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교수와의 논쟁③: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확한 정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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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얼마 전 〈노동자 연대〉 149호에 쓴 기사에서 박노자 교수(이하 직함·존칭 생략)가 옛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사회의 성격을 오해하고 있고 이 때문에 오늘날의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잘못 인식해,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는 다른 제국주의적 국가들을 지지하는 ‘진영 논리(campism)’에 빠져들 수 있다고 비판했다(옛 소련과 현 북한 사회는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다).
박노자는 이 기사를 반박하는 글(중국과 북한 편들기가 아니다)을 〈레디앙〉에 실었고, 이에 필자도 다시 박노자의 견해를 반박하는 글을 썼다(옛 동구권과 현 중국 사회의 성격, 그리고 제국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 글에서 필자는 옛 소련 블록을 서방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로 봐야 하고, 박노자처럼 오늘날의 ‘중국 모델’이 신자유주의적 서방 경제와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은 부정확하며, 결국 그런 견해가 미국 제국주의에 반대해 중국 등에 기대는 ‘진영 논리’에 힘을 실어 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 등을 재차 지적했다.
이에 박노자는 최근 다시 한 번 내 견해를 비판하는 글('자본주의'란 무엇일까?)을 썼다. 그 글에서 그는 자신이 자본주의를 뭐라 정의하는지를 밝혔다. 자본주의 체제를 정확히 이해하는 게 앞으로의 논쟁에서 중요하므로, 필자 또한 거기서 논의의 실마리를 풀고자 한다.
자본주의=시장?
박노자는 자본 시장, 토지·부동산 시장, 노동 시장 등 3대 시장이 자본주의의 골격을 이룬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아무리 국가 역할이 중요한 [서방의] 수정 자본주의라 해도 위의 3대 시장이란 없을 수 없[고]”, 따라서 3대 시장이 없는 옛 소련, 북한, 덩샤오핑 집권 이전의 중국을 자본주의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주장과 별로 다르지 않다. 부르주아 경제학은 자본주의를 완전한 시장 경제라는 하나의 정태적 모델에 고착시킨 채, 자본 축적과 그 축적 과정이 낳는 동태적 변화는 전혀 중시하지 않는다.(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크리스 하먼의 《부르주아 경제학의 위기》(책갈피, 2010)를 보시오.) 그들도 박노자와 유사한 근거로 옛 소련 블록을 자본주의 사회로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정치적 결론은 매우 다르지만 말이다.
마르크스, 엥겔스,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등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관점은 이와 아주 다르다. 자본주의 체제는 상품 생산 체제일 뿐 아니라 경쟁적 축적 체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경쟁적 축적의 과정에서 자본주의 경쟁의 형태가 변하게 된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본들은 잉여가치를 재투자해야 한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점점 더 거대한 산업을 구축하려는 끊임없는 추진력(“축적을 위한 축적”)이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징이라고 봤다. 이처럼 개별 자본의 크기가 커지고 체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국가와 개별 자본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그 결과 20세기 들어 국가 소유 경제 부문이 대규모로 출현했다. 이러한 국가자본주의적 경향이 강력해지자 부하린, 로자 룩셈부르크, 힐퍼딩 등은 국가와 자본의 융합이라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모습을 분석하려 애썼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가 자본주의에 외적인 것이라는 ‘상식’을 갖고, 국가가 운영하는 경제가 자본주의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러나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연구자 김수행 교수는 이렇게 지적한다.
“어느 사회가 자본주의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때는 ‘사적 소유’ 또는 ‘국가 소유’라는 표층의 ‘법적 표현’을 볼 것이 아니라, 표층의 배후에 있는 생산의 심층에서 누가 생산수단을 노동하는 개인들로부터 분리하여 독점하고 있느냐 아니냐, 노동하는 개인들이 생산수단에 대해 타인의 것으로 상대하고 있느냐 아니냐, 그리고 생산수단이 노동하는 개인들을 지배·착취하고 있느냐 아니냐를 보아야만 [한다.]”(김수행,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한울아카데미, 2012), 제6장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였다, 153쪽.)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엥겔스는 《공상에서 과학으로》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형태가 어떻든 간에 현대 국가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기구, 즉 자본가들의 국가로 일국 총자본의 관념적 인격화다. 현대 국가가 생산력을 더 많이 장악할수록 그것은 그만큼 더 국가자본가가 되며, 그만큼 더 많은 주민을 착취한다. 노동자는 여전히 임금노동자, 즉 프롤레타리아로 남아 있다. 자본주의적 관계는 제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정점에 이르게 된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국가 소유로 바뀌어도 근본적 생산관계나 자본주의적 축적의 동역학은 바뀌지 않았다. 국가는 국내의 축적이 외국 자본들의 축적에 필적할 수 있게 해서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됐다. 국가는 자신이 소유한 기업의 생산을 ‘계획’할 수 있지만, 그 계획 자체는 사기업 내부의 계획과 마찬가지로 외부 경쟁에 종속됐다.(그런 점에서 진정한 계획이 아니었다.)
