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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경제 위기론

이 글은 4월 19일에 같은 제목으로 열린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제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 위기는 흔히 금융 위기의 형태로 나타난다.

최근에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과 유럽의 크레디스위스 은행 부도로 금융 위기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2008년 금융 위기는 1929년 대공황 이후 최대 규모의 금융 붕괴를 낳았고, 이후 장기 불황으로 이어졌다. 당시는 지금과 비슷하게, 몇 년간 부동산 거품이 급격히 커지다가, 그 거품이 꺼지면서 위기를 맞이했다.

그래서 일부 경제학자들과 경제 평론가들은 금융 자본과 투기꾼들의 투기 때문에 경제가 위기에 빠진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정부가 투기꾼들을 제대로 규제하지 못한 게 문제라며 금융 규제 강화를 대책으로 제시한다.

물론 금융 자본과 투기꾼들은 탐욕에 눈이 멀어 황당하리만큼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투기꾼들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 막대한 자금을 어디서 제공받았는가?

이 질문에 주류 경제학은 “과잉 저축”이라고 답한다. 예를 들어, 벤 버냉키는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의 의장이었고 1930년대 대불황에 관한 연구로 주류 경제학계에서 명성이 높은 유력 인사인데, 그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의 원인을 “글로벌 과잉 저축”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이런 대답은 한참 부족하다. 도대체 과잉 저축은 왜 생겨났는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잉 저축은 실물 부문에서 수익성 있는 투자처를 찾지 못한 돈이 쌓인 결과이다. 그래서 금융 위기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실물 부문의 수익성 악화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생산 부문의 역학과 금융의 관계를 서로 연관시켜 파악하는 것이 마르크스의 관점이다. 오늘은 경제 위기에 관한 마르크스의 설명을 알아보고자 한다.

노동가치론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는 단지 금융시장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자본축적 과정 자체의 심각한 모순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은 이윤율 저하 경향이었다.

이윤율은 자본가들이 투자한 돈으로부터 이윤을 얼마나 얻는지를 나타내는 비율이다. 이 이윤율이 바로 자본주의 경제 역학의 핵심이다. 자본가들은 이윤을 얻기 위해 투자한다.

어떤 자본가가 이윤을 얼마나 많이 얻는가는 그 자체로는 결정적이지 않다. 이윤율이 얼마나 높은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가령 1년에 1조 원의 이윤을 얻는 기업이 있다고 치자. 엄청난 돈이다. 그러나 100조 원을 투자해 1조 원의 이윤을 얻은 것이라면, 이윤율은 고작 1퍼센트밖에 안 된다. 이런 경우 자본가들은 투자할 매력을 별로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윤율이 높아야 투자가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말한 이윤율 저하 경향을 이해하려면 마르크스 경제학의 기본 개념을 간단하게 살펴봐야 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마르크스는 노동가치론을 주장했다. 노동가치론은 상품의 가치가 그 상품을 만드는 데 들어간 ‘사회적 필요 노동시간’에 따라 결정된다는 이론이다.

자본가는 생산을 위해 기계와 원료를 구입하고 노동자를 고용한다.

기계와 원료는 이미 다른 노동자들의 노동으로 생산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이를 ‘죽은 노동’이라고 불렀다. 이 죽은 노동은 생산에 사용되면서 그 가치가 완제품으로 이전된다 .

반면 노동자의 노동은 완성된 상품에 새로운 가치를 추가한다. 이렇게 추가된 가치 중에서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부분이 임금이다. 임금을 제외한 부분은 자본가가 가져간다. 마르크스는 이를 ‘잉여가치’라고 불렀다. 잉여가치가 자본가의 이윤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자본가의 투자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기계나 원료처럼 죽은 노동을 구입하는 투자는 그 가치가 완제품에 고스란히 이전돼, 회수된다. 마르크스는 이를 ‘불변자본’이라고 불렀다.

