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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이슬람교 혐오는 인종차별이다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펄스 게이클럽 대학살 사건은 정말 충격적인 끔찍한 참사다. 피살된 성소수자들이 죽기 전에 가족이나 친구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 얘기를 들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대학살범 오마르 마틴은 아프가니스탄계 이민자 2세이자 아이시스(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 지지자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원래는 디즈니랜드를 노렸었다고 한다.

그는 미국인 전체를 교전국의 충성 국민으로 여겼음에 틀림없다.

이런 비뚤어진 인식은 그가 겪은 인종차별을 반영하는 것이다. 서구의 무슬림·이슬람교 혐오(이하 이슬람혐오)는 인종차별이고, 인종차별은 계급 분열을 은폐하고 적대 계급에 속한 성원들을 동일 인종이라는 카테고리 속에 한데 뭉뚱그리도록 이끈다.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에 따르면, 한국인의 무슬림·이슬람교 이해는 OECD 평균은커녕 제3세계 수준에도 못 미치고, “이슬람=테러리스트 식(式)” 이슬람혐오도 광범하다.(이희수, ‘[전문가 칼럼] 이슬람 문화의 이해: 편견과 오해를 넘어’, 인터넷 문서). 한국인의 편견과 오해는 미국과 서구의 여론을 여과 없이 전달하는 국내 언론의 국제 보도 관행 탓이 크다.

지난해 미국의 한 자유주의적 인터넷 신문이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절반이 넘는(55퍼센트) 미국인들이 무슬림과 이슬람교에 우호적이지 않은 인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미국 〈허핑턴 포스트〉, 2015년 4월 10일자). “약간 우호적” 또는 “매우 우호적” 태도를 갖고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합쳐서 21퍼센트밖에 안 된다. 또, 이슬람교에 대해 “잘” 또는 “매우 잘” 안다고 대답한 사람은 13퍼센트밖에 안 된다.

물론 좀 더 보수적인 여론조사는 이보다 더 부정적인 결과를 보여 준다. 2015년 5월 28일치 AFP통신이 보도한 미국 여론조사 전문기관 퓨리서치센터의 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인의 60퍼센트가 무고한 민간인 피해 우려에도 불구하고 드론(무인기)를 이용한 “이슬람 극단주의자” 공격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프랑스의 여론도 미국과 비슷하다. 2015년 1월 〈르몽드〉 지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프랑스인의 51퍼센트가 이슬람교가 “프랑스 사회의 가치와 양립할 수 없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도대체 “프랑스 사회의 가치”라는 게 있나?)

독일에서는 ‘서구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들’이라는 명칭의 우익 정당 ‘페기다’가 자주 이슬람혐오 집회를 열고 “우리가 국민이다”라는 구호를 외친다. 피부색이나 종교가 다른 사람들은 독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테러 공포만이 이슬람혐오의 원인은 아니다. 경기 침체가 여러 해 지속되면서, 무슬림 이민자들을 속죄양 삼아 그들에게 증오와 분노를 돌리는 감정적 거짓 선동이 준동한다. 이 우익 데마고그들은 “무슬림 유입으로 유럽 문화가 훼손되고 있다”고 주장해 지난해 초 여론조사 기관 포르사의 조사 결과 독일인 29퍼센트의 지지를 받았다.

이슬람혐오 범죄도 종종 일어난다. 스웨덴에서는 2014년 말과 2015년 초의 일주일 휴가 기간에 세 차례나 이슬람교 사원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에서는 2014년 6월 이슬람교 복장인 아바야를 입은 사우디아라비아계 여성이 산책하다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서구의 이슬람혐오가 적잖은 서구인의 지지를 받는 데는 ‘자유주의적 가치들이 (이슬람의) 위협을 받는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자유주의적 가치들’은 이슬람혐오의 암호명이 됐다. 자유주의적 가치들 가운데 특히 ‘관용’이라는 가치가 두드러지는데, 우월성과 합리성을 암시하는 암호가 돼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광신’은 비합리성과 반지성주의를 뜻하는 암호이다.

‘관용 대(vs) 광신’의 이분법은 계몽주의 이래 3세기반 동안 자유주의자들이 꾸준히 애용해 온 논법이었다. 하지만 15년 전 알카에다의 9·11 공격 이후 다시금 급부상했다. 동시에 이슬람혐오도 급등했다. 한 가지 요인은 ‘이슬람’ 하면 ‘원리주의’나 ‘극단주의’, 심지어 ‘테러리스트’라는 말들을 떠올리게끔 된 것이다.