1930년대 대불황과 제2차세계대전은 서방 자본주의에서 국가자본주의 경향이 크게 발전하는 중요한 역사적 계기였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국가가 거의 모든 경제 부문에 개입했고, 이때 사적 자본들의 국내 경쟁은 최소화됐다. 예컨대 전시에 영국의 민간경제는 중앙집권적 전시경제의 부속물로 전락했다. 미국 정부는 총생산물의 절반을 차지한 군비 부문을 통제했고, 어떤 소비재를 생산할지 말지도 결정했다. 1943년 미국 국가는 총투자의 90퍼센트를 맡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때의 영국과 미국이 자본주의 사회였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군사적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파괴 수단을 축적하는 것은 시장 경쟁에서 승리하려고 생산수단을 축적하려는 것과 같은 추진력에 달려 있었다. 노동생산성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축적을 위해 잉여가치를 사용하려는 추진력 말이다. 따라서 군사적 경쟁과 경제적 경쟁의 유일한 차이는 축적의 형태였을 뿐이다.
당대 서방의 선진 산업국들이 이 정도였는데, 발전 수준이 상대적으로 미약한 후발 주자들은 어떠했겠는가. 국가가 미약한 사적 자본들을 대체해 국내의 가용자원을 집중하고 단시간에 선진국을 따라잡으려 애썼다. 따라서 이런 국가들에서는 국가자본주의화 경향이 더 극단적이기 십상이었다.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의 형성과 위기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옛 소련을 봐야 그 사회의 진정한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옛 소련의 국가자본주의는 사기업과 시장이 존재했던 서방 국가자본주의에 비해 매우 극단적이었다. 그러나 양의 차이를 과장해 질의 차이가 있다고 보는 건 부정확하다.
소련에서 관료적(전면적) 국가자본주의가 형성된 것은 1920년대 말 러시아 혁명의 패배라는 역사적 계기를 통해 가능했다.(박노자는 옛 소련과 같은 모델이 “혁명의 보수화 과정”에서 나타났다고 보지만, 이는 역사적 구체성들이 추상돼 버려,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물론이고, 레닌과 트로츠키 등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두 노동자 혁명이 주요 선진국들로 확산되지 않는다면 일국의 노동자 국가는 세계 자본주의의 압력 때문에 오래 유지되지 못할 뿐 아니라 낡은 것(자본주의)이 부활하는 반혁명을 피할 수 없다고 봤다. 레닌은 1921년 코민테른 2차 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른 나라에서 혁명이 즉각 또는 적어도 매우 신속하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혁명 전과 심지어 후에도 우리는 생각했다.” 물론 당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러시아에서 자본주의가 부활하는 구체적 형태가 무엇일지는 정확하게 예측하지는 못했다.
불행히도 러시아 혁명은 특히 독일 혁명(1918~23년)과 중국 혁명(1925~27년) 등의 패배로 확산되지 못하고 고립돼 버렸다. 1928~29년에 벌어진 심각한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계기로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과거와 완전히 단절하고 급속한 공업화의 길로 치달았다. 특히, 관료들은 서방과의 군사적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했다.(스탈린주의 반혁명의 자세한 과정을 알고 싶다면, 크리스 하먼의 ‘스탈린 체제의 탄생’을 보시오. 이 글은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책갈피, 2007)에 번역·수록돼 있다. Michael Reiman, The Birth of Stalinism : USSR on the Eve of the Second Revolution[I.B. Tauris, 1987]에 훨씬 자세한 설명이 포함돼 있다.)
소련에서 자본주의는 나선형으로, 즉 혁명 전 사회의 요소들과 혁명 이후의 요소들이 결합되는 후퇴의 결과로 부활했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계급사회의 요소들이 ‘사회주의’의 외양을 걸친 채 다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급속하고 강압적인 공업화와 농업집산화가 그런 사례였다.