다른 한편,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데 지출된 투자는 다시 회수될 뿐 아니라, 추가로 잉여가치를 만들어 낸다. 이처럼 투자한 것보다 큰 가치로 변하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이를 ‘가변자본’이라고 불렀다.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

자본가들은 경쟁 때문에 축적을 해야만 한다. 그 때문에 자본가는 되도록 노동생산성을 올리려고 한다. 노동생산성을 높이면 그만큼 물건을 싸게 만들 수 있어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새로운 기계를 도입해, 노동자 한 사람당 사용하는 불변자본을 늘리는 것이다.

여러 기업들이 진출해 있는 반도체 산업을 예로 들어 보자.

각 기업이 날마다 불변자본(기계, 원자재 등)으로 1만 원, 가변자본(임금)으로 1만 원을 투자하고, 1만 원의 잉여가치(이윤)를 얻고, 10개의 반도체를 생산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각 자본가가 하루에 생산한 반도체의 가치는 모두 3만 원이다. 하루에 반도체 10개를 생산하니까 반도체 1개의 가치는 3000원이다. 2만 원을 투자해 1만 원을 이윤으로 얻었으니, 이윤율은 50퍼센트다.

이때, 어떤 자본가가 신기술에 투자한다. 이 자본가는 여전히 임금으로 1만 원을 지불하고 잉여가치로 1만 원을 얻지만, 2만 원짜리 새 기계에 투자한다.

이 기계는 생산성이 훨씬 좋아서 반도체를 하루에 100개 생산한다. 이 혁신 기술을 도입한 자본가가 하루에 생산한 반도체의 총가치는 이제 4만 원이 된다. 그 대신 반도체를 100개 생산했으니, 이 반도체 1개의 가치는 400원이다.

이 혁신 자본가는 경쟁에서 엄청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반도체를 (현재 시장가치인) 개당 3000원보다 훨씬 싸게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당 450원에만 팔아도 업계 평균 이윤율을 얻을 수 있다.

판로를 늘리려고 물량 공세를 퍼부으며 반도체를 개당 1200원에 판매한다고 치자. 이렇게 싸게 팔아도 이 자본가는 개당 750원의 초과 이윤을 얻는다.

반면, 옛 기술을 사용하는 자본가들이 1200원에 판다면, 이윤은 고사하고 개당 800원씩 손해를 볼 것이다. 투자한 2만 원도 못 건지니 말이다.

사정이 이러니 결국 다른 자본가들도 기술 혁신에 나서고 곧 가격 인하 경쟁에 동참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기술이 보편화된다. 그러면 반도체 가격은 신기술로 생산할 때의 가치인 400원으로 낮아지게 된다. 기술을 혁신하지 못한 자본가는 가격을 내릴 수 없어 망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경쟁과 축적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윤율 수치를 살펴보면 매우 신기한 변화를 알 수 있다. 옛 기술을 사용했을 때는 2만 원을 투자해 1만 원의 이윤을 얻었으니, 이윤율이 50퍼센트였다. 그런데 신기술이 보편화됐을 때 자본가는 여전히 잉여가치로 1만 원을 얻지만, 3만 원을 투자했으니 이윤율은 33.33퍼센트로 떨어진다.

이처럼 축적 과정은 이윤율을 떨어뜨린다. 왜 그럴까? 자본가가 투자할 때 노동자 1인당 불변자본의 비중을 높여 생산성을 향상시켰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가변자본 대비 불변자본 비중을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라고 불렀다.

자본가들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유기적 구성을 높이는 투자를 한다. 유기적 구성이 높아질수록 기계 사용이 늘어나고 노동자들은 생산과정에서 퇴출된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봤듯이 잉여가치의 원천은 노동자의 노동(산 노동)이다. 자본가는 이윤을 더 많이 얻으려다가 이윤을 창출하는 수단 자체를 몰아내는 셈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본 모순이다.

근시안적인 자본가들

자본가들은 왜 이렇게 행동할까?

우선, 자본가들은 자기가 얻는 잉여가치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른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뿐 아니라 기계도 잉여가치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새 기계에 투자한 자본가는 초과 이윤을 얻으며 새 기계 덕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새 기계를 가장 뒤늦게 도입한 자본가도 새 기계 덕분에 손해를 면하고 이윤을 얻게 됐다고 생각할 것이다.