이슬람혐오의 핵심 성분은 이슬람교가 단일한 동질적인 믿음 체계이고 이 믿음 체계는 서구와 공유하는 가치가 없다는 믿음이다. 즉, 서구의 (자유주의적) 가치는 문명, 합리성, 평화, 여성의 권리 등인 데 반해 이슬람의 가치는 야만성, 비합리성, 폭력성, 정복, 성차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믿음은 이슬람의 믿음 체계와 전통을 모르고 또 오해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자유주의자들의 무지와 오해가 어디 이뿐이랴만은).

이슬람교의 초기 이상은 분명 종교·정치 공동체(움마)를 세워 공평한 부의 분배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종교처럼 이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었다. 현실은 이슬람 제국의 건설이었고, 이 제국은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결국 이러한 격차로 말미암아 이슬람교 안에 내분이 일어났고 종파들이 성장했다. 무슬림들은 지배적인 정치 구조 바깥에서 종교 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사실 그러는 도리밖에 달리 어쩔 수도 없었다.

이런 과정은 종교개혁 과정에서 박해를 받은 아나뱁티스트들의 일부와 영국 국교회의 박해를 받은 청교도들의 일부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민 가기 전에 겪은 경험과도 유사하다. 사실 그보다 훨씬 전인 4세기에 로마제국의 일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교의 국교화로 빚어진 고위 성직자들과 제도교회의 부패에 반발해 수도원 운동을 펼친 것도 비슷한 경험이었다. 이슬람혐오에 동조하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속담을 곱씹어 봐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이슬람은 둘째로 큰 세계종교가 돼 있다. 프랑스와 영국 같은 주요 유럽 나라에서도 그렇다. 유럽 무슬림들은 유럽식 무슬림 문화를 계발해 왔다. 그러나 이는 좌절을 겪어 왔다. 자유주의자들의 과도하고 무례한 요구 때문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무슬림 이민자들에게 ‘유럽인이 되려면 이슬람교 믿음에 충실하지 말라’고 말한다. 불관용과 폭력성을 버리고 그리스도교처럼 돼야 한다는 말을 이렇게 에둘러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듯이 무슬림 제국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은(유대인과 함께) 흔히 ‘딤미(피보호 백성)’로 규정돼 그들에 대한 공격이 법규로 금지되기도 했다. 특히 오스만제국은 그리스도인, 유대인, 아랍인, 투르크인, 베르베르인 등이 자기네 전통을 유지하면서 서로 평화적으로 공존 공생하며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마련해 줬다(카렌 암스트롱, 《이슬람》, 을유문화사, 2012, 154쪽). 수세기에 걸쳐 마녀사냥으로 적어도 수만 명의 여성을 고문하고 살해한 그리스도교 유럽보다 훨씬 관용적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이 흔히 제기하는 문제가 히잡 착용이다. 그들은 무슬림 여성이 손위 남자들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히잡을 착용하는 것이라고 가정한 채 얘기한다. 그래서 국가가 공공장소에서의 히잡 착용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은 여성 해방적 조처라고 옹호한다. 그런데도 무슬림 여성이 히잡 착용을 지지한다면, 그러한 ‘자발적 복종’은 서구 페미니즘의 가치를 모욕하는 셈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나 서구에서의 여성 권리 담론은 실제 현실에 크게 못 미친다. 임금, 경력, 가정 폭력 등이 계속 여전히 문제 되고 있는 것을 보아도 금세 알 수 있다. 사실, 서구 여성 권리에 대한 최대 위협은 낙태 관련 정보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가족계획사업 지원 예산을 삭감하는 미국 근본주의자들이 가하는 것이 아닐까? 이슬람교나 무슬림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필자가 1994년 말쯤 읽은 국내 일간신문은 프랑스 〈리베라시옹〉 신문의 기사를 인용했는데, 그 기사는 프랑스 일부 사회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소개한 것이었다. 히잡을 착용한 여성이라고 해서 전통을 보수적으로 고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핵심 내용이었다. 오히려 히잡 착용을 하지 않는 여성보다 진보적인 경우도 많았다. 즉, 부모가 결혼 상대를 정해 주는 것을 거부한다든지, 가정 바깥에서 직장을 구한다든지, 권리의 불평등을 성토한다든지 등의 태도를 보였다.