반혁명이 완수된 소련에서 관료들에게 부여된 지상 명령은 경쟁적 축적이었다. 1970년 소련 공산당 당시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이렇게 말했다고 보도됐다.
“브레즈네프 동지는 두 세계 체제 사이의 경제적 경쟁에 관한 문제를 강조했다. ‘이 경쟁의 형태는 여러 가지다’ 하고 그는 말했다. … 근본적 문제는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뿐 아니라 비용을 얼마나 들여서, 노동비용을 얼마나 써서 생산하느냐이기도 하다. … 바로 이 영역에 오늘날 두 체제 사이의 무게중심이 놓여 있다.”(〈프라우다〉, 1970년 4월 24일. 《좀비 자본주의》(책갈피, 2012)에서 재인용.)
여기서 우리는 소련에서 “국가가 주도한 투자의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게 된다. 지배 관료들이 내놓은 투자의 ‘정치적’ 목적은 군사 경쟁을 위해 중공업의 경쟁력을 세계적 수준으로 올리는 데 있었다. 그들에게는 소련 내부의 공업이 생산한 사용가치와 서방의 대기업 내부에서 생산된 비슷한 사용가치들을 비교하고 측정하는 게 중요했다. 즉, 소련에서 사용된 노동의 양을 서방 기업들이 사용한 노동의 양과 비교하는 것이고, 따라서 소련 내의 생산이 세계적 수준에서 작용하는 가치 법칙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관계를 보면, 소련에서 노동자들의 처지가 선진 산업국 노동자들의 처지와 본질적으로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박노자는 소련 등 동구권 사회에서 국가는 “이윤 추구가 아닌 각종의 정치적 목표 달성(자위 국방, 사회 안정화 등등)”을 위해 투자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박노자가 소련에서 노동시장이 존재했냐고 묻는 것을 보건대, 그는 소련에서 임금노동이 존재했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듯하다. 그러나 소련 노동자들은 마르크스가 말했던 임금노동자의 이중의 자유를 갖고 있었다.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해 그로부터 자유롭고, 대신에 일할 곳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말이다.
소련의 임금 수준은 산업에 따라, 직장에 따라, 또 노동계급 내의 기능별·교육별·성별 등에 따라 달랐다. 임금률은 중앙 계획 당국이 채택했지만, 그것은 다양한 경제 부문의 다양한 수요에 제대로 부응해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기업 경영자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인력을 끌어들이려고 국가의 임금 시책을 위반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따라서 임금이 ‘계획’되기는 했지만, 임금은 현실의 수요·공급이 주는 압력을 반영했고 경제 전반에 노동력을 분배하는 구실을 했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임금이 자본주의 경제에서 하는 고전적 기능이다.
일각에서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징인 실업이 옛 소련에는 없었으므로 소련이 자본주의일 리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최고 경제자문이었던 아벨 아간베기얀이 소련 학술원 산하 노보시비르스크 경제·산업 조직 연구소 소장 시절인 1965년에 주요 도시의 실업률이 8퍼센트이고 소도시의 실업률은 20~30퍼센트라고 지적했었다.
물론 소련에서 기업은 장차 일손이 모자라게 되는 때를 대비해 축적률이 저조한 시기에도 대량 해고보다는 불안정 고용을 선호했다. 이것은 경제에 간접 비용을 부과하는 셈이었지만, 이 점은 서구 시장 자본주의의 사회복지 혜택도 마찬가지였다.(이상의 내용은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책갈피, 2007) 159~161쪽 참조.)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 노동자들도 처지가 비슷했다. 중국 노동자들의 고용 안정성과 복지 수준은 불균등했다. 국영기업 노동자, 집체기업 노동자, 일종의 계약직 노동자들로 분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전자에서 후자로 갈수록 고용 안정, 임금, 복지 수준이 낮아졌다. 중국의 계약직 노동자들은 국제적 군사 경쟁 압력이 창출하는 필요에 따라 고용됐다가 기업에 부담이 되면 해고됐다.
한 연구 결과를 보면, 중국에서 1957~90년에 1967년과 1976년을 제외하고 해마다 한 곳 이상의 성에서 정부가 지시한 노동자 해고가 있었다. 특히, 1961년과 1962년에는 20개 성 모두에서 노동자들이 해고됐다. 1973년에도 국영 부문 노동자의 3퍼센트에 해당하는 1백70만 명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이상의 내용은 “‘중국 모델’을 둘러싼 최근 좌파들의 논의”(김용욱, 《마르크스21》 6호) 참조.)
