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의 노동계급》 서평 :
고전 마르크스주의 관점으로 한국의 노동계급을 분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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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계급은 1987년 7~8월 대중파업을 통해 자신들이 “자본주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마르크스)이라는 특별한 존재임을 널리 알렸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이 기간에 한국은 신자유주의가 지배적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이로 인해 노동계급이 축소되고 파편화되고 이질화돼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계급은 사라졌다는 주장이 상식처럼 돼 버렸다.
노동운동 활동가 사이에는 ‘1987년 투쟁의 주축이었던 대기업 정규직은 오늘날 노동운동의 걸림돌’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 착취로 득을 본다거나, 신자유주의와 기술 발전으로 정규직은 사라지고 노동자들이 일회용 신세의 불안정한 노동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식으로 현실을 묘사한다.
노동자연대 운영위원이자 조직노동운동팀장인 김하영이 쓴 《오늘날 한국의 노동계급》은 노동운동 안에서 이처럼 상식처럼 퍼져 있는 노동계급 약화론을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논박한다. 특히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를 적용해 지난 30년간 한국의 계급 구조와 그 변화, 자본주의 변화에 따른 노동계급의 조건 변화와 그것이 노동운동에 미친 영향 등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최초로 오늘날 한국의 노동계급을 분석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출간은 더욱 값지다.
저자와 함께 동시대의 중요한 계급투쟁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나로서는 그녀의 탁월한 이론적 능력과 이를 적용해 현실을 분석하고 전술을 내놓는 것에 감탄해 왔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노동계급의 잠재력
이 책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전반부는 마르크스의 계급론과 베버, 라이트 등 여러 논자들의 계급론을 다루며 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이 현재의 계급구조를 분석하는 데 더 적절한지 입증한다.
저자는 마르크스의 계급 개념은 착취 관계 속에서 발휘되는 집단적 힘을 부각한다고 말한다.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을 집합적으로 조직하고 착취한다는 사실은 노동자들에게 막대한 집합적 힘을 준다.” “이 집합적 힘은 공장이나 사무실, 교통 시스템 등 생산을 멈추는 데도 사용할 수 있고 생산을 노동자들 자신을 위해 조직하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다.”(66쪽)
1987년 대중파업뿐 아니라 지난 30년간 한국의 노동계급은 이런 집합적 힘을 수십 차례 보여줬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을 특별한 존재로 봤다. 하지만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변화·발전하면서 노동계급도 변했고, 개념 규정도 달리해야 한다고 제기한다.
우리 나라 진보·좌파 지식인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에드워드 파머 톰슨은 계급을 물질적 조건보다 의식으로 정의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는 “혁명적 정치에 무관심한 노동계급의 현재 의식을 보면서 그 잠재력”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끌린다.
육체노동자들만을 노동계급으로 봤던 니코스 풀란차스는 평범한 사무·전문기술직 노동자들을 노동계급에서 제외시킨다. 풀란차스의 개념으로 보면, 간호사, 교사, 공무원,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노동계급이 아니다.
이는 막스 베버의 계급론도 마찬가지다. 베버는 계급을 생산수단 지배 여부가 아니라 다양한 경제적 요인(기술, 교육, 면허증 보유 등)으로 구분했고, 평범한 사무·전문기술직 노동자들을 신중간계급으로 분류한다. 후대 베버주의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를 다른 신분으로 규정해 노동계급 내 이질성이 커지고 파편화됐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자인 에릭 올린 라이트는 사무직 노동자를 모두 ‘신중간계급’으로 규정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러나 그는 간호사, 교사는 여전히 신중간계급으로 봤을 뿐 아니라 국영기업 경영자와 국가 관료 등도 같은 신중간계급으로 분류했다.
이런 분석이 뜻하는 바는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노동계급은 줄어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계급과의 동맹이 필요하다는 민중주의와 스탈린주의 민중전선 전략으로 나아간다. 이는 노동계급의 힘과 잠재력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런 분석은 한국 노동계급의 실제 변화 과정과도 맞지 않는다.
한국 자본주의는 전통적 중간계급이 점점 노동계급으로 편입돼 왔고,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 양극화가 분명해져 왔다. 물론 다른 선진국보다 자영업자 비중이 높지만 2000년 이래 자영업자도 감소 추세다(131쪽). 결국 농민과 도시 자영업자 숫자가 꽤 컸던 20~30년 전과 달리 오늘날 한국 사회는 노동계급이 압도 다수가 됐다(158쪽). 계급투쟁이 일어나면 중간계급은 양대 계급 중 어느 한쪽으로 이끌릴 수밖에 없다.
노동의 변화
책의 후반부는 고전 마르크스주의 관점으로 한국 사회의 계급 구조를 분석하고 지난 30년간 한국 노동계급에게 일어난 변화와 변화의 진정한 의미를 짚어 내며 여전히 노동계급이 사회 변혁의 주체임을 제시한다. 또한 변화의 의미를 왜곡·과장하는 개혁주의자들의 논지를 반박한다.