둘째, 신기술을 맨 처음 도입하는 자본가에게는 기술 혁신이 완전히 합리적인 선택이다. 이 자본가는 상품 하나에 담긴 가치가 훨씬 적어졌는데도 한동안은 예전 가치보다 약간만 싸게 판매하면서 매우 높은 이윤율을 얻을 수 있다.

모든 자본가가 기술 혁신으로 가격 인하 경쟁을 벌이게 되는 축적이 자아내는 효과는 이렇게 전체적으로 봐야만 알 수 있다.

이것이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에 있는 모순이다. 각 자본가는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새 기계를 도입해 단기적으로는 높은 이윤율을 구가한다. 하지만 다른 자본가들도 합리적으로 대응하면, 자본주의 체제 전체에는 완전히 비합리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좀 더 긴 역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윤율 저하 경향은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력 증대가 창출하는 부수적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더 좋은 기계를 이용해 더 적은 노동량으로 더 많은 재화를 생산할 수 있게 될수록 자본주의의 이윤율은 떨어지는 것이다. 결국 생산성 향상이 점점 더 생산적 투자를 회피하는 이유가 된다.

이윤율 저하 경향은 자본주의가 인류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됐음을 보여 준다.

상쇄 요인

그런데 이윤율이 계속 저하하기만 한다면 자본주의는 오래전에 무너졌을 것이다. 분명히 다른 힘이 존재한다. 마르크스는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는 몇 가지 요인을 언급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를 살펴보겠다.

첫째, 노동자들을 더 쥐어짜 자본가들이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는 것이다.

앞서 봤듯이, 자본가들은 노동생산성을 높여, 자기네 상품의 가치를 낮추는 경쟁을 벌인다. 이는 노동자들이 임금으로 구입하는 상품들의 가치도 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생산성 향상에 따른 노동자 생계비 감소인데, 덕분에 더 적은 임금만 지급해도 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자본가들은 노동시간을 늘리거나 노동강도를 강화하거나 임금을 줄이려고 한다. 실제로 1980~1990년대 미국과 영국 등의 나라에서 노동유연화, 노동시간 연장, 임금·복지 삭감 등으로 이윤율이 일부 회복했다. 그 결과 빈부격차와 불평등은 더 심해졌다.

둘째, 노동생산성이 향상되면 불변자본의 가치도 떨어진다. 그래서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에 더 많이 투자하더라도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그만큼 빨리 오르지 않을 수 있다.

특히 불변자본의 가치가 대거 떨어지는 것은 바로 경제 불황 때이다. 수익성이 떨어지는 자본이 망해 사라지거나 다른 자본에 헐값에 인수되는 것이다. 이를 자본 파괴라고 한다. 자본 파괴는 실업을 동반하기 때문에 임금 삭감도 쉬워진다. 그래서 경제 불황이야말로 이윤율 회복의 핵심 요인이다.

그러나 상쇄 요인이 순조롭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첫째, 임금 삭감과 노동시간 연장, 노동강도 강화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육체적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또, 자본가도 노동자들이 다음 날 건강한 상태로 출근해 일하기를 원한다.

둘째, 자본 파괴에도 한계가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자본이 커지면서 그 수는 줄어든다고 지적했다. 자본 단위들이 어마어마하게 커지면 거기에 국가와 금융계가 긴밀히 맞물린다. 그래서 기업 하나의 파산이 연쇄 파산으로 이어져 경제 전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다. 결국 붕괴를 막고자 국가가 개입하게 된다.

그러나 국가 개입은 모순된 효과를 낸다. 최악의 붕괴는 막을 수 있지만, 자본 파괴를 통해 이윤율이 충분히 회복되는 것도 막는 것이다.

이윤율 저하와 금융

이제 실물 부문의 이윤율 저하 경향과 금융 투기의 관계를 살펴보자.

금융은 생산 부문에 그저 기생하는 것이 아니다. 금융은 특정 자본가가 갖고 있지만 투자처를 찾지 못한 자금이 투자를 당장 원하는 자본가에게 대출돼 자본으로 사용되도록 중개한다. 그 대가로 이자 수익을 얻는다. 자본주의 체제가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데 일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도를 넘어서면 금융은 자본주의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특히, 이윤율이 낮아지면 기업들은 생산적 투자를 꺼리게 된다. 그러면 저축은 쌓이고, 생산된 제품은 다 팔리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이를 두고 과잉생산이라고 한다.

