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2017년 총선: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래 최대 약진을 한 제러미 코빈의 노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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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8일 치러진 조기 총선 결과는 영국 정치에 폭탄과도 같은 충격을 던졌다. 주류 평론가들은 물론 많은 좌파들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석달 새 세 차례나 일어난 테러 때문이었다.
보수당 총리 테리사 메이는 당초 엄청난 자신감을 갖고 총선 조기 실시를 선언했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보수당 지지율은 노동당보다 무려 20퍼센트포인트 더 높았다. 그래서 선거에서 보수당이 절반보다 50~1백 석 많은 의석을 차지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했다. 반면 노동당은 의석을 늘릴 가망이 없고 대표 제러미 코빈의 지도력은 완전히 파산할 것이라고들 전망했다. (‘한국통’이라는 대니얼 튜더 〈이코노미스트〉 기자를 포함해야 한다.) 모두 헛소리였다.
선거 결과 보수당은 42퍼센트, 노동당은 40퍼센트를 득표했다. 어느 정당도 과반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기존의 과반 의석도 지키지 못한 보수당에게는 재앙이었다. 엄청났던 지지율 격차를 거의 다 따라 잡은 코빈과 그를 지지하는 운동에게는 크나큰 성과다.
코빈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래 그 어떤 노동당 지도자보다도 더 많이 보수당 표를 가져왔다. 무엇보다 좌파적 주장으로 그랬다는 것이 정말 의미심장하다.
실제 정치 변화는 득표율 변화보다 더 크다. 선거 운동 기간에 두 차례나 테러 사건이 벌어졌는데, 테러 공격은 보수당에 유리한 사건이라는 통설을 깨고 노동당이 크게 선전했기 때문이다.
코빈은 테러 사건을 영국의 대외정책과 연결시켰다. 영국 정치에서는 아주 과감한 행동이었다. 주류 언론은 코빈에 분노하며 발광했지만, 광범한 대중은 코빈의 주장에 호응했다. 테러가 발생한 맨체스터에서는 평범한 시민들이 “우리는 분열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외쳤다. 런던의 여러 지역구에서도 코빈과 그의 측근이자 예비내각 내무장관인 다이언 애벗 등이 압도적 차이로 당선했다.
‘코빈 현상’의 동력
코빈이 이처럼 성과를 거둔 가장 큰 요인은 그가 요즘 영국 노동계급 청년들의 정서에 맞게 매우 급진적인 메시지로 선거에 임한 것이다.
먼저, 노동당의 이번 선거 공약은 지난 30여 년 새 가장 급진적이었다. 1980년 이래 민영화된 각종 사업을 재국유화하고, 공공지출을 크게 늘리고, 불안정 노동으로 악명 높은 ‘초단시간 노동’을 폐지하고(이 공약에 특히 청년들이 열광했다), 임금을 인상하겠다 등등.
더 중요한 것은 코빈이 이런 공약을 내세우며 지지자들의 열정을 사로잡아 그들이 선거 운동에 동참하도록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코빈이 가는 곳마다 수만 명이 운집했다. 그 분위기는 아주 열광적이었고, 2년 전 코빈이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당 대표가 되던 때와 흡사했다. 그처럼 적극적으로 코빈을 지지한 사람들 중에는 청년들이 가장 많았다. 노동조합 활동가와 오랜 노동당 당원들도 많았다. 청년과 학생 등 지지자들의 역동성이 바로 코빈 승리의 핵심 동력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노동당의 기층 지지자 구성에 변화가 생긴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코빈이 당 대표가 된 이래 많은 청년들이 입당한 것이 가장 현저했다. 이처럼 노동당을 적극 지지하는 청년들이 이번 선거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고, 많은 경우 노동당의 공식 선거운동 기구 바깥에서 그랬다.
코빈의 부상은 국제적 현상의 일부다. 미국 샌더스, 프랑스 멜랑숑, 스페인 포데모스, (배신하기 전의) 그리스 시리자의 부상 등 좌파적 개혁주의가 국제적으로 성장하는 현상이 영국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다만, 프랑스·스페인 등과 달리 영국에서는 좌파적 대안을 노동당 바깥에서 건설하지 못했기 때문에 노동당 안에서 좌파적 개혁주의가 부상했다.
부차적이지만 보수당의 선거 운동이 형편없었다는 것도 코빈이 성과를 거둔 요인이었다. 보수당은 총리 메이와 “안정적이고 강한 리더십”을 강조하는 선거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메이는 긴축 정책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고 토론회도 한사코 거절할 정도로 오만한 인물이다. 더욱이 보수당이 내세운 핵심 공약은 사회복지가 필요한 노인들의 자산을 압류까지 할 수 있다(‘치매세’)는 악랄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노령 유권자들의 반발을 샀다.
자기만족은 이를 수도 있다. 당 내에서 코빈을 공격하던 노동당 우파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벌써부터 그들의 일부는 이번 선거에서 이긴 것이 코빈 덕택이 아니라고 말한다. 선거 전에는 패배하면 코빈이 책임을 모두 져야 한다고 떠들었으면서 말이다. 그들은 당분간은 잠잠할 테지만 언제든 다시 코빈을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것이다.
계속될 정치 불안과 좌파의 과제
보수당은 의석이 과반이 안 돼, 단독으로는 정부 구성이 불가능하다. 총리 메이는 북아일랜드의 영연방병합당(DUP)과 연정을 논의하고 있다. 성사돼도 겨우 2석 많은 과반에 그친다. 영연방병합당은 개신교의 입장에서 지독하게 종파적이고(가톨릭 반대), 영국을 지지하는 왕당파 세력과 연계가 있고, 낙태 반대와 동성애 반대 등으로 여성·성소수자를 공격하고, 기후변화 사실을 부인하는 우익 정당이다. (관련기사: 보수당의 연정 파트너 영연방병합당(DUP)은 무엇인가) 보수당이 이런 자들과 연정을 꾸리려 한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이처럼 몹시 불안정한 정부가 들어서는 가운데, 영국은 6월 19일부터 브렉시트 탈퇴 협상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하는 처지이다. 이런 상황을 자초해 당 안팎의 비난에 시달리는 총리 메이는 올해 안에 물러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영국 정치의 불안정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다. 정부는 몹시 취약할 테지만, 선거 패배 직후부터 또다시 무슬림 혐오 부추기기에 열을 올리며 고약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한편, 이번 선거에서 브렉시트를 되돌리겠다는 주장을 주되게 내세운 정당들(자민당과 녹색당)은 모두 별다른 돌파구를 열지 못했다. 스코틀랜드국민당(SNP)도 의석을 많이 잃었다. SNP의 진보 행세가 더는 통하지 않은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사회주의를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코빈이 선거에서 성공을 크게 거둔 것은 선진 자본주의 세계의 우리 좌파를 고무하고 진보·좌파 측의 운동에 힘을 크게 실어 줄 것이다.
이미 영국에서는 대중적 항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투표 당일 총리 공관 주변에서 교원노조(NUT)의 한 지부가 급하게 집회를 개최했다. (그래도 1~2천 명이 참가했다.) 메이의 사퇴와 영연방병합당과의 연정 계획에 항의하는 집회였다.
영국 청년들 사이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이 다시 토론되고 있고, 이들 다수는 노동당 공식 기구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노동당보다 왼쪽의 좌파에게 커다란 기회가 열린 것이다.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등 영국의 혁명적 좌파는 다양한 대중 항의 운동에 함께하고, 당내 우파에 맞서 노동당 코빈을 방어하고, 동시에 명확한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사회주의 정치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이런 운동들에 다가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