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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찰이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을 살해한 뒤:
인종차별에 맞선 저항이 분출하다

8월 9일 미국 미주리 주 퍼거슨 시에서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이 횡단보도가 없는 도로를 건너다 (무단횡단이) 교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살해됐다.

백인 경찰관 대런 윌슨은 무장하지 않은 브라운에게 총을 여섯 발이나 쐈고, 그중 두 발은 머리를 겨냥했다. “손을 들었으니 쏘지 말라”는 외침은 브라운의 유언이 됐다. 브라운의 시신은 네 시간 동안 거리에 방치돼 있었다.

브라운의 시신을 확인한 사람들은 곧 추모 행진을 시작했다. 브라운의 유언을 구호로 외쳤다.

“살인은 살인일 뿐이다” 8월 18일 마이클 브라운 살해 항의 행진. 마이클 브라운이 손을 들었음에도 경찰이 쏜 것에 항의하려고 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Light Brigading(플리커)

항의 운동으로 번질까 봐 걱정한 경찰은 추모 행진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자동화기로 중무장한 경찰들이 장갑차를 타고 다니며 최루탄을 쐈다. 인종차별 정책으로 악명 높았던 흑인 야간 통행 금지 조처가 50여 년 만에 다시 등장했다.

경찰은 시위대의 ‘폭력성’을 터무니없이 과장했다. (가해 경찰의) 안전을” 위한다며 가해자 윌슨의 신원은 사건 발생 1주일 넘게 비밀에 부쳤으면서 말이다. 동시에 경찰은 브라운이 절도 행위를 하는 듯 보이게 찍힌 CCTV 영상까지 공개해 살해를 정당화하려 했다. 이는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추모 행진은 곧 항의 시위로 바뀌었다. 매일 집회가 열렸다. 경찰과 시위대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주지사 제이 닉슨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했다. 1992년 LA 소요 이후 22년 만의 일이었다.

CCTV 영상

미국 전역의 90여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브라운을 위한 정의를 요구하며 항의 시위를 벌였다. 퍼거슨에서 멀지 않은 세인트루이스에서는 5만 명이 행진을 벌였다.

흑인뿐 아니라 백인과 다른 유색인도 동참했다. 시민 평등권 운동에 참가했던 인권운동가들부터 ‘점거하라’ 운동의 투사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가세했다. 전국 어디서나 시위대는 흑인 운동의 전통적 구호인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를 외쳤다.

노동자들도 연대에 나섰다. 패스트푸드·월마트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인 식품·상업노동조합 UFCW는 투쟁 기금을 모금하고, 연대 집회를 조직하고, 버스를 대절해 퍼거슨으로 달려갔다.

확산되는 항의 운동에 밀린 주지사 닉슨은 군대를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다. 오바마도 “폭력 시위는 용납할 수 없다”면서도, 경찰 폭력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심각한 흑인 인종차별

1980년대 경제 불황으로 세인트루이스 도심이 빈민가로 몰락하자, 흑인 노동계급은 “안전한” 삶을 찾아, 백인 노동계급이 버리고 떠난 교외 지역으로 이주했다. 퍼거슨 시도 그런 도시 중 하나였다.

그러나 흑인들은 “안전”해질 수 없었다. 2013년 퍼거슨 거주 흑인들의 86퍼센트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불심검문을 받았고, 92퍼센트가 차량 수색을 당했다. 2013년 체포된 사람들의 93퍼센트가 흑인이었다.

흑인들은 여전히 더 가난하다. 퍼거슨 거주 흑인의 실업률은 백인의 실업률보다 10퍼센트 이상 높다. 빈곤율도 22퍼센트로, 인근 백인 거주 도시의 빈곤율의 다섯 배 이상이다. 평균 수명도 흑인이 백인보다 15년이나 짧다.

퍼거슨만 그런 것이 아니다. 1980년대 이후 미국 전역에서 흑인 노동계급의 처지는 훨씬 악화됐다. 미국 흑인의 실업률은 전체 실업률의 두 배이고, 흑인 청년의 실업률은 전체 실업률의 여섯 배이다. 흑인 아동 셋 중 하나가 빈곤층이다.

미국의 흑인들은 28시간에 한 명 꼴로 백인 경찰, 사설 경비대, 민병대에게 살해당한다. 흑인 청년들은 대학보다 감옥에 갈 확률이 더 높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1980년대 레이건 정부는 노동계급을 혹독하게 공격했다. 파업 대체인력으로 군대를 투입하고, 파업 참가자를 모두 해고했다. 임금 인상은 극도로 억제됐고 연방정부의 복지 예산은 대폭 삭감됐다. 그 과정에서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던 흑인 노동자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레이건 정부는 차별 금지 조처들을 무력화시키고 흑인 단체들을 공격했다. 그 결과 1980년 20만 명이 채 안 되던 흑인 수감자 수는 레이건 정부 8년을 거치며 1백20만 명을 넘어섰다.

흑인이 대통령이 되고 흑인 하원의원은 30년 동안 두 배 이상 늘었지만, 보통 흑인들의 처지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흑인·백인 노동자가 함께 체제에 맞선 역사

미국에서 흑인 인종차별은 여전히 심각하지만 흑인과 백인이 단결해 투쟁한 역사도 있다.