이때, 투자처를 찾지 못한 돈은 그나마 수익성이 좋아 보이는 채권, 주식, 부동산 등 자산 시장으로 옮겨 간다.

이 부문에 투자가 늘어나면 자산 가격이 더 올라 수익성이 다시 좋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금융 부문에서 더 많은 수익을 얻는 사람들이 소비를 늘려서 과잉생산이 급격히 확대되는 것을 일시적으로 막을 수 있다.

그러면 자산 투자가 점점 더 늘고 고수익을 노리는 위험천만한 투기도 늘어나게 된다. 그리 되면, 결국 거품이 터지면서 금융 위기가 오는 것이다.

이윤율 저하 경향을 인정하지 않는 견해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자본주의 경제 위기는 이윤율 저하 경향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금융 위기도 본질적으로 실문 부문의 이윤율 저하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좌파들과 적잖은 마르크스주의자들도 경제 위기의 원인을 이윤율 저하 경향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 중 일부는 자본가들이 이윤율을 떨어뜨리는 기술 혁신을 추진할 리 없다고 본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봤듯이, 개별 자본가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인 것이 자본주의 체제 전체에는 완전히 비합리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는 이윤율 저하 경향이 자본주의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상쇄 요인이 작용하므로 이윤율이 오를지 떨어질지를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이 상쇄 요인은 특정 조건에서 한시적으로만 작동한다.

이윤율 저하 경향을 부정하는 좌파의 상당수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조절하면 노동자의 처지도 개선하고 경제 위기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노동자들의 이익을 지키는 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이윤율 위기가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자체에 도전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지속가능한 변화를 이룰 수 없다.

마르크스의 위기론인 이윤율 저하 경향은 사회 혁명의 필요성을 필연적으로 함축한다.

데이비드 하비의 이윤율 저하론 비판을 반박한다

많은 좌파들이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보다는 금융화, 독점 증대, 이에 따른 노동계급의 수요 부족(과소소비) 등을 조합해 위기를 설명한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인 데이비드 하비도 그중 하나다.

하비는 이윤율 저하 법칙에 초점을 두는 사람들을 ‘단일 원인론자’라고 비판하며 “원인의 다양성”을 제시한다. 또, 마르크스가 이윤율뿐 아니라 이윤량도 중시했다면서, 이윤량이나 자본의 양, GDP(국내총생산)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하비는 이윤량이 증대하며 소비되지 않는 잉여가 지나치게 많아진 것이 경제 위기의 원인이라고 본다. 지나치게 많아진 잉여를 노동자들에게 돌려줘 대중의 소비 능력을 증대시키면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생산에 비해 소비가 너무 적어서 문제라는 건데, 이를 두고 과소소비론이라고 한다.

그러나 금융 자본이나 독점 자본 때문에 저투자, 저성장, 불평등이 발생한다는 설명은 오류다. 금융 자본이나 독점 자본이 더 많은 이윤을 가져간다 해도 실물 부문에 이윤율 높은 분야가 있다면 그들도 거기에 투자할 것이다. 그리고 그 효과는 경제 전반으로 확산될 것이다.

실물 부문의 투자 감소와 그에 따른 경제 전반의 저성장은 일부 자본의 탐욕이나 자본의 특정 조직 형태 때문이 아니다. 실물 경제 전반의 이윤율 하락, 즉 자본주의 생산 자체의 모순 때문이다.

노동자 소득을 올리는 것이 경제 위기에서 벗어날 근본적 해법이 될 수도 없다. 물론 우리는 임금을 올리고 복지를 늘려 노동자 조건을 개선하는 조처를 정치적으로 지지한다. 지금처럼 생계비 위기가 심각해지는 때에는 그런 개선을 위한 투쟁이 절실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하에서는 아무리 임금을 올려도 생산물 전체를 소비할 수는 없다. 자본가들이 가져가는 투자 회수분과 이윤이 있기 때문이다. 대중의 소비보다 자본가들의 투자가 경제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