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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투쟁의 역사를 돌아보며:
야만을 뚫고 온 불굴의 용기

8월부터 고용노동부가 이주노동자 사업장 이동 자유를 제한했다. 이주노동자들은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라 외치며 투쟁하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이주노동자가 국내 근로자의 일자리를 잠식한다’고 이간질하려는 지금, 한국 노동자들의 연대가 중요하다. 이런 연대를 위해 이주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돌아본다.

이주노동자 운동의 역사는 차별과 억압에 맞서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해 온 역사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은 모두 ‘미등록’ 상태였다. 한국에는 이주노동자 관련 제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노동력이 부족하자, 이주노동자들이 관광비자 등으로 쉽게 입국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당연히 이주노동자들의 권리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급기야 1994년 1월 10일, 손과 발이 잘리는 등 끔찍한 산업재해를 당하고도 치료와 피해보상을 받지 못한 미등록 이주노동자 11명이 농성을 시작했다. 이들의 농성을 통해 알려진 처참한 실태는 한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고, 파장을 낳았다. 결국 정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에게도 산재보험을 적용하겠다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정부는 산업연수생제도를 도입했다. 정부는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현 중소기업중앙회)한테 이주노동자에 관한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그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의 처지는 법률이 아니라 이들에 의해 좌지우지됐다. 결국 시행 7개월 만에, 문제가 터져 나왔다.

사업장 이동 자유를 요구하기 위해 전국에서 이주노동자 1천여 명이 결집한 9월 23일 서울역 집회 ⓒ김현옥

산업연수생

1995년 1월 네팔인 산업연수생 13명이 공장을 도망쳐 명동성당 입구에서 천막 농성을 시작했다. 그들은 “입국 후 6개월이 지나도록 임금을 전혀 받지 못했고, 한국인 관리자들의 폭행·폭언 등을 견딜 수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한 노동자는 임금 체불과 부당한 처우에 항의했다가 수갑이 채워진 채 두들겨 맞았다. 이들이 “한국에서 지낸 6개월은 짐승과 같은 삶이었다”고 절규한 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처참한 처지에 놓인 이주노동자들의 절규에 ‘외국인 산업기술 연수생 인권보장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결성됐다.

열흘 정도 벌어진 농성 투쟁은 커다란 승리로 끝났다. 정부가 내놓은 조처들 ― 최저임금 적용, 강제노동과 폭행 금지, 체불임금 청산 등 ― 은 사실상 이들을 노동자로서 대우한다는 양보였다.

물론 이런 조처들이 현실에서 제대로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투쟁을 계기로 산업연수생제도 폐지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주노동자들의 파업과 집단적 항의는 1995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계속 이어졌다. 담양에 있는 세원전기의 필리핀 노동자들은 1999년 10월과 2001년 2월 두 차례 파업을 벌였다.

시화공단의 종이상자 제조업체에서 파키스탄 출신 산업연수생들은 2002년 3월에 보름 넘게 파업을 벌여 통쾌한 승리를 거뒀다. 한 노동자가 형 장례식에 참가하려고 휴가를 신청했다가 해고되자, 동료 노동자들이 바로 파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안산역 앞에서 팻말 시위를 벌이고 자신들의 소식을 외부에 알리기도 했다. 이들은 해고 철회, 휴가 보장, 사업장 이동이라는 모든 요구를 쟁취했다.

가장 잘 알려진 이주노동자 파업은 2002년 1월 포천 아모르 가구 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이다. 우즈베키스탄·필리핀·몽골 등 9개국 출신 미등록 노동자 93명이 파업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이 파업을 벌이자, 사측은 물과 전기를 끊으려 했고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모조리 신고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파업 노동자들은 자신의 대표자들을 선출했고 외부에 도움을 호소했다. 노동자들의 투지가 대단했고 한국인 지원 단체들의 도움으로 언론에 널리 알려지면서, 결국 파업은 승리로 끝났다.

이주노동자들은 자신을 보호해 줄 변변한 제도가 없는데도 투쟁으로 권리를 쟁취했다.

2004년 정부는 고용허가제를 도입해 처음으로 이주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했는데, 이것은 노동자들의 저항과 희생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산업연수생제도는 2007년 최종 폐지됐다.

이주노동자들의 각성

여러 투쟁을 경험하며 이주노동자 운동 안에서 노동자로서의 마땅한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 노조 결성 움직임이 시작됐다. 2002년 대구의 성서공단노동조합이 결성 단계부터 이주노동자를 조직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주노동자들은 무엇보다 자신들이 투쟁을 직접 조직하고 지도해 나갈 능력이 있음을 보여 줬다.

이것은 2003년 11월 이주노동자 강제 추방 중단을 요구하는 항의 농성이 극명하게 보여 줬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고용허가제 시행을 앞두고 대대적인 단속과 추방을 선포했고, 실제 이 단속의 광풍은 매우 거셌다.

정부 정책에 항의해 전국에서 이주노동자 1천여 명이 농성에 들어갔으나, 대부분 정부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농성을 포기했다. 그러나 명동성당에 모인 노동자들만은 끝까지 버텨, 무려 3백80일 동안 항의를 지속했다. 이 과정에서 매우 광범한 사회적 연대가 건설됐고, 노동운동의 지지도 커졌다.

이 투쟁은 이주노동자 운동의 투사와 리더를 만들어 냈고 이주노조라는 자신들의 조직을 만드는 성과를 남겼다. 2005년 이주노조가 만들어진 후, 초대 위원장 아노아르 동지부터 줄줄이 추방됐지만 이주노동자 운동은 굴하지 않았다. 모진 탄압 때문에 이주노조는 이주노동자를 광범하게 조직할 수는 없었지만, 투쟁적인 이주노동자들을 끌어들이는 구실을 톡톡히 했다.

그리고 이런 투쟁이 한국 노조들에도 큰 영향을 줬다. 금속노조는 2005년 이주노동자를 노조에 받아들이도록 했고, 2007년 8월 삼우정밀 지회는 이주노동자 조합원을 받아들였다. 2004년 경기중서부 건설노조도 이주노동자를 조합원으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주노조는 꾸준히 성장했고, 조합원의 절반 이상이 고용허가제로 들어온 등록 노동자들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고용허가제 노동자인 미셸 동지가 위원장을 지내며, 이들도 정부에 맞서 투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무엇보다 최근 정부의 이주노동자 공격에 항의하는 운동은 새로운 이주노동자 운동의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주노조 비대위 위원장인 우다야 동지의 말처럼, “참을 만해 참아 온 것이 아닌” 고용허가제 노동자들이 정부의 공격을 계기로 쌓여 온 불만과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지금 막 각성하고 항의 운동에 뛰어들기 시작한 이주노동자들 중에 이주노동자 운동의 차세대 리더들이 나타날 것이다.

이주노동자 운동은 당사자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영감을 주고 좋은 자극이 돼 왔다. 이주노동자가 겪는 억압과 차별은 자본주의의 야만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기도 하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은 억압과 차별에 맞서는 이주노동자들과 연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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