그리고 대다수 서방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완전한 노동시장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고, 모두 국가와 기업의 필요에 따라 왜곡됐다. 예컨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장기 호황기에 일본과 독일을 포함한 많은 선진국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직률은 꽤 낮았다. 기업주 처지에서도 호황기에는 숙련 노동자들을 붙잡아두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그렇다고 해서 모든 노동자들의 처지가 그랬던 것은 물론 아니다.)
옛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사회가 자본주의의 경기변동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도 우리가 짚어 봐야 할 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구권 경제에는 서방 자본주의와 유사한 주기로 부침이 일어났다. 소련에서 신규 생산물 한 단위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불변자본의 양은 장기적으로 계속 증가했다. 이는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에 해당했고 결국 이윤율 저하 경향을 낳았다. 그래서 소련과 동구권 경제는 1980년대에 헤어나기 힘든 심각한 정체에 빠져들었는데, 이것이 동구권 붕괴의 중요한 배경이 됐다.
옛 소련을 서방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자본주의 변형태로 보면, 왜 주기적 경기 후퇴를 겪었고 끝내 심각한 위기로 나아갔는지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게 가능하다. 반대로 박노자처럼 이 사회가 자본주의가 아니었다고 본다면, 옛 소련이 위기에 빠진 근본 동역학이 무엇인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없다. (아마 그는 국가에 의한 중앙 통제 경제가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것 같은데, 그러면 그는 소련 경제가 어떻게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그토록 눈부신 경제 성장[자본 축적]을 이룩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이후에는 경제가 위기의 재발 국면으로 빠져들었는지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옛 소련과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 등이 모두 서방과 본질이 같은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고 주장하고, 그 근거를 소개했다. 그렇다면, 이런 주장이 오늘날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국가자본주의론이 오늘날 서방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데에도 여전히 중요하다는 점은 내가 지난번 글에서 설명했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에 맞선 대안 문제에서도 국가자본주의론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만약 옛 소련 등이 자본주의가 아니라 ‘탈(Post-)자본주의’ 사회라고 본다면, 오늘날 자본주의가 아닌 대안 모색은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박노자도 이런 문제에서 예외인지 의문이다. 그의 진술들을 종합해 보면, 스탈린 체제가 진정한 사회주의와 동떨어졌다고 비판하면서도 그러나 러시아 혁명과 완전히 단절한 체제였다고 여기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박노자는 《비굴의 시대》(한겨레출판)의 한 대목에서 “현실 사회주의”에서 관료층이 “민중이 요구하는 사회 정의를 어느 정도 고려”해 똑같이 초고속 산업화를 지향한 박정희와는 “본질적 차이”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러시아나 중국은 앞으로 엄청난 계급적 지진의 중심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비하는 차원에서도 개별 자본가나 사적 이윤 추구 없이 자유롭게 살았던 시절에 대한 집단 기억을 되새기는 것은 중요하다.”(346쪽)
오늘날 권위주의적 국가와 시장의 횡포 모두에 저항하는 중국 노동자들이 마오쩌둥 시대의 기억을 긍정적으로 되새겨야 한다고? 도대체 박노자에게 사회주의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혼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번 글에서 박노자는 오늘날의 중국을 두고 “준제국주의적(sub-imperialist)” 성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스탈린과 그 후계자들의 대외정책은 분명히 준제국주의적 특색”이 있다고 했다. 그는 한사코 ‘준-’이라는 접두어를 붙이며 옛 소련과 현 중국을 제국주의적 국가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왜 그럴까? 다시 한 번 박노자가 제국주의에 대해 갖고 있는 혼란된 개념을 짚어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옛 소련과 현 중국은 준제국주의? — 뒤죽박죽된 관점
박노자가 옛 소련의 대외정책을 “준제국주의적”이라고 보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단초가 될 만한 대목이 2012년에 나온 《좌파하라》(꾸리에)에 나온다. 이것은 박노자와의 인터뷰를 정리해 내놓은 책인데, 여기서 박노자는 이렇게 주장했다.
“소련이 민주국가도 아니었고, 사회주의라고 부르기도 어려웠지만, 미국하고 대립하면서 미국의 국제적 횡포를 어느 정도 견제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 이라크 침략이라든가 이런 것도 소련이 존재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제3세계에서는 어디까지나 소련과 미국이 서로 견제했기 때문에 적어도 아무런 명분도 없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 그대로 모든 국제법을 다 위반하면서 하는 독립국가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은 어려웠을 겁니다.”(156쪽)
이 대목만 놓고 보면, 소련 대외정책이 미국의 횡포를 견제했다며 진보적 측면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냉전의 성격과 제국주의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에서 제국주의는 미국이라는 특정 국가(또는 어느 다른 개별 국가들)로 환원되는 게 아니라, 다수의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벌이는 지정학적 경쟁 체제를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또 아래의 역사적 서술을 보면 냉전이 제국주의 양대 초강대국이 벌인 치열한 지정학적 경쟁임을 알 수 있다.