이슬람교라 해서 다른 종교보다 특별히 더 근본주의적이 되기 쉬운 까닭은 없다. 낙태 반대를 위해 낙태 시술 병원을 테러 공격하고, 진화론 대신에 창조론을 가르치라며 불법과 폭력을 포함한 온갖 방식의 로비 활동을 하는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나 더 일반적으로 보수 복음주의자들을 생각해 보라. 동성애와 이슬람교를 혐오하는 그들은 결코 극소수 예외가 아니라 개신교의 다수파를 차지한다. 바로 10년 전쯤 부패한 사학재단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광 조지 부시를 성원하기 위해 수만 명의 노인들을 시청 앞 집회에 동원했다.(가톨릭 교회 안에도 이런 생각을 품은 자들이 적지 않음도 고려해야 한다.)

근본주의나 원리주의는 단순히 경전이나 전통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런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생활조건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경제와 사회의 위기로 사회가 매우 불안정하고 개인들의 미래가 매우 불확실할 때 그들은 확실성, 안정적 통제 등을 희구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세계 무슬림의 다수는 제국주의에 의해 굴욕을 당하고 민주주의를 부정당하고 빈곤과 억압을 겪어 왔다. 그리고 그 이면에 서구 제국주의자들과 그들과 유착한 현지 독재자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이슬람주의는 제국주의가 제3세계를 식민 통치하기 시작하던 19세기 말에 등장했다. 특히 1882년, 영국이 이집트를 강점했을 때 이슬람주의자들은 강점에 반대하는 주목할 만한 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중동 전역의 무슬림들이 단결하면 식민 통치를 종식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중심으로 한 강령을 내놓았다. 이들 무슬림형제단은 특히 1920년대에 세속 민족주의자들이 영국 제국과 배신적 타협을 하며 영 제국의 꼭두각시 정부를 관리하던 때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세속 민족주의자들(그리고 그 좌파를 이루던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의 배신과 꾀죄죄함 때문에 이슬람주의자들이 성장하는 일은 1960년대 이후 최근까지도 재현돼 오던 일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제국주의와 세속 민족주의와는 다른 대안으로서 초기 이슬람을 제시했다. 마치 그리스도인들이 초기 교회나 종교개혁기 교회를 이상향처럼 제시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몇 년 전 이집트에서 무슬림형제단 정부가 꾀죄죄한 수준의 개혁조차 제공하지 못한 채 군부에 밀려 마침내 물러난 것처럼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제 그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이하 아이시스)는 마치 이 한계를 메우려 애쓰는 것처럼 일부 무슬림 청년들에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실재와 다르다. 아이시스는 시리아 혁명가들인 반정부군을 죽이고 여성과 성소수자를 욕보인다는 점만 봐도 반혁명적이고 반동적이다.

만약 좌파가 이슬람교와 이슬람주의의 약점들을 유물론적으로 잘 분석해 파고든다면 아이시스의 허를 찌를 수 있다. 물론 좌파가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시리아와 레바논, 이집트 등지의 사회주의자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나 좌파가 종교를 거부하고 세속주의를 옹호한다며 제국주의자들의 자유주의적 가치들을 부주의하게 옹호한다면 그들은 함정에 빠질 수 있다. 난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국내 무슬림 이민자들을 천대하고, 다른 국가의 소규모 낙후한 핵무기는 문제 삼으면서 정말로 위험한 대량 핵무기로 다른 국가들을 위협하는 제국주의 정부들에 무슨 관용이 있는가.

또한 친북사상으로 수감되거나 박해를 받는 사람의 처지에서, 또 동성애로 혐오를 받는 성소수자들의 처지에서, 그리고 이슬람교 신자라 해서 잠재적 테러리스트 취급을 받는 무슬림들의 처지에서 관용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우익 기독교인들의 성소수자 혐오 집회를 허용하는 것은 잘못된 ‘관용’이다.

중동 등지에서 드론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는 미국 정부의 현지 주재 외교 관리를 연단에 올려 연설케 하는 것도 진정한 관용이 아니다. 좌파가 이 문제에 침묵하는 것도 관용이 아니다. 좌파가 관용을 떠받들고 광신을 배격한다며 제국주의자들과 대기업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것은 노동계급더러 그런 자들과 유대감을 느끼라고 말하는 셈이다.

아이시스는 필자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진보적인 운동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진정으로) 진보적인 운동이 종교적 동기로 전개되고 있어서 그것을 지지해야 할 때도 마르크스주의자는 종교 관념과 사상을 지지할 수는 없다. 노동자들과 저항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뒤죽박죽된 분석과 전략을 제안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우리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억압과 천대로부터 대다수 무슬림을 지키겠다는 확고한 자세를 보여 줘야 한다. 그래야 차별받고 혐오받는 사람들의 단결한 운동이라는 이상도 현실화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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