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러시아 내통 논란 배경:
세계 전략을 둘러싼 미국 지배계급의 내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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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미국 정계는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러시아와 내통했는지를 두고 설전이 뜨겁다. 의회에서는 진작부터 4개 위원회들(상원 정보위, 상원 사법위, 하원 정보위, 하원 정부감시위)이 각각 조사를 진행중이고, 법무부 임명 특별검사가 지난 5월부터 “범죄 수사”에 들어갔다.
주류 언론은 해임된 FBI 국장과 특검(역시 FBI 국장 출신)을 ‘민주주의 질서의 수호자’인 양 치켜세운다. 그러나 그들은 조지 W 부시와 오바마의 재임 기간 미국뿐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민주주의를 난도질한 ‘테러와의 전쟁’의 핵심 수뇌부들이었다.
지금의 논란 뒤에는 미국 지배자들이 봉착한 까다로운 전략 문제가 있다.
미국 지배자들은 공화당과 민주당을 막론하고 세계 패권을 유지하는 데서 유라시아(유럽+아시아) 대륙이 중요함을 강조해 왔다. 세계 인구의 다수가 살고 있을 뿐 아니라 미국을 제외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모두 유럽이나 아시아에 있기 때문이다.
유라시아에서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은 이렇다. ① 서쪽에서는 러시아의 진출을 막고 유럽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 ② 중동의 석유를 통제한다. ③ 동쪽에서는 일본을 중심으로 중국을 견제한다.
그러나 미국은 이들 세 지역에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데 갈수록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경제적으로 중국, 독일, 일본 등의 추격 속에 미국 경제의 상대적 지위가 계속 낮아진 탓이다.
트럼프의 전략은 중국 견제를 최우선으로 삼는다. 이 점에서는 전임 대통령 오바마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트럼프는 오바마보다 더 나아가, 중국을 견제하는 데서 공조를 얻으려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한편, 수십 년 동안 미국의 군사력에 의존하면서도 그 비용을 지불하는 데는 인색한 서유럽 동맹국(특히 독일)을 압박하려 한다.
문제는 러시아가 2008년 세계경제 공황 이후에만도 현재 조지아·우크라이나·시리아·북한 등지에서 꾸준히 영향력을 키워 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미국의 의사를 직접 거스르거나 적어도 미국의 행보에 어깃장을 놓는 방식으로 그랬다.
더욱이 러시아는 냉전기에 (소련으로서) 미국의 대척점에 서서 세계를 양분해 패권을 행사한 제국주의 국가였다. 그때에 비해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축소됐을지라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 거점과 인적·제도적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 군사력도 여전히 세계 2위다.
전통적으로 미국 지배자들은 러시아가 유라시아에서 미국에 대항할 능력을 갖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래서 사려 깊지 못하고 무모한 모험도 저지를 것처럼 보이는 트럼프가 러시아에 접근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큰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러시아와 겨뤄 온 미국 정보기관들이 트럼프를 공격하는 데 앞장서는 배경이다.
구체적으로, 2014년 러시아는 무력을 동원해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를 병합한 이후 미국과 유럽의 제재 때문에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있는데, 트럼프는 그 제재를 해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국이 러시아 제재를 풀면 세계의 “경찰 국가”로서 위신이 크게 떨어질 뿐 아니라 브렉시트 이후 가뜩이나 불안정해진 유럽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 동유럽 국가들이 미국의 영향력에서 멀어지고 러시아에 우호적인 극우 정치인들의 부상을 부추기는 효과를 내어, 장기적으로 유럽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크게 훼손되는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중동에서도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면 당장 시리아는 안정될지 몰라도 미국의 중동 패권(이라크 점령 실패로 이미 크게 휘청거렸다)이 더 흔들릴지 모른다는 점을 미국 지배자들은 우려한다.
즉, 앞서 말한 미국의 핵심 전략 중 두 개(①, ②)가 흔들릴 수 있다.
더 위험해진 세계
미국 패권의 진정한 문제는 현재 미국의 지배자들이 심각하게 분열해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 중 누구도 미국 경제력의 상대적 하락에 관해 똑 부러지는 대안을 내놓지 못한 채 위기를 키워 왔고, 그 덕분에 트럼프 같은 모험주의적 인물이 부상한 가운데, 전략 변화를 놓고 미국 지배자들 다수가 트럼프에 저항하면서 분열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작은 불씨가 큰 위험으로 발전할 수 있다. 트럼프가 전략의 변화를 시험하기 위해서든, 국내 정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든 군사적 모험을 벌이는 것 말이다. 제국주의 열강뿐 아니라 지역 강국들까지 가세해 대리전이 벌어지고 있는 시리아의 수시로 변하는 전황이나, 중동 정세의 변화가 대표적 사례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다시금 서로 으르렁거리는 데 이어(지난 호 필자의 기사 ‘카타르 단교 사태, 이란 테러 … 트럼프 시대에 중동은 한층 더 요동치는가’ 참고), 최근 미국이 시리아 상공에서 시리아 전투기를 격추시킨 사건은 중동이 또다시 요동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트럼프가 동북아시아에서 도박을 벌이기 좋은 조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 트럼프의 정치 위기와 미국의 전략 위기 모두 지금보다 악화할 가능성이 크고, 트럼프 자신이나 다른 미국 지배자들이 더 큰 모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올해 4월 한반도를 가운데 두고서 미국과 중국의 항공모함 세 대가 서로 대치하던 상황은 그런 미래 위험을 얼핏 보여 줬다.
오늘날 미국 공식 정치권의 논란이 미국 패권의 불안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좀 더 위험한 지정학적 위기를 수반할 것임을 이해하고 대비해야 한다. 제국주의의 원천인 자본주의 시스템에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 즉 노동계급의 힘을 키우는 것이 핵심이다.
※ 추천 읽을 거리: ‘트럼프 집권과 세계 자본주의 – 체제의 불안정성을 반영하는 동시에 키우고 있다’, 《마르크스21》 2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