소련은 스탈린 집권기부터 경쟁적 축적 논리를 따라 대외 확장에 나섰다. 심지어 1939년 스탈린은 히틀러와 손잡고(!) 동유럽을 분할해서 폴란드의 절반과 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라트비아를 점령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무렵 소련은 승전국으로서 미국·영국과 함께 유럽의 세력권을 분할해 가졌다.
그리고 냉전이 전개되면서 미국과 소련은 ‘세력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고, 주로 제3세계가 그 경쟁의 무대였다. 양대 초강대국은 전면적 충돌을 피해 상대방이 확고하게 장악한 곳에 개입하는 것은 자제했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때로 힘 겨루기를 시도했다. 바로 한반도가 그런 열전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따라서 소련의 대외정책에 모종의 진보적 성격이 있다고 보는 관점은 조금치의 설득력도 없다. 박노자는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 등은 비판하면서도, 다른 데서는 소련 대외정책의 ‘진보성’을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소련의 대외정책에 관한 박노자의 진술들은 일관성이 없고 매우 혼란스러워 보인다.
소련의 대외정책을 이렇게 보니, 박노자는 소련 내부에서 벌어진 소수민족 억압에 대해서도 비슷한 혼란을 보여 준다. 2014년 2월 〈레디앙〉에 쓴 칼럼(“혁명, 급진적 ‘민족차별 철폐’ 이뤄”)에서 박노자는 옛 소련의 민족정책에 관한 완전히 뒤죽박죽된 관점을 드러냈다. 그는 스탈린과 그 이후의 “반동”으로 소련에서 “민족 편향”,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불신”이 만들어졌다면서도, 동시에 러시아 혁명의 유산이 다 사라지지 않아 “진정한 의미의 다문화주의가 존재한다면, 쏘련의 민족 정책이야말로 다문화주의의 전형이라고 봐야 합니다” 하고 소련(더 정확히 말하면, 러시아인들)의 소수민족 차별을 변호한다.
그런데 위의 주장은 박노자가 2006년에 발표한 논문(“후발 주자의 식민주의 – 구 소련의 주변부(1930-40년대까지의 우즈베키스탄)와 일제하의 조선”)과 상충되는 것이다.(이 논문은 그의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논문에서 몇 구절을 발췌하면 이렇다.
“1928년부터 우즈벡인을 비롯한 소련의 여러 튜르크 계통의 민족들에게 ‘문명적이며 근대적인’ 로마자 문자를 강요했다. … 1940년에 스탈린주의적 ‘러시아화(化)’의 일환으로 로마자 대신에 러시아식 키릴 문자의 사용이 의무화됐다. 새로이 만들어진 ‘우즈벡 민족’이 소련 판 ‘황민화’를 당하고 말았다.
“소련의 ‘국가 관료 자본’과 일본의 국가 지휘 하의 대자본은 ‘중심부’의 필요성에 맞추어 ‘주변부’의 고속도의 압축적인, 매우 폭압적이며 불균형한 개발을 주도했다. … 그 과정의 폭압성과 불균형성으로 인해 토착 사회 구성원의 다수는 ‘근대성’의 짐을 지면서 그 혜택을 입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명목상 우즈베키스탄의 최고 통치자인 지역당 제1서기는 우즈벡인으로 임명됐지만 실권은 늘 러시아인인 제2서기의 손에 있었다. … ‘우즈벡 학교’에서는 다수의 과목들이 우즈벡어로 교수됐지만 러시아어에 능통하지 못하는 ‘원주민’들이 사실상 ‘출세’의 통문에 들어설 수 없었다.”
사실, 소련의 소수민족 차별은 매우 뿌리 깊은 것이었다. 그리고 소련 해체의 주요 동력 중에 바로 불만에 찬 소수민족들의 저항이 포함돼 있었다는 점이 분명하다. 박노자는 과연 이 역사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문제는 과거의 일을 어떻게 보느냐에 그치는 게 아니다. 《좌파하라》에서 박노자는 오늘날의 중국에 대해서도 이런 주장을 했다.
