 지지자들은 법정에는 세우지 않았다. 그 이유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고문에도 불구하고 투항하지 않았으므로 만일 그들을 법정에 세운다면 그들이 재판을 이용해 트로츠키주의 사상을 선전할까 봐 두려워했던 것이다.
당시에 단지 공산당들만이 모스크바 재판이 진실에 근거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개혁주의자들, 가령 영국의 친노동당계 신문 〈업저버〉나 웹 부부
스탈린 정권의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이후의 전반적인 정세는 혁명가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특히, 프랑스와 스페인의 상황은 혁명 운동의 패배로 끝나며 혁명가들의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마침내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소련이 참전했다. 빅토르 세르쥬의 1939년작 소설 제목대로

로고빈에게 빚지지 않고도 다른 기밀해제 소련 문서에 따르면, 스탈린은 중국 혁명 승리 직후에도 대규모 유혈숙청을 계획했다. 1953년 초에 그가 죽는 바람에 미수로 그쳤지만 말이다.
옛 소련과 북한이 마르크스와 레닌의 용어를 사용한 점이 실제 현실을 가려서는 안 된다.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위한 조사
스탈린 체제의 등장
스탈린 체제의 등장은 러시아 혁명이 부딪혔던 한계에서 비롯했다. 러시아 10월혁명은 국제 혁명의 성공을 기대하며 착수된 러시아 노동계급
그러나 국제 혁명들은 유럽 혁명가들의 미숙함으로 잇달아 패배했다. 특히, 1923년 10월 독일 혁명의 패배가 러시아 혁명의 운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엄청난
마찬가지로, 하나의 자본주의적 단위인 소련도 더욱더 착취적
1928~29년이 임계점이었다. 1917년의 성과는 일소됐다. 이제 노동자 권력의 잔재는커녕 노동자 권리도 파괴됐다.
엄청난 속도의 공업화가 추진됐고, 농민은 국영 집단농장에 강제로 수용돼 착취당했다.
서구가 한 세기에 걸쳐 수백만 민중의 삶을 망가뜨리며 이룩한 공업화를 러시아는 겨우 20년에 걸쳐 이룩했으니 민중의 희생의 규모가 어땠겠는가. 그 잔인성은 어땠겠는가.
이는 실로 반혁명이었다! 국가자본주의로 전환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제 러시아는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게 됐다. 러시아 민족이 소련 내 소수민족들은 물론 소련 밖 동유럽의 민족들도 지배하면서 한 블록을 이뤘고, 미국이 이끄는 서방 블록과 경쟁하게 됐다.
물론 소련이 표방한 이데올로기는 국가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였고,
스탈린주의의 이데올로기와 그 체제를 구별해야 한다. 전자는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이고, 후자는 극도로 억압적인 착취 체제였다. 체제로서 스탈린주의란 1920년대 말부터 1991년 붕괴 때까지 옛 소련 사회를 지배한 체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물론 이 체제는 중국과 북한에 잔존하고 있다.
해방의 이데올로기인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을 표방하면서도
이는 냉혹하고 잔인하게도 이복형제를 죽인 김정은과 자민통계 활동가를 구분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스탈린주의의 모순
제2차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된 소련은 미국
그리고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30년간 소련은 옛 식민지 세계에서 동맹들을 많이 얻었다. 그 시기는 중국 혁명 승리
다른 한편, 스탈린주의의 위기도 이 시기에 시작됐다. 1956년 헝가리 혁명으로 스탈린주의 체제의 신뢰성이 크게 실추됐다. 이로 말미암아 서구의 수많은 공산당원들이 당을 탈당하고 뉴레프트를 표방하기 시작했다.
1968년 체코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의 승승장구와 서구 공산당들의 꾀죄죄함 덕분에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의 좌파적 버전인 마오쩌둥주의가 많은 지지를 얻었다. 뉴레프트의 일부
그러나 베트남 전쟁 직후 베트남과 캄보디아 간의 전쟁으로, 또
결정적으로 1968운동이 1970년대 후반에 패배로 끝났다. 스탈린주의의 다양한 버전들도 사기 저하하고 우경화했다. 유러코뮤니즘
그래서 1979년 니카라과 혁명과 이란 혁명은 스탈린주의나 마오쩌둥주의 이데올로기에 이끌리지 않았다.