저자는 지난 30년간 한국 노동운동 안에서 유행처럼 제기돼 왔던 주요 쟁점인 ‘제조업 육체 노동자들은 쇠퇴했는가’, ‘서비스 노동자 증가로 노동계급은 약화됐는가’, ‘기업의 해외 진출이 임금과 고용에 미치는 영향’, ‘비정규직 증가, 생산의 외주화와 유연 노동으로 노동계급은 분절되고 이질화됐는가’ 등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이용해 답하고 있다. 한국의 구체적 현실에 관한 자료와 사례들을 폭넓게 이용해서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한국은 1990년대 말 이후 ‘탈산업화론’이 일종의 상식처럼 퍼졌고,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산업이 이동하면서 노동이 거대하게 변했다고 흔히들 말한다. 하지만 제조업 고용의 감소와 제조업 자체의 쇠퇴를 혼동하면 안 된다. 국내총생산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증가했다.(171쪽)
“20년 전보다 더 적은 인원으로 훨씬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 제조업 고용 비중의 감소가 제조업 쇠퇴의 결과가 아니라 제조업의 노동생산성 향상에 따른 것임을 뜻한다.”(175쪽) 1987년과 마찬가지로 제조업 노동자들은 여전히 중요하고 강력하다.
한편 서비스업의 성장은 제조업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했다. 게다가 임금과 노동조건을 보면 서비스 노동자들의 상당수는 육체 노동자들이다(193쪽). 또 제조업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집단적으로 모여 있고, 표준화된 노동을 한다(199쪽). 이는 한국 사회의 계급구조가 다층화·파편화했다는 주장과 다른 그림이다.
무엇보다 서비스업의 성장은 1990년대 이후 서비스 노동자들의 비중과 힘을 보여 주는 것이고, 이 부문에서 여성 고용이 늘면서 노동계급의 새로운 부대가 확대되고 있다(206쪽).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계급의 집단적 힘과 잠재력은 거듭 증가해 온 것이다.
대다수 언론과 진보·좌파들은 한국의 비정규직 증가 추세도 과장한다. 물론 OECD 회원국 가운데 한국의 비정규직 비중이 가장 빠르게 커졌다. 하지만 2000년 이래 비정규직 비중은 대략 50퍼센트를 유지하고 있다. 비정규직이 무한정 늘고 있는 것은 아니다(268쪽). 따라서 고용 불안정성을 과장하면 안 된다. 노동자들은 이제 언제든 쓰다 버리는 “일회용” 신세가 됐다는 식의 주장은 과장일 뿐 아니라 사실도 아니다. 대개 불안정성에 관한 주장은 사회의 가장 취약한 집단을 출발점으로 삼아 성급하게 일반화해 버린다. 이는 신자유주의 폐해를 강조하려다 노동계급이 더는 신자유주의에 맞설 힘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289쪽)
무엇보다 비정규직 추세에 대한 과장은 노동계급 내부의 양극화를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를 통해 정규직의 호조건은 비정규직이 희생한 대가인 것처럼 왜곡한다. 하지만 대기업 노동자들의 상대적 고임금은 저임금 노동자들의 희생의 대가가 아니라 노동생산성 증대에 따른 비용 절감 덕분이자 저항의 대가이다.(333쪽)
따라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 투쟁은 “승리하는 순간 패배하는 것”(박태주 교수)이라든지 “성공의 역설”(〈한겨레〉) 같은 냉소적 태도야말로 노동계급 내 단결을 저해한다(338쪽). 개혁주의자들이 대안으로 내놓는 정규직 양보론은 “정규직 노동자들을 위축”시키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부와 기업주들의 공세에 일관되게 맞서 싸울” 주체가 아니라 시혜의 대상으로 보게 만든다.(341쪽)
혁명적 좌파
신자유주의에 따라 계급 구조가 바뀌었다는 주장의 대표적 사례이자, 불안정 노동 증대와 관련해 최근 주목 받는 것은 ‘프레카리아트’론이다. 프레카리아트론은 노동계급 일부의 처지가 비교적 열악해졌다는 사실을 단순히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이해관계가 전혀 다른 새 계급이 탄생했다는 주장이다. 프레카리아트론의 선구자인 가이 스탠딩은 불안정 노동자층을 크게 과장하고 노동계급의 다른 부문과 대립시켜 노동계급 내부의 분열을 조장한다.
이런 주장을 수용하면 결국 프레카리아트에 해당하는 노동자들과 기존 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 단결을 도모하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이는 앞서 제기한 개혁주의적 대안인 정규직 양보론을 강화해 주고 개혁주의적 노동조합 관료층의 상층 협상 추구를 강화하게 된다.(388쪽)
일부 좌파들은 대기업 정규직 조직 노동자들과 단절하고 불안정 노동자들을 사회 변혁의 주체인 양 부각시키거나, 좌파 노조 지도부 세우기 등을 대안으로 삼기도 한다. 또, 노동조합 관료주의를 이해하지 못한 좌파들은 ‘사회운동적 노조주의’ 등으로 대안을 삼기도 한다.
이런 모든 주장과 대안들에는 노동계급의 힘과 잠재력이 줄어들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노동계급》은 30년간 노동의 변화 속에도 노동계급이 건재함과 함께 그 잠재력은 더 커졌음을 보여 준다.
현실과도 맞지 않는 노동계급에 대한 왜곡·과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지배자들의 이간질 탓과, 무엇보다 개혁주의적 대안에 효과적으로 맞서는 혁명적 좌파가 아직 충분히 강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한국에서 혁명적 좌파가 성장하는 데서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을 “노동계급 잠재력에 대한 확고한 이해 속에서 그것을 현실화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이 책은 원칙 있는 주장과 계급의 단결을 위한 활동에 길잡이 구실을 것이다. 또,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에게 강요하는 파편화와 분열, 계급의식의 불균등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