산업화 초창기부터 미국 지배계급은 인종·출신 국적에 따라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려 했다. 흑인들이 미국 대다수 지역에서 노예로 살던 19세기 초 미국 지배자들은 ‘토박이 백인’과 이민자들 사이를 이간질했다. 흑인들을 저임금 대체인력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경제 위기와 남북전쟁을 거치며 상황이 달라졌다. 저임금·고물가에 시달리고 전쟁에 끌려가야 하는 처지는 흑인과 백인을 가리지 않았다. 강경한 노예제 폐지론자 등이 주도한 여러 운동에서 흑인과 백인은 단결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전후 재건 과정에서 탄생한 미국 노동계급은 그 뒤 30여 년 동안 여러 차례 파업을 일으켰다. 이 때 조직된 미국 최초의 전국적 노동자 단체 ‘노동기사단’은 인종과 출신 국적을 구분하지 않는 노동자 연대를 호소했다. 노동기사단은 대규모 파업으로 당시의 악덕 자본가였던 제이 굴드에 맞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엥겔스는 이를 두고 “미국 노동계급 전체[를] … 결속시키고 적들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자신들의 힘을 절감케 한 전국적 연대”라고 격찬했다.

19세기 말 경제 위기 속에서 노동기사단은 탄압받고 분열해 쇠락했다. 지배계급은 노동계급 전반의 처지를 공격하는 한편, 흑인과 백인 사이를 체계적으로 이간질했다. 사회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인종차별적 제도를 도입하고 인종 간 적대를 부추겨 노동계급의 단결을 방해했다.

그럼에도 단결의 전통은 20세기에도 이어졌다. ‘빵과 장미’라는 구호로 유명한 191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철강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흑인 노동자와 백인 노동자는 함께 싸웠다. 이 파업들을 주도한 세계산업노동자연맹 IWW의 조직자들은 흑인과 백인이 단결했던 19세기 운동의 경험을 새 세대 노동자에게 전수했다.

아메리칸 드림

1929년 미국 발 대공황은 ‘아메리칸 드림’의 신화를 산산조각 냈다. 이때도 첫 희생자는 흑인들이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 사이에 인종차별 정서가 만연해졌다.

이런 상황을 바꾼 것은 노동계급 투쟁이었다. 1934년 트로츠키주의자들, 공산당원들, 급진적 활동가들이 주도한 세 건의 파업 승리는 커다란 계급 투쟁의 분출을 낳았다. 1백80만 명이 참가한 전투적 파업이 일어났다.

흑인·백인 섬유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이고 함께 도심을 행진하고 있다(1934년).

이 파업들은 미국 사회에 만연해 있던 인종차별에 타격을 줬고, 미국 자본주의를 뒤흔들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 줬다. 50만 명에 이르는 흑인이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흑인과 백인이 단결한 노동자 투쟁은 인종차별로 악명 높던 남부 광산에서 흑인-백인 간 임금 격차를 철폐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로즈벨트 정부와의 협력을 위해 노동자 투쟁을 억눌렀다. 심지어 흑인-백인 간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요구하며 비공인 파업을 벌인 활동가들을 징계하기도 했다.

공산당도 마찬가지 태도를 보이며 노동운동 안에서 지지를 잃어갔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뒤 반공주의 탄압이 미국 노동운동을 강타하며 노동계급 투사들이 해고되거나 수감됐다. 꽤 많은 수가 파업 운동에서 성장한 흑인이었다.

이후 미국 노동운동은 전후 황금기에 새롭게 성장한 흑인 노동계급을 조직하지도, 1960년대에 일어난 위대한 흑인 저항과 만나지도 못했다. 흑인 민족주의가 흑인과 백인의 단결을 대신했다.

그럼에도 미국 노동계급은 인종을 뛰어넘는 노동자 연대로 인종차별에 맞설 때 중요한 성취를 이룰 수 있음을 거듭 보여 줬다.

분노가 미국을 뒤흔들려면

2008년 경제 위기가 미국 사회를 강타하면서 가혹한 빈곤과 실업, 차별과 천대에 대한 흑인들의 분노는 더한층 커졌다.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으라는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오바마 정부 하에도 경찰의 ‘인종 프로파일링’(경찰이 근거 없이 흑인을 의심 대상으로 여기는 것)과 흑인 살해는 계속됐다. 이에 맞서 지난 몇 년 동안 수십만 명 규모의 대중 시위가 여러 차례 일어났다.

브라운의 사망에 대한 정의를 요구하는 저항은 이런 인종차별 반대 운동의 흐름 속에서 확대됐고, 여러 운동의 지지를 받고 있다. 특히 식품·상업노동조합 UFCW의 연대가 주목할 만하다. UFCW는 경제 불황 때문에 직장을 잃고 서비스 산업으로 유입되는 유색인 노동자들을 조직해, 2012년 월마트 노동자 파업과 2013년 패스트푸드 노동자 파업을 주도했다. UFCW는 많은 미국 노동계급의 이익과 직결된 최저임금 인상 투쟁도 주도적으로 조직하고 있다.

이런 투쟁의 성과로 UFCW는 조합원이 1백30만 명으로 늘어나 미국 노동조합 연맹인 AFL-CIO 전체 조합원의 10퍼센트를 차지하는 대형 노조로 성장했다.

2010년 이후 미국 노동운동이 1960년대의 미국 노동운동과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1960년대에 AFL-CIO는 흑인 평등권 투쟁이나 여성 해방 투쟁에 거의 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마이클 브라운의 죽음을 둘러싼 항의 운동은 여러 운동들을 연결시켰고, 사람들의 분노가 모일 초점이 됐다. 이런 운동들이 인종차별과 빈곤을 낳는 미국 자본주의에 충격을 주려면, 실제로 체제에 위력을 가할 수 있는 노동자 투쟁이 더 늘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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