1980년대부터는, 스탈린주의에 환멸을 느낀 좌파 출신자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받아들이거나 주창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는 서구의 경우 운동 패배와 침체의 시기였다.
1980년대 전반부는 미소간 냉전 재격화의 시기였다
1980년대 중엽 소련 경제 상황은 매우 심각하게 악화됐다. 소련의 선제적 유화 조처로서 1987년 미소간 긴장 완화가 시작됐다.
그러나 1989년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도 거의 사멸하게 됐다. 세계 공산당들의 보편적인 우경화가 시작됐다. 남아공, 한국 등에서조차 그랬다.
한국의 스탈린주의는 1980년대까지는 혁명적이었고, 1990년대에는 중간주의적
그러나 좌파적 개혁주의와 흡사해도 북한에 대한 입장 때문에 진화한 스탈린주의로 취급해야 적절하게 분석할 수 있다.
이런 진화는 단순한 이데올로기 변화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물질적 토대의 특이성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스탈린주의의 사회적 기반은 세 계급에 걸쳐 있다: 노동계급과 북한 지배계급과 남한 일부 지배자들이 그것이다. 1934년 이후 민중전선
이런 다계급 기반 지향성이나, 계급을 초월하기는 자연히 민중주의 경향을 띠게 되는 걸로 나타나게 된다. 계급투쟁이 핵심 과제가 아니라 통일과 남북 화해협력이 최우선 과제가 되고, 민주당 지지
이런 사상과 전략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입맛에 맞으므로 그들의 일부에게 받아들여지게 된다.
스탈린주의의 핵심 이데올로기는
한편 북한 지배계급에 두고 있는 기반 때문에 북핵, 세습, 북한 인권
그리고 스탈린주의 사상은 당이 운동을 대표한다는 나쁜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 자민통계 활동가들은 자기들 자신이 운동 그 자체라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다른 경향의 활동가들과 감정적으로 이반하곤 한다.
스탈린주의의 유산
이제 스탈린주의의 핵심 유산을 살펴보기로 하자. 스탈린주의의 유산은 사회주의의 의미를 전복해 버렸다.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국유화 또는 국영 경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프루동이 자본주의를 사유재산 제도로, 또 사회주의를 국유화로 정의한다고 비판했다.
엥겔스도 1877년 비스마르크의 주요 산업 국유화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소유
다른 사례는 고대 중동 제국
또 다른 사례는 가톨릭 교회의 소유관계다. 중세 이래로 사적 소유가 아니라 공적 소유였지만
이렇게 형식과 내용은 반드시 일대일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국유화나 국영 경제로 정의하지 않고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으로 정의했다.
동유럽과 북한, 중국 등지에서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은 없었다. 동유럽과 북한은 소련 군대에 의해 사회가 전면 재편됐고, 중국에선 지식인 유격대원들이 농민의 지지로 집권한 후 사회를 전면 재편했다.
특히, 제국주의 국가의 현지 대리인 구실이나 하던 허약한 기존 국가 대신에, 강력한 국가 관료가 통제하는 국가자본주의 국가가 들어서서 자본 축적을 관장했다.
농촌에서 지주제도가 폐지됐지만, 그 대신에 국가가 집단농장을 세워서 집단으로 농민을 착취했다.
노동계급의 자체 활동 없이도 노동자 국가나 사회주의 사회가 가능하다면, 사회주의 운동에 노동계급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노동계급이 중요하지 않다면 마르크스주의도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마르크스주의와 노동계급 투쟁은 역사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노동계급과 사회주의 정치가 마치 하찮은 존재 취급을 받는 건 대부분
박근혜 정권을 물러나게 만드는 데서 더 나아가 모든 압제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진정으로 자유롭고 진정으로 민주적이며 진정으로 평등한 사회를 염원해야 한다. 그 첫걸음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권력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