“중동 같은 경우에는 미국을 견제할 만한 중국과 같은 대국이 없어요. … 극동에서의 중국, 남아시아에서의 인도, 이런 주요 대국들이 있어서 미국의 범죄적 행동이 어느 정도 적당히 견제되기도 하는데요.” (230쪽)
여기서 박노자는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미국 제국주의를 견제할 세력이 되리라는 기대를 드러낸다. 그는 어떤 글에서는 ‘중국 편’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다른 데서는 중국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낸다. 완전히 뒤죽박죽이다. 위의 인용구에서 드러난 박노자의 생각은 마르크스주의의 제국주의론보다는 부르주아 국제관계학의 세력균형 이론과 유사하다.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미국을 견제하는 것은 미국 제국주의자들의 범죄적 행동을 제대로 막아 주지도 못한다. 제국주의에 맞설 세력은 국제 노동계급의 혁명들과 억압받는 민족들의 해방 투쟁이 동맹을 맺음으로써만 형성될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이 그런 세력인가? 오히려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족 등을 억압하는 한족이 지배민족인 국가 아닌가.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더 떠오른다. 박노자는 한 칼럼에서 “티베트 상황은 일제 시대에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에 대해 했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중국이 조금이라도 “미국의 범죄적 행동”을 견제한다고 보면, 티베트의 분리 독립이 (미국) 제국주의를 강화시킨다는 논리적 결론에 닿을 수 있다. 박노자의 주장에 모순이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는 경쟁 체제이고 중국도 제국주의적 국가라는 분석에 기초해야, 중국 소수 민족의 투쟁을 일관되게 지지하면서도 이를 국제 노동계급의 반제국주의와 결합시킬 수 있다.
결론: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옹호하며
미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핼 드레이퍼(1914~1990)는 노동계급이 자력으로 해방을 쟁취해야 한다는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와 달리, “위로부터 사회주의”는 이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 같은 “위로부터 사회주의”를 선택하는 것은 “옛 세계를 그리워하는, 즉 ‘옛 쓰레기’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20세기 상당 기간 동안(1929~89), 국제 좌파들 사이에서 스탈린주의가 맹위를 떨쳤다. 심지어 유럽에서 1968년 반란으로 급진화한 청년들 상당수도 스탈린주의의 변형태인 마오쩌둥주의를 받아들였고, 이 때문에 나중에 온갖 혼란을 겪어야 했다. 남한에서도 스탈린주의의 전통은 1980년대 좌파들 사이에서 매우 강력했다. (물론 지금도 남한 좌파의 다수파인 자민통 계열이 그 전통을 물려받았으므로 강력한 유산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여전히 북한이 남아 있지만 동구권은 붕괴했다.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명시적으로 스탈린주의와 결별했지만, 스탈린주의가 남긴 부정적 유산과 그 세력이 좌파들 내에서 다 사라진 건 아니다. 민중전선, 노동계급의 중심성에 대한 회의, 자본주의 국가의 계급적 성격, 제국주의 분석 등 많은 문제들에 관한 좌파 내 논의에서 스탈린주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온갖 개혁주의와 더불어 스탈린주의의 유산에도 맞서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옹호하고 노동계급의 자력해방과 국제주의를 추구할 역사적 책무가 있다.
박노자의 뒤죽박죽된 관점은 이런 책무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박노자는 《좌파하라》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소련이 몰락하지 않았다면 세계 곳곳의 상황이 지금보다는 훨씬 좋았을 겁니다. 총자본이 노동계급의 급진화, 친소련화를 우려해서라도 신자유주의가 지금처럼 기승부리지 않았을 것이고, 미국에 대한 견제 세력의 존재로 인해서 미국의 국제적인 폭력이 현재만큼 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157쪽)
박노자가 의도하지 않을지라도, 이런 종류의 스탈린주의 ‘차악론’은 노동자 운동을 커다란 혼란에 빠뜨렸다. ‘차악’ 또는 ‘차선’ 운운은 전술 논의에서나 등장할 문제이지,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이나 국제주의 같은) 원칙 자체가 관련된 논의 속으로 비화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세계는 자본주의 위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며, 제국주의의 위기도 중장기적으로 심상치 않다. 좌파들의 책무가 그만큼 매우 무거운 것이다. 생각대로 투쟁이 풀리지 않고 당장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실망감과 조급함 때문에 온갖 샛길로 빠져들지 말고,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 해방 운동을 끈덕지